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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화암 처사 이공 행장(華庵處士李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24
화암 처사 이공 행장
공의 성은 이(李), 휘는 침(忱), 바꾼 휘는 윤제(崙齊), 자는 백규(葵伯), 관향은 공주(公州)이다. 국초(國初)에 휘 명덕(明德)은 목은(牧隱)의 뛰어난 제자로 감사(監司)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공에게는 11대 선조가 된다. 공숙은 이조 참판 휘 효근(孝根)을 낳았고, 참판은 이조 참의 휘 림(琳)을 낳았고, 참의는 철산 부사(鐵山府使) 휘 공필(公弼)을 낳았고, 부사는 맹산 현감(孟山縣監) 휘 교(嶠)를 낳았고, 현감은 주부(主簿) 휘 시돈(時敦)을 낳았다. 주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에 추증된 휘 경운(慶雲)을 낳았고, 동지돈녕부사는 이조 참의에 추증된 휘 영숙(靈肅)을 낳았고, 참의는 진사 휘 위(韡)를 낳았다. 휘 위는 호가 혁회재(衋悔齋)이며 은봉(隱峯) 안(安) 선생주 74)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혁회재는 진사 휘 동명(東鳴)을 낳았고, 진사는 휘 만휘(萬輝)와 만방(萬芳)을 낳았다. 공은 만방(萬芳)의 아들이었으나 백부인 만휘(萬輝)의 후사로 나갔다. 비(妣)는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영장(營將) 오세장(吳世長)의 딸이다. 숙종 임술년(1682, 숙종8)에 주(州)의 월곡리(月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말하고 웃고 장난하고 노는 모습조차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면서는 날마다 과정(課程)을 준수하였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공경으로 형과 어른을 섬겼으며 몸가짐이나 말하는 것이 다급한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성장해서는 지방의 상서(庠序)나 서울의 태학(太學), 원근에 있는 장덕(長德)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당시의 명사(名士)인 권한수(權寒水)주 75), 이한포(李寒圃)주 76), 조이우(趙二憂)주 77), 이도암(李陶庵)주 78), 민단암(閔丹巖)주 79), 섬촌(蟾村)주 80) 같은 이들이 모두 공의 사우(師友)였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위아래가 뒤바뀌는 때를 만나고 게다가 사림(士林)의 당화(黨禍)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한층 격렬해져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뒤섞여 오랫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공은 포의(布衣)의 서생(書生)으로 비록 세상에 등용되지는 못했지만, 탄식과 분노는 커다란 무지개와 겹겹이 쌓인 노을이 천 길 높이로 솟은 듯한 기상이 있어 종종 읊는 시나 주고받는 편지에 드러나곤 하였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부터 영조 무신년(1728, 영조4)까지 여러 선정(先正)이 무함을 당하자 도내의 유생들을 이끌고 소장을 올리고 대궐 앞에서 절규한 것이 4~5차례였다. 간언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구중 대궐에 울리고 바람처럼 온 나라를 진동시켜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의 경중 고저(輕重高低)를 가름하는 데 힘을 보탰으니 어찌 공이 적다고 하겠는가. 10년 동안 과거를 중지하라는 하교가 내리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화학산(華鶴山) 아래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마치고자 계획하고 자호(自號)를 화암(華庵)이라고 하였다. 죽음에 임해서는 목욕을 하고 몸을 정갈히 한 뒤 새 자리를 깔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착용하고, 이어 여러 아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집안과 고을에서 처신하는 도리에 대하여 매우 상세히 경계하였다. 마지막에 주자(朱子)가 이른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은 직(直)일 뿐이다.주 81)"라는 구절을 암송하였다. 말이 끝나자 조용히 세상을 떠나니 때는 계축년(1733, 영조9) 1월 14일이었다. 배(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세희(世曦)의 딸로 지평 문홍헌(文弘獻)의 현손(玄孫)이다. 계배(繼配)는 강릉 유씨(江陵劉氏) 재창(再昌)의 딸로 산당(山堂) 유호인(劉好仁)의 5대손이다. 3남 2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정후(政厚), 인후(仁厚), 생후(生厚)이고 딸은 정지숭(鄭智嵩), 김명태(金命泰)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아득한 시골구석에서 태어나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가까이로는 한 고을의 선사(善士)들과 벗하고 멀리로는 한 나라의 선사들과 벗하면서 허물을 고치고 인(仁)을 보충하여 자신의 경륜을 키웠다. 