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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통정대부 행 능주군수 손공 행장(通政大夫行綾州郡守孫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22
통정대부 행 능주군수 손공 행장
공의 휘는 인용(麟鏞), 자는 익삼(益三), 호는 신암(愼庵)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휘 부(富), 사도(司徒)를 지낸 밀성군(密城君) 휘 윤(贇)은 모두 상계(上系)의 이름난 조상이다. 문과(文科)를 거쳐 목사(牧使)를 지낸 휘 책(策),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낸 휘 비장(比長)주 67)은 모두 중엽(中葉)의 이름난 조상이다. 제학공(提學公)은 호가 입암(笠巖)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및 당시의 저명한 석학들과 더불어 15학사(學士)로 불리었으며, 금남공(錦南公) 최부(崔溥)와 임금의 명을 받아 국사(國史)를 함께 편수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벼슬을 내려놓고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으로 물러났다. 고조인 휘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에 추증되었고 증조인 휘 덕효(德孝)는 생원을 지냈다. 조부 휘 몽두(夢斗), 고(考) 휘 처상(處祥)은 모두 은덕(隱德)을 지녔다. 비(妣)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광인(光仁)의 딸로 품성이 인자하고 순후하며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잘 갖추었다. 순조 신묘년(1831, 순조31) 5월 21일에 창평현(昌平縣) 외남면(外南面) 사봉리(四峯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과 기질이 따듯하고 선량하며 외모가 뛰어나 사람들이 큰일을 담당할 재능이 있음을 알았다. 3세가 되어 부친상을 당했을 때 땅을 뒹굴고 통곡하여 어린 나이에 끝없이 슬퍼하는 모습에 곁에서 보던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외롭고 어린 나이에 일가도 없이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으니 그 처지를 말로 형용하기 어렵지만, 어머니를 모실 때에는 화평한 기색과 부드러운 말투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다. 평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어머니를 봉양할 방도가 없자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등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쓰지 않은 일이 없었고, 몸에 편안하고 입맛에 맞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마련하여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애통해하여 몸이 야위었고 장례를 치르는 모든 도구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실하게 준비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기일(忌日)을 맞으면 목욕을 하고 몸가짐을 정갈히 한 뒤 고기를 썰고 삶는 일을 몸소 하였고 제사에 임해서는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마치 목소리와 용모를 직접 뵙는 듯이 하였다. 오랫동안 부지런히 애를 써서 중년에 이르러서는 집안의 재력이 넉넉해졌다. 그러자 가까운 조상을 위한 제전(祭田)과 먼 조상을 위한 묘제(墓祭)를 지낼 땅을 마련하고 또 가난한 대종가(大宗家)와 소종가(小宗家)를 도와주었다. 가난하여 혼사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모든 친족에게는 그때마다 곳간을 털어 도와주었다. 안채에서는 무당의 술책을 쓰지 않았고 사랑채에서도 장기나 바둑 따위의 유희를 즐기지 않았으며 몸에는 화려한 의복을 걸치지 않았고 보고 즐기기 위한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직 효성과 우애, 근면과 검약, 청렴과 조용함, 소박하고 진실함을 자신과 집안을 위한 궁극의 계책으로 삼았다. 악류(惡類)들이 변란을 일으키자 친척과 마을 이웃들을 경계하여 단발령(斷髮令)을 따르는 무리에게 물들지 않도록 하고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머리를 깎고 사느니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게 낫다. 너희들은 절대로 세상의 변화에 휘둘리지 말라." 하였다. 을유년(1885, 고종22)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892, 고종29)에 함종 부사(咸從府使)가 되었다. 임인년(1902, 광무6)에 능주 군수(綾州郡守)에 제수되었다. 비로소 부임하여 갑진년(1904) 여름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고을을 다스릴 때는 명성과 공적이 널리 드러났으며 녹봉(祿俸) 수천을 덜어 고을 전체의 호역(戶役)에 응하니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석벽에 새겨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적어두었다. 고을에 최 충의공(崔忠毅公)주 68)의 정려(旌閭)가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공이 물자를 대주어 수선하게 하였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노사(蘆沙)주 69), 화서(華西)주 70) 두 선생은 실로 유문(儒門)의 정맥(正脈)이다. 문하에 나아갈 수는 없지만 문인(門人) 가운데 면암(勉庵)주 71)과 송사(松沙)주 72) 같은 우러러볼 만한 여러 어른이 계시다. 너희는 이들을 뒤따라 학문을 익혀야 한다." 하였다. 공은 면암의 소장(疏章)을 볼 때마다 그의 직언(直言)과 당론(讜論)에 탄복하면서 면암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하였다. 을사년(1905, 광무9) 여름에 병에 걸려 여러 달이 지나도록 회복되지 않았다. 11월이 되어 나라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 궐연(蹶然)히 일어나 이르기를, "국가 대계(大計)의 망극(罔極)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고는 탄식을 그치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병이 위독해져 약을 넘기지도 못하였다. 