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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묵계 박공 행장(贈嘉善大夫戶曹參判黙溪朴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9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묵계 박공 행장
공의 휘는 장근(章根), 자는 진초(震初)이고 묵계는 그의 호이다. 세계(世系)는 진원(珍原)에서 나왔으며 직제학을 지낸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주 50)이 공의 중조(中祖)이다. 세자사부(世子師傅) 증 이조 판서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주 51)이 공의 7대조이다. 죽천(竹川)은 휘 근효(根孝)를 낳았다. 근효는 호가 만포(晩圃)이고 관직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임진년(1592, 선조25)에 공훈(功勳)으로 이름이 났다. 군자감 정은 휘 춘수(春秀)를 낳았다. 춘수는 호가 아수(我誰)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직은 직장(直長)을 지내고 병자년(1636, 인조14)에 의병을 일으켰다. 직장은 휘 몽형(蒙亨)을 낳았다. 몽형은 호가 농은(農隱)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보성(寶城)에서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살았으며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만리(萬履)는 참봉을 지냈고 조부 휘 무석(武錫)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고(考)인 휘 수원(守遠)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진주 소씨(晉州蘇氏) 식(植)의 딸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계비(繼妣)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유중(維重)의 딸로 부덕(婦德)으로 칭송을 받았고 영조(英祖) 계유년(1753, 영조29) 10월 9일에 장흥부의 녹동리(鹿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장난치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부모님 곁을 지키며 공손하고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스승에게 나아가주 52) 공부하게 되자 송독하여 익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조금 자라서는 직접 집안일을 처리하여 집 안팎을 드나들며 온 힘을 다하였고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일이 끝나고 여력이 있으면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고 책을 읽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문장의 이치와 문사(文詞)의 화려함이 찬연하게 날로 성취를 이루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를 위한 공부는 위기(爲己)의 학문이 아니다. 지금 세상을 살면서 그만둘 수는 없더라도 또한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일 수는 없다." 하였다. 늘 경전의 주지(主旨)에 몰두하고 예설(禮說)의 단서를 찾는 것을 존심치기(存心治己)의 근본으로 삼았다. 집안에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반드시 의절(儀節)을 강구(講求)하여 하나하나 예를 따랐으며 일찍이 임시방편으로 시속(時俗)을 따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친척이나 오랜 벗들이 공을 본받아 행하였으며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앞다투어 공에게 와서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을 당했을 때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애통함에 몸이 무척 수척하게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났다. 봄, 가을이 되면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며 슬퍼하기를 마치 부모를 대하는 듯이 하였고 삭망(朔望)이 되면 분영(墳塋)에 성묘를 빠트리지 않았다. 형제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긴 베개와 큰 이불로 함께 자는 일을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재숙(齋塾)을 세워 서적을 비치하고 사우(師友)를 맞이하며 자손의 과정(課程)을 점검하였는데 분명하여 규정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친척이나 이웃이 병이 들거나 죽어서 상례를 치르거나 굶주리거나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안부를 묻고 진휼하면서도 집안에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선영 아래에 집 한 칸을 짓고 영모(永慕)라고 편액을 걸었다. 매번 경사스러운 날이나 좋은 계절이 오면 친족을 불러 모아 정겨운 담화를 펼치고 벗들을 모아서 그윽한 정취를 드러내고 자제와 향리(鄕里)의 젊은이들을 불러서 강서(講書) 규정이나 독법에 대한 의절을 거행하였다. 평소에 공경과 근신(謹愼)으로 자신을 지키고 충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여 소문이 미치는 곳에서는 애모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군자다운 어른으로 추앙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 6월 4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83세였으며 살던 동네인 시근등(柿根嶝)의 사좌(巳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들 정환(廷煥)이 수직(壽職)주 53)을 받아 귀하게 되면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흥덕 장씨(興德張氏) 세준(世浚)의 딸로 3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재무(載茂), 재충(載忠), 재철(載喆)이다. 계배(繼配)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진계(震啓)의 딸로 2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계환(桂煥), 정환(廷煥)이며 정환은 수직(壽職)으로 대호군(大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손자는 중흥(重興), 중회(重會)주 54), 중운(重運)주 55),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주 56),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주 57)이다. 증손(曾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준수하고 특출한 자질로 시(詩)와 예(禮), 문헌을 갖춘 집안에 태어나서 가풍의 영향을 받고 학문과 덕행을 갈고닦아 이처럼 우뚝하게 수립하였다. 마땅히 가슴에 품은 경륜을 펼쳐 한 시대에 쓰여야 했건만 동강(東岡)주 58)을 굳게 지키고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공에게는 진실로 유감이 없겠지만 사세(斯世)의 아쉬움이 어떠하겠는가. 공의 계윤(季胤)주 59) 중순(重淳)이 아들 기현(琦鉉)을 보내 공의 덕을 서술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근방에 사는 후생(後生)으로 비록 같은 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삼가 공을 우러러 흠모한 지 진실로 매우 오래되었다. 이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약간의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보태었다.