사람과 짐승, 중화(中華)와 오랑캐, 군자와 소인의 분별과 관련된 시비(是非)와 의리(義理)에 대해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두려움 없이 큰소리로 주장을 펼쳐 스스로 시류(時流)의 분노를 일으키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후대 사람이 공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읽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감흥을 일으키고 탄식할 것이다. 대절(大節)이 이와 같으니 나머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무사재(無邪齋) 박장(朴丈)주 82)을 스승으로 삼아 향음례(鄕飮禮)를 배웠다. 박장(朴丈)이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서 100년 전 관(官)에서 향유(鄕儒)를 맞이하여 향음례를 행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당시 고을에 도암(陶菴) 이 선생(李先生)에게 수학한 사람으로 교관(敎官) 박헌가(朴獻可)와 화암(華庵) 이윤재(李崙齊) 2인이 있었지만, 교관은 이미 고인이 되어 이공(李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빈(賓)과 주(主), 개(介)와 준(僎)주 83)의 위치, 오르내리며 절하고 읍(揖)하는 의절(儀節)이 문채가 찬란하고 질서가 엄연하며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아 매우 조화로웠다. 관에서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이곳이 예절과 법도를 갖춘 고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오늘날 이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하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공을 흠모하던 뒤에 공의 5대손 병섭(秉燮)을 통하여 비로소 공의 유집(遺集)을 구해 읽어보고 전에 들었던 내용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삼가 차례대로 적어 병섭의 마음에 보답한다.
주석 74)은봉(隱峯) 안(安) 선생
은봉은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호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으로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박광전과 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공조 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을 역임했다. 저서로 《은봉전서》가 있다.
주석 75)권한수(權寒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ㆍ한수재(寒水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이다. 1660년(현종1) 진사가 되고 이후 대사헌,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한수재집》 등이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주석 76)이한포(李寒圃)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686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수찬, 교리, 응교, 대사간, 이조 판서, 우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에 올랐다.
주석 77)조이우(趙二憂)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86년(숙종12)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 정언, 경연동지사, 호조ㆍ공조ㆍ이조의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이우당집(二憂堂集)》이 남아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주석 78)이도암(李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이다.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희경(熙卿)이며,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寒泉)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702년 알성 문과에, 1707년 문과 중시에 급제했다. 저서에 《도암집》과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ㆍ(→,)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주석 79)민단암(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ㆍ세심(洗心)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로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저서로 《연행록(燕行錄)》, 《단암만록(丹巖漫錄)》 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석 80)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이다. 본관은 여흥, 자는 사원(士元), 호는 섬촌(蟾村)ㆍ정암(貞庵)이다.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747년(영조23) 집의(執義)ㆍ대사헌ㆍ공조 참판ㆍ성균관 좨주를 지냈다. 정경대부(正卿大夫)에 추증되었다.