하루는 여러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고치고 선행을 보면 반드시 이를 따르는 것이 수신(守身)과 보가(保家)의 첫 번째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며느리와 딸들에게 경계하기를, "부인(婦人)은 순종을 덕으로 삼고 목소리가 규방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집에 전권(錢券)이 있자 가져다 찢으며 말하기를, "단지 다툼의 단서만 일으킬 뿐이다. 내가 선행을 남기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화를 물려주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 세수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자리로 나아가 조용히 숨을 거두니 곧 12월 15일이었다. 향리(鄕里)에서 모두 "선인(善人)이 세상을 떠났다." 하였다. 원근에서 서둘러 조문을 오는 이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주(州)의 가옥치(佳玉峙) 마을 위에 있는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계효(季孝)의 딸이고, 계배(系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영수(英壽)의 딸이며, 그 다음 계배(系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홍경(弘璟)의 딸로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영렬(永烈)은 선씨가 낳았고, 진사(進士)인 영하(永夏)와 조병상(曺秉相), 나영성(羅營成)에게 출가한 딸들은 백씨가 낳았다. 아들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과 유재홍(柳在弘)과 문제철(文濟哲)에게 출가한 딸은 문씨가 낳았다. 손자 이하는 모두 적지 않는다.
내가 같은 고을에 살면서 외람되이 공의 지우(知遇)를 입은 지가 오래이다. 매번 화락하면서도 신중하고 성실했던 공의 풍도(風度)를 볼 때마다 애호하는 마음이 한없이 일었다. 또 다섯 아들과 다섯 사위, 많은 손자가 뜨락에 가득하고 흰 머리와 붉은 슬갑(膝甲)주 73)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렸으니 이치가 잘못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아, 하늘이 원로(元老)를 남겨 두려고 하지 않아 공의 목소리와 풍채, 용모는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자손이 많고 남은 복이 끝나지 않았으니 어찌 공의 지업(志業)을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영렬(永烈)이 자기 삼종제(三從弟)인 영모(永謨)를 내게 보내어 행장을 부탁하였다. 내가 행장을 적기에 적합한 덕망과 문장을 지니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감히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고금에 대한 감회가 일어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을 근거로 수식(修飾)하고 윤색(潤色)하였을 뿐이다.
주석 67)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 비장(比長)
자는 영숙(永叔), 호는 입암(笠巖),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세조 10년(146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였다
주석 68)최 충의공(崔忠毅公)
최경회(崔慶會, 1532~1593)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또는 일휴당(日休堂),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왜병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웠다. 제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9일 동안 싸우다 전사했다.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주석 69)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이다.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뒤에는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외침(外侵)에 대한 6가지의 방비책을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주석 70)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호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이다. 1808년(순조8)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을 하여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주석 71)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배우고,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후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켜 격문을 열읍에 보내 호응을 촉구하고,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6월 11일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 지방 진위대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대마도에 감금되어 단식하던 중 그해 11월에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하였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돌아왔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주석 72)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호이다. 자는 회일(會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주석 73)붉은 슬갑(膝甲)
관직을 상징한다.
