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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취호 처사 이공 행장(醉湖處士李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23
취호 처사 이공 행장
공의 성은 이(李), 휘는 승호(承灝), 자는 도민(道敏), 호는 취호(醉湖)이다. 세계(世系)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며, 고려조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이다. 진현관 학사(進賢館學士)를 지낸 휘 기밀(奇密),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휘 홍길(弘吉), 참판(參判)을 지낸 휘 일영(日映), 경창군(慶昌君) 휘 선제(先齊), 이조 참의를 지낸 휘 조원(調元),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휘 호선(好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휘 열(烈)은 모두 이름이 알려진 선조들이다. 고조인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인기(仁基), 증조인 휘 응근(應根), 조부인 휘 광하(光夏), 고(考)인 휘 종진(宗震)은 대대로 문학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신평 송씨(新平宋氏) 성묵(聖黙)의 딸이고, 계비(繼妣)는 진주 형씨(晉州邢氏) 효달(孝達)의 딸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헌종2) 9월 9일에 능주(綾州)의 단양리(丹陽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어질며 자애롭고도 너그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곁에 머물면서 진퇴(進退)나 출입(出入)에 오직 부모의 명을 따르며 어기는 일이 없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정도를 지나치자 대인(大人)은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매번 공의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하였다. 계모(繼母) 형씨(邢氏)를 섬기는 것도 한결같이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섬기는 것처럼 하여 온화한 말투와 부드러운 기색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밖에서 돌아오면 그때마다 반드시 무언가를 갖다 드렸으며 생선 한 마리 과일 하나와 같이 미미한 것일지라도 빠트리는 경우가 없었다. 아우들을 보살피고 아꼈으며 은혜로운 정이 순박하고 두터워 집안에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제가(諸家)를 두루 섭렵하여 문사(文詞)가 힘차고 풍부하였으며 더욱이 시의 운율에 뛰어났다. 매번 붕우들과 시와 술을 펼칠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초고를 읊어도 주옥(珠玉)처럼 아름다웠으며 낭랑한 목소리는 시를 토할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를 하면서도 시속의 기호를 따르지 않았고 과장(科場)에 나아가기는 했어도 몰래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청탁을 넣지 않았다. 평소에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명예와 이익에 관계된 곳에는 발을 디디지 않았다. 오직 산속의 서재(書齋)와 마을의 서당 등 적막한 구석에 자신의 자취를 감추고 벗들과 모여 강론을 펼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여생의 마지막 계책으로 삼았다. 간혹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경관을 만나거나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뜬 저녁이 되면 술 한 잔을 마시고 시 한 수를 지으면서 표연히 속세를 벗어나는 의표가 있고 아득히 천지를 자유롭게 떠돌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마치 사람이 사는 세상의 성쇠(盛衰)나 득실(得失)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일찍이 서재에 취호(醉湖)라는 편액을 걸고 간혹 성명(姓名)을 적어야 하는 상황을 만나면 그때마다 강호 취객(江湖醉客)이라고 일컬었으니 대체로 만년에 자신의 마음을 의탁한 말이었던 듯하다. 병술년(1886, 고종23) 7월 12일에 거동(車洞)의 우사(寓舍)에서 생을 마쳤다. 묘는 여러 차례 천장(遷葬)을 거쳐 태봉리(台峯里) 반탁동(半坼洞)에 있는 을좌(乙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영운(永運)의 딸이며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용휴(龍休)이고 차례대로 진휴(進休), 구휴(球休), 채휴(埰休)이며, 딸은 조병연(曺秉淵)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병순(炳純)과 병근(炳根)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과거(科擧)와 격식에 얽매어 걷잡을 수 없이 함께 휩쓸리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자가 대부분이다. 간간이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간혹 시사(時事)에 매달리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풍치와 기상(氣象)이 종종 자질구레한 사람들보다 훨씬 우뚝하여 당시 사람들의 명망이 집중되는 자가 있다. 이들은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가릴 수 없는 것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공이라면 애초에 그런 인물이 아닐 리가 없다. 진휴(進休)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선고(先考)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25년이 되었습니다. 그사이에 세상의 변화가 예측하기 어려웠고 집안도 뿔뿔이 흩어져 당시의 저술이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불초한 이 자식은 애통하고 한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당시에 종유(從遊)했던 분들 가운데 선고와 가장 가까웠던 분으로는 오직 장인(丈人)만 살아계십니다. 원하건대 대략을 찬술하여 후손들에게 선고(先考)의 지행(志行)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어린 시절부터 오랜 교분이 있고 인척 관계가 더해져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이승과 저승으로 멀어졌으니 옛날과 지금에 대한 감회가 일어 미치지 못하는 한이 늘 절실하였기에 차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醉湖處士李公行狀
公姓李。諱承灝。字道敏。號醉湖。系出光山。以麗朝尙書左僕射諱珣白爲鼻祖。進賢館學士諱奇密。直提學諱弘吉。參判諱日映。慶昌君諱先齊。吏曹參議諱調元。大司成諱好善。同副承旨諱烈。皆顯祖也。高祖通德郞諱仁基。曾祖諱應根。祖諱光夏。考諱宗震。世著文行。妣新平宋氏聖黙女。繼妣晉州邢氏孝達女。憲宗丙申九月九日。生公于綾州丹陽里。公天性溫仁慈厚。自幼在父母側。進退出入惟命是從。未有違異。早喪慈幃。哀毁過節。其大人慮其傷生。每寬慰之。事繼母邢氏。一如所生。溫言柔色。務盡其歡。每自外還。必有所獻。雖一鱗一果之微。未有闕焉。撫愛諸弟。恩誼純篤。戶庭之間。無有間言。博涉諸家。文詞宏贍。而尤長於詩律。每値朋友文酒之席。信口呼草。如瓊琚珠玉。琅琅有聲。愈出愈奇。業於程文而不趨時好。赴於試圍而不用關節。平日不見要貴之人。不涉聲利之地。惟掩身斂迹於山齋村塾寂寞之濱。講聚朋徒。課授蒙率。以爲餘生究竟計。或遇山水幽賞之地。風月淸澹之夕。一觴一詠。飄然有出塵之標。邈然有獨往之意。若不知人間世有榮悴得失也。嘗題齋顔以醉湖。或有標識姓名處。輒稱江湖醉客。蓋其晩年寓意也。丙戌七月十二日。卒於車洞寓舍。墓累遷而安厝於台峯里半坼洞乙坐原。齊南平文氏永運女。擧四男一女。長龍休。次進休。次球休。次埰休。女適曺秉淵。孫炳純炳根。餘皆幼。嗚乎。世之儒者局束於功令程式之間。滔滔同流。漫不自振者多矣。間有英才美質。或不免黽勉於時。而其風韻氣象。往往拔出於區區常調之外。而偉然爲時望之所歸。此其天質之美。自然呈露。而有掩不得者如此。如公者。未始非其人也。進休一日過余。泣且語曰。先人之沒。今二十有五載矣。其間世變區測。室家流離。當日著述。隻字不遺。此不肖所以痛恨罔極也。在當日遊從之列而與先人最熟者。惟丈人在焉。願爲之撰述梗槪。使爲後嗣者。知厥考志行之有在也。嗚乎。余於公。以丱角舊交。又忝瓜葛之親。聲氣攸孚。期詡漸密。居未幾何。幽明遽隔。緬古感今。常切未逮之恨。有不忍多辭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