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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만회당 윤공 행장(贈嘉善大夫吏曹參判晩悔堂尹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21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만회당 윤공 행장
공의 휘는 태행(泰行), 자는 낙행(樂行), 호는 만회당이다. 윤씨(尹氏)는 세계(世系)가 파평(坡平)에서 나와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시조 휘 신달(莘達)주 61)은 태사(太師)를 지냈고, 휘 집형(執衡)주 62)은 시호가 문정(文靖)이고, 휘 관(瓘)주 63)은 시호가 문숙(文肅)이다. 휘 위(威)는 시호가 문헌(文獻)인데 남원(南原)에서 역적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남원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므로주 64) 자손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만동(萬東)에 이르러 병화(兵火)를 당하자 능주(綾州)의 해망산(海望山) 산중에 우거(寓居)하면서 덕을 숨기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이분이 공의 10대조이다. 5대조 휘 상석(商錫)은 기근을 겪은 해에 온 고을의 공세(公稅)를 대신 납부하여 현종조(顯宗朝)에 성은(聖恩)을 입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비(碑)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고조 휘 홍도(弘道)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고 증조는 휘 창종(昌宗)이고 조부 휘 일주(壹周)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필중(必中)이고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비(妣)는 완산(完山) 이인석(李寅錫)의 딸로 부덕(婦德)을 잘 갖추었으며 남편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순조(純祖) 신미년(1811, 순조11) 9월 1일에 회덕리(懷德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외모가 준수하고 진솔하며 겉으로 꾸미지 않았고 성품은 온화하고 침착하였으며 교유하는 이들이 모두 선사(善士)였다. 어려서부터 지조(志操)를 지녀 말하고 웃는 것도 범상치 않았고 일찍이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언급한 적이 없으나 선악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거나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절(儀節)은 추위가 혹독하고 덥거나 비가 내리더라도 조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8세에 서당 선생에게 나아가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을 배웠는데,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정하고 읽고 사색하는 일을 밤낮으로 멈추지 않았다. 장로(長老)들이 기특하게 여기고 공을 아끼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평범한 애들과 달라서 성취하는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 하였다. 본래 집안이 곤궁하여 공은 물고기 잡고 나무하고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일을 몸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는 기쁘게 하기에 힘썼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는 공경을 다 하였으며 부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시(詩)와 예(禮)를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사촌 아우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음식은 반드시 골고루 나누어 먹었고 술도 혼자 마시는 일이 없어 화락한 기운이 일가에 넘쳐났다. 몸가짐은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여 업신여기거나 예의 없는 기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일 처리는 주도면밀하고 세심하여 망설이거나 대충대충 처리하려는 정상이 마음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서로 왕래하는 빈객과 유람을 즐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지만 정성스럽게 대접하여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부친의 병환이 매우 위독해지자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피를 마시게 하여 3일이면 끝날 수명이 늘어나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상을 치를 때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전(奠)을 올리고 곡(哭)을 하는 의절(儀節)이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빈(殯)주 65)이 끝난 뒤에도 상복(喪服)의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고 추워도 옷을 껴입지 않았고 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얼굴빛은 검어지고 소식(素食)을 하는 것이 옛 효자에 뒤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도 아버지의 상을 치르던 때와 같았다. 하루는 유서(遺書)를 남기며 이르기를, "내 죽음은 3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선(善)하지도 못하면서 오만하게 날뛰며 사악함에 물들어 사는 것보다는 정도를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또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천도(天道)를 거스르면 화가 생겨나고 천도를 따르면 복이 이른다. 선(善)은 어겨서는 안 되고 악(惡)은 따라서는 안 된다. 겸허함과 공손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검소함과 간략함으로 집안일을 처리하며 삼가고 조심하며 책을 읽어 집안의 선한 자손을 만드는 것이 내가 평생 바라던 일이다." 하였다. 하루는 장경일강(莊敬日强)주 66) 4자를 벽에 써놓고 아침저녁으로 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평소에 윤리(倫理)를 소중히 여기고 유학(儒學)을 숭상하며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권세(權勢)를 뒤쫓지 않아, 곤궁함을 고수(固守)하고 졸렬(拙劣)함을 편안히 여겼다. 좋은 계절을 만날 때마다 술을 빚고 안주를 장만하여 산수가 뛰어난 곳으로 마을의 오랜 친구들을 불러 술에 취해 소요하면서 하루를 즐겼으니 공은 풍류와 흥취가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어떤 인물인지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금상(今上) 신묘년(1891, 고종28) 9월 2일에 편안히 생을 마쳐 본리(本里) 안산(案山)의 오른쪽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일엽(日燁)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다. 계배(繼配)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해인(海仁)의 딸로 1녀를 두었다. 아들 병임(秉臨)은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여산(礪山)의 송두옥(宋斗玉)에게 출가한 딸은 선씨 소생이고 홍기모(洪基謨)에게 출가한 딸은 박씨 소생이다. 종질(從姪)인 병현(秉玹)을 후사로 삼았으며 병현은 광산(光山) 이주태(李周泰)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정섭(定燮)을 낳았다. 정섭이 대인(大人)의 명으로 가장(家狀)을 내게 가지고 와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내가 행장을 적을 덕망과 문장을 지닌 인물이 못되지만, 병현이 나의 벗이니 참으로 그의 말이 징험할 만하기에 위와 같이 차례대로 적어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취사(取捨)를 기다린다.
