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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죽와 처사 문공 행장(竹窩處士文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20
죽와 처사 문공 행장
공의 휘는 영수(永壽), 자는 극여(極汝), 호는 죽와(竹窩)이다. 세계(世系)는 남평(南平)에서 나왔으며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이 공의 상조(上祖)이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대대로 능성(綾城)에 살았으며 충효와 시(詩)ㆍ예(禮)를 세업(世業)으로 삼아 사림(士林)에 이름이 났다. 고(考)는 휘가 혁진(爀鎭)이고 호는 오재(鰲齋)이며,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영환(永桓)의 딸이다. 순조 신유년(1801, 순조1)에 우봉리(牛峯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홍씨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곰[熊]을 홍씨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잘 기르거라. 이 아이가 너희 집안의 천리마이다." 하였다. 공이 태어난 뒤 소자(小字)를 웅(熊)이라고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기와 국량이 남다르고 타고난 자질이 자애롭고 선량하였다. 아이들과 놀면서 한 번도 다툼을 벌이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구하면 차마 자기 입으로 먼저 가져가지 못하고 반드시 가슴에 품고 와서 부모에게 드렸다. 갑술년(1814, 순조14)에 큰 흉년이 들어 쌀 동이가 텅 비게 되었다. 공은 겨우 10여 세였건만 항상 물고기를 잡고 나물을 캐어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부모의 몸에 편하고 입맛에 맞는 물품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형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채소, 나물 따위일지라도 반드시 한 그릇에 담아 형과 함께 먹었다. 그해에 온 가족이 돌림병에 걸려 형이 죽고 양친이 모두 위태로웠다. 공은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양친이 복용할 약을 맛보면서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때때로 형의 널을 어루만지며 목 놓아 슬피 울었다. 몇 달이 지나 양친이 모두 회복되자 향리(鄕里)에서 감탄하며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학업에 전력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자손을 가르치고 훈도하는 일에 더욱 간절하게 마음을 쏟았으며 의방(義方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금오산(金鰲山)의 뛰어난 산수를 좋아하여 초가를 엮고 오솔길을 열어 도서(圖書)와 금(琴)과 술을 마련하여 아침저녁으로 시를 읊조렸으며 빈객이나 붕우가 이따금 이르면 시를 창화(唱和)하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자못 흥취를 다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 7월 27일에 정침(正寢)에서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배(配)는 공주 이씨(公州李氏) 문길(文吉)의 딸로 성품이 부드럽고 온순하며 행실이 단정하고 얌전하여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묘(墓)는 작약산(芍藥山) 아래 정좌(丁坐)에 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정휴(定休)는 백부의 후사가 되었고 효행으로 추천을 받았다. 둘째는 석휴(碩休)이다. 딸은 광산(光山)의 이선호(李瑄鎬), 강화(江華)의 최익교(崔益敎), 전주(全州)의 이문종(李文宗)에게 출가하였다. 정휴(定休)의 아들은 봉환(鳳煥), 석휴(碩休)의 후사가 된 용환(龍煥), 천휴(千休)의 후사가 된 기환(麒煥), 그리고 귀환(龜煥)이 있다. 아, 공은 곧 옛날의 유로(遺老)와 같은 인물이다. 어려서는 효제(孝悌)로 이름이 났고 장성해서는 신의(信義)로 알려졌으며 늙어서는 염정(恬靜 물욕 없이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칭송을 받았다. 말을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일을 처리하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집안에서 고을에 이르고 친척에서 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을 흠모하고 공경하면서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의림(義林)주 60)은 어려서 선인(先人)을 곁에서 모실 때 공에 관한 얘기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주저하면서 실행하지 못하고 일도 많아서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하였으니 이제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선인(先人)의 또래가 차례대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 박아(博雅)하고 장자(長者)의 후덕한 풍모를 가진 향당(鄕黨)의 원로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봉환(鳳煥)이 공의 유장(遺狀)을 안고 와 나에게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청하였다. 나 같이 어리석은 자로서는 진실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지만, 요행스럽게 혼자만 살아남은 인생이 머리가 흰 늙은이가 되어 향당 선배의 유언(遺言)과 유사(遺事)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비통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60)의림(義林)
본 행장의 지은이인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이다.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3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일신재집(日新齋集)》 21권 10책과 《일신재 선생 연원록(日新齋先生淵源錄)》 3권 2책이 있다.
竹窩處士文公行狀
公諱永壽。字極汝。號竹窩。系出南平。江城君諱益漸。其上祖也。至中葉。世居綾城。以忠孝詩禮著爲世業聞于士林考諱。爀鎭。號鰲齋。妣豐山洪氏永桓女。以純廟辛酉。生公于牛峯里第。先是洪氏夢一老人持熊與之曰。善養之此其汝家千里駒也。旣生。小字曰熊。自幼志局不羣。天姿慈諒。與兒曺遊嬉。未嘗爭競。得一美味。不忍先入口。必懷而獻之。當甲戌大無。甁罌枵如。公方十餘歲。常漁採爲養。而便身適口之物。未嘗乏焉。與其兄友愛甚至。得蔬食菜咬。必共一器而食。是歲渾家犯疫。兄歿。兩庭俱危。公露禱嘗藥。夜不解帶。時時撫柩哀號。居數月。兩庭皆蘇。鄕里莫不歎賞。嘗以不得專力學業爲恨。敎子訓孫。尤惓惓致意。導以義方者。無所不至。愛金鰲水石之勝。結茅開逕。圖書琴酒。日夕嘯咏。賓朋時至。唱和酬酢。頗盡其趣。以乙丑七月二十七日。考終于正寢。享年六十五。配公州李氏文吉女。婉順貞靜。閫範無違。墓在芍藥山下丁坐合兆。二男三女。男定休。系伯父。以孝薦剡。碩休。女光山李瑄鎬江華崔益敎全州李文宗。定休男鳳煥龍煥系碩休后。麒煥系千休后。龜煥。嗚乎。公卽古之遺老也。幼以孝弟著長以信義聞。老以恬靜稱。出言而人無不信。處事而人無不服。自家庭至鄕閭。自親戚至朋友。皆愛慕欽欽。各得其心。義林幼侍先人側。得聞公久矣。而因循多故。未得一承顔範。今爲三十年間事耳。先人年行。次第奄歿。而鄕黨耆舊。博雅長厚之風。不可得以復見矣。鳳煥抱其遺狀。請予脩潤。以予無似。固不敢下手。而孤露餘生。至老白首。得見鄕黨先輩遺言遺事。其悲感爲何如也。玆不敢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