通政大夫行綾州郡守孫公行狀
公諱麟鏞。字益三。號愼庵。孫氏系出密陽。吏部尙書淸城府院君諱富。司徒密城君諱贇。皆上系顯祖也。文科牧使諱策。弘文館提學諱比長。皆中葉顯祖也。提學公號笠巖。與佔畢齋金先生宗直。及當時名碩。稱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同修國史。燕山朝退休扶安葛村。高祖諱興新贈副護軍。曾祖諱德孝生員。祖諱夢斗。考諱處祥。皆有隱德。妣高興柳氏光仁女。德性仁厚。閫範甚備。以純廟辛卯五月二十一日。生公于昌平縣外南面四峯里第。性氣溫良。體相峻茂。人知爲遠器。三歲而遭外艱。匍匐顚倒。孺哀罔極。傍人無不感涕。孤弱零鮮。生長外家。其情景難狀。而侍慈幃。以怡色婉辭。慰悅其志。家素貧甚無以爲養。漁樵耕牧。凡百事務。無不服勤殫力。使便身適口之物。畢給於前。其遭故也。擗踊毁瘠。送終凡具。必誠必信。俾無餘憾。遇忌諱之辰。沐浴操潔。裁割烹飪。躬親爲之。臨祭而悽愴怵惕。如見音容焉。積累勤苦。至中身而家溫力足。於是置近代祭田。及遠世墓祭之土。又補大小宗家之貧者。凡族親之貧而未能婚與葬者。輒傾囷助之家不用巫覡之術。庭不設博奕之戲。身不着華靡之服。手不持玩好之物。惟以孝友勤儉。廉靜澹泊。爲身家究竟計。非類之變。戒族戚隣里。俾勿浸染。薙令之行。語諸子曰。薙髮而生。不如存髮而死。汝輩愼勿爲世變所遷移也。乙酉除繕工監監役。壬辰咸從府使。壬寅拜綾州郡守。始赴任。甲辰夏解歸。其居官也。著有聲績。捐廩數千。以應一邑戶役。竪碑又磨崖。以識不忘。邑有崔忠毅公旌閭。歲久頹圮。公爲之出力以繕修。嘗語諸子曰。蘆沙華西兩先生。實儒門正脈。縱不能及其門。門人可仰如勉庵松沙諸丈在焉。此汝輩從遊之所也。公每得勉庵疏章。歎其直言讜論。雖不見用。而足以聳人觀聽云。乙巳夏屬疾。累朔沈綿。至十一月。聞有國變。蹶然起曰。國計罔極乃至是耶。歔欷不自勝。未幾疾添劇。藥餌不下。一日顧諸子曰。有過必改。見善必遷。此是守身保家第一事。戒諸婦女曰。婦人以順爲德。勿使聲出於閨旁之間也。家有錢券。取而折之曰。適以惹起爭端。吾雖不能貽之以善。乃反遺之以禍乎。有頃。盥洗着新。就席從容而逝。卽十二月十五日也。鄕里咸曰。善人逝矣。遠近奔弔者。相屬於道。翌年二月。葬于州之佳玉峙村上某坐之原。配寶城宣氏季孝女。系配水原白氏英壽女。系配南平文氏弘璟女。皆封淑夫人。男永烈。宣氏出。永夏進士。女曺秉相羅營成。白氏出。男永吉永鎭永實。女柳在弘文濟哲。文氏出。孫以下不盡錄。余在同鄕。爲公所辱知者久矣。每見其愷悌謹慤之風。令人有愛好無己之意。又見其五男五婿羣孫滿庭。白首朱紱。光榮炫耀。以爲福善禍淫。其理不忒。嗚乎。天不憖遺。而聲音儀容。已千古矣。螽斯詵詵。餘祿未艾。安知公之志業。不有能繼述者耶。永烈伻其三從弟永謨。來謁不朽之文。余非其人。固不敢承膺。而緬古感今。有不忍終辭者。謹据狀而爲之修潤焉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