주석 81)천지가 …… 뿐이다
주희가 임종하기 얼마 전에 병이 깊었는데도 제생(諸生)에게 강론하기를 "학문을 하는 요체는 오직 일마다 옳음을 살펴 구하고 그름을 결단코 제거하는 데 있다. 오래도록 쌓아 가면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어서 저절로 발하는 바에 모두 사사로이 굽어짐이 없게 된다. 성인이 만사에 응하고,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 직일 뿐이다.[爲學之要, 惟在事事審求其是, 決去其非. 積累久之, 心與理一, 自然所發皆無私曲. 聖人應萬事, 天地生萬物, 直而已矣.]"라고 하였다. 《朱子年譜 卷4 七十一歲 三月》
주석 82)무사재(無邪齋) 박장(朴丈)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無邪齋)ㆍ관수재(觀水齋)이다. 송치규(宋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주역(周易)》에 해박하고 정밀하였다. 정의림(鄭義林)ㆍ이지호(李贄鎬)ㆍ최인우(崔仁宇)ㆍ공병주(孔炳柱)ㆍ조병호(趙秉浩)ㆍ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주석 83)개(介)와 준(僎)
향음주례(鄕飮酒禮) 때 행사를 도와 주선하는 자를 가리킨다. 주인을 돕는 자를 준(僎), 빈(賓)을 돕는 자를 개(介)라 한다.
華庵處士李公行狀
公姓李。諱忱。改諱崙齊。字葵伯。貫公州國初有諱明德以牧隱高弟官監司贈領議諡恭肅。於公爲十一代祖也。恭肅生吏曹參判諱孝根。參判生吏曹參議諱琳。參議生鐵山府使諱公弼府使生孟山縣監諱嶠。縣監生主簿諱時敦。主簿生諱慶雲贈同知敦寧府使。同知生諱靈肅贈吏曹參議。參議生進士諱韡號衋悔齋。學于安隱峯先生之門。衋悔生進士諱東鳴。進士生諱萬輝萬芳。公卽萬芳之子。而出爲萬輝后。生妣海州吳氏營將世長女。以肅宗壬戌。生公于州之月谷里第。幼有異質。言笑嬉遊。見者奇之。自就傅。日遵課程。孝事父母。敬事兄長。持身出言造次不放及長出遊於庠序學校及遠近長德之門一時名勝。如權寒水李寒圃趙二憂李陶庵閔丹巖蟾村。皆其師友也。當天地翻覆。冠屨倒置之餘。加以士林黨禍。橫生層激。是非邪正。混久未定。公以布衣書生。雖不得用於世。而其感慨悲憤之意。蓋有長虹層霞。橫互千仞底氣象。而往往發於諷詠往復之間自肅宗甲午至英宗戊申。爲諸先正被誣。率道內儒生陳章叫閽者。爲四五度言雖不用。而其所以聲徹九閽。風動一國。而有力於邪正慝淑輕重低昂之間者。其功豈少補哉。及其有十年停擧之敎也。悵然歸鄕。築室於華鶴山下。爲躬耕終老之計。自號曰華庵。臨歿。沐浴操潔。設新席着深衣大帶因戒諸子以孝弟忠信居家處鄕之道。極其詳悉。末誦朱夫子所謂天地生萬物。聖人應萬事。直而已之語。語畢從容就逝。時癸丑正月十四日也。配南平文氏世曦女。持平弘獻玄孫。繼配江陵劉氏再昌女。山堂好仁五世孫生三男二女政厚仁厚生厚鄭智嵩金命泰也。嗚乎。公生於遐隅。慨然自拔。近而友一鄕之善士。遠而友一國之善士。攻闕輔仁以自展拓。至於是非義理。有關於人獸華夷君子小人之分者。無不明目張膽。高談大言。至於身觸時怒而不畏焉。使後之人。讀其言誦其行。不覺興感而咨嗟也。大節如此。其餘可槪也。余少師無邪齋朴丈。學鄕飮禮。朴丈因言吾鄕百年前。官邀鄕儒。將行此禮。不知所爲時。鄕有受學於李陶庵先生者。朴敎官獻可李華庵崙齊二人。而敎官已古。請李公爲相於是賓主介僎之位。升降拜揖之節。燦然有文。儼然有秩。不徐不疾。旣洽而止。官曰吾固知此爲文禮之鄕。而不圖今日至此之美也。贊歎不已云。欽慕之後。因公之五代孫秉燮。乃得其遺集而讀之。益信其前所聞者。謹序次以塞秉燮之意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