주석 61)시조 휘 신달(莘達)
윤신달(尹莘達, 893~973)으로 918년에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 벽상익찬 공신(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주석 62)휘 집형(執衡)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윤금강(尹金剛)의 아들이자,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아버지로, 검교 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냈으며,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주석 63)휘 관(瓘)
윤관(尹瓘, ?~1111)으로 자는 동현(同玄)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102년에 지공거를 맡았고 이어서 재추(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숙종 대 후반에서 예종 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고 이후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애걸하자 조정의 결정으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하였다.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래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인종(仁宗) 8년(1130)에 예종(睿宗)의 묘정에 배향하면서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태후(文敬太后) 이씨(李氏)의 시호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주석 64)역적을 …… 받았으므로
윤위(尹威)는 1200년 남원(南原)에서 복기남(卜奇男)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관찰사가 되어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살면서 본관을 남원으로 하면서 파평에서 분적(分籍)하였다.
주석 65)빈(殯)
본래 대렴(大斂)을 마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서쪽 계단 위쪽에 묻어둔 관에 임시로 안치하는 상례의 절차이다. 여기서는 정식으로 빈을 한 것이 아닌 상황이므로 길가의 구덩이에 임시로 안치한 상태라는 뜻이다.
주석 66)장경일강(莊敬日强)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군자는 장중하고 공경함으로 날마다 굳세어지고, 안일함과 방자함으로 날마다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 하였다.
贈嘉善大夫吏曹參判晩悔堂尹公行狀
公諱泰行。字樂行。號晩悔堂。尹氏系出坡平。爲東方大姓。始祖諱莘達太師。有諱執衡諡文靖。諱瓘諡文肅。諱威諡文獻。討賊南原。以功食菜南原。子孫仍貫焉。至諱萬東。當兵火。寓綾之海望山中。隱德不仕。寔公十世。五世祖諱商錫。遇歲饑。替納一邑公稅。顯宗朝蒙恩贈參判。鄕人士立碑頌之。高祖諱弘道通政。曾祖諱昌宗。祖諱壹周贈通政。考諱必中贈參議。妣完山李寅錫女。婦德甚備。無違君子純廟辛未九月一日公生于懷德里體相峻茂眞率不爲表襮。和厚詳審。所交遊皆善士。幼有志操。言笑不凡。未嘗短長人。而淑慝甚嚴。天性至孝。定省之節。進退之儀。雖祈寒暑雨。少無闕焉。八歲就學塾師。授小學孝經等書。嚴立課程。俯讀仰思。晝宵不輟。長老奇而愛之曰。此兒異於凡。進就不可量也。家素貧窶。漁樵耕牧。無不躬幹。其養親也致其樂。其接人也致其敬。以承庭訓詩禮爲家法。與諸從弟。友愛甚篤。食必均味。酒無獨酌。怡怡之氣。洋溢家門。其持身也和而莊。侵侮好狎之意。不見於貌。其處事也。詳而密。依違苟且之狀。不介于心。過從之賓。遊賞之人。連絡不絶。接待款厚。無一人不歡。親疾甚劇。露禱灌血。得延三日之命。終以天年。擗踊之儀。奠哭之節。一遵禮制。旣殯不脫絰帶。寒不重衣。暑不揮扇。面墨行素。不下於古孝也。遭內艱。亦如前喪。一日遺書曰。吾死不過三年。匪類鴟張。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又戒子孫曰。逆天則禍生。順天則福至。善不可以違。惡不可以從。持己以謙恭。處家以儉約。謹勅讀書。做人家好子孫。吾畢生所願也。一日以莊敬日强四字。書于壁右爲朝夕常目之資。平日愛好倫理。敦尙儒雅。不慕名利。不趨權勢。而固窮守拙。每遇佳節。釀酒備肴。邀鄕黨知舊。婆娑徜徉於山水奇絶處。以成終日之樂。風流興致。有異於人。此其非出塵之表。何以若此乎。令人可想。當宁辛卯九月二日考終。葬本里案山右艮坐原。配寶城宣氏日燁女。擧一男一女。繼配咸陽朴氏海仁女。擧一女男秉臨早死。無育。女礪山宋斗玉宣氏出。洪基謨朴氏出。以從姪秉玹爲后。娶光山李周泰女。生男定燮。定燮以大人之命。抱家狀。有一言之託。顧非其人。秉玹余友。信其言可徵。序次之如右。以竢立言君子裁擇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