주석 50)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
1368?∼1446?. 초명은 희종(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전라도 경차관(全羅道敬差官),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주석 51)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
1526∼1597.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헌릉 참봉(獻陵參奉), 왕자의 사부(師傅), 함열(咸悅)·회덕(懷德)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장이 되었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주석 52)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주석 53)수직(壽職)
조선 시대에 노인을 우대하여 주는 벼슬로, 노인직(老人職)이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주석 54)중흥(重興), 중회(重會)
《송사집》에 실린 〈증호조참판박공묘지명(贈戶曹參判朴公墓誌銘)〉에 따르면, 첫째인 재무(載茂)의 아들이다.
주석 55)중운(重運)
둘째인 재충(載忠)의 아들이다.
주석 56)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
넷째인 계환(桂煥)의 아들이다.
주석 57)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
다섯째인 정환(廷煥)의 아들이다.
주석 58)동강(東岡)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는 곳을 이른다. 《후한서(後漢書)》 〈주섭열전(周燮列傳)〉에 "선세(先世) 이래로 국가에 대한 공훈과 임금의 은총이 대를 이어 왔는데 그대만 어찌하여 동강의 언덕을 지키려고 하는가?[自先世以來, 勳寵相承, 君獨何爲守東岡之陂乎?]"라는 구절이 있다.
주석 59)계윤(季胤)
막내아들의 맏아들이다.
贈嘉善大夫戶曹參判黙溪朴公行狀
公諱章根。字震初。黙溪其號也。系出珍原。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其中祖也。世子師傅贈吏曹判書竹川先生諱光前。其七世祖也。竹川生諱根孝。號晩圃。官軍資監正。壬辰著勳。監正生諱春秀。號我誰。中司馬。官直長。丙子擧義。直長生諱蒙亨。號農隱。通德卽。自寶城移寓長興府。是公之高祖也。曾祖諱萬履。參奉祖諱武錫。贈司僕寺正。考諱守遠。贈左承旨。妣晉州蘇氏植女。無育。繼妣寶城宣氏維重女。以婦德稱。以英廟癸酉十月九日。生公于府之鹿洞里。幼而岐嶷。不好戱遊。日侍親側。唯諾唯謹。就傅上學。誦習不放。家貧甚。稍長。躬幹家務。出入竭蹶。備極忠養。行有餘力。輒侍側讀書。以悅親志。文理詞華。斐然日就。嘗曰。功令非爲己之學。居今之世。雖不可廢。而亦不可以專力於此也。每潛沈經旨。紬繹禮說。以爲存心治己之本。家有冠婚喪祭。必講求儀節。一一從禮。未嘗苟且循俗。是以親戚知舊。效而行之。有未瑩處。爭來取決焉。遭前後喪。一遵家禮。哀毁備至。杖而後起。春秋霜露。悽愴如見。朔望墳塋。展省無闕。與兄弟友愛甚篤。長枕大被。老而不替。立齋塾儲書籍。邀師友課子孫。無不的有成規。族戚隣里。有疾病死喪及飢饉匱乏。輒存訊之賙恤之。不知家力之不贍也。晩構一室於先壟下。題其顔曰永慕。每以佳辰良節。會族親以舒情話。聚朋舊以暢幽情。招子弟及鄕里少年。行講規讀法之儀。平居以恭謹持己。以忠慤接物。風聲攸曁。無不愛慕欣欣。以君子長者推之。乙未六月四日考終。享年八十三。葬于所居坊柿根嶝巳坐原。以子廷煥壽貴。贈戶曹參判。配興德張氏世浚女。擧三男。曰載茂載忠載喆。繼配仁川李氏震啓女。擧二男。曰桂煥廷煥。壽陞大護軍。孫曰重興重會重運重玟重萬重龍。重淳官通政。重熙重憲。曾孫以下不盡錄。嗚乎。公以秀爽雋異之資。生於詩禮文獻之家擩染濯磨偉然植立如此宜其有展布蘊藉。以需一時之用。而固守東岡。優遊卒歲。在公固無憾焉。而爲斯世之缺望爲何如耶。公季胤重淳。伻其子琦鉉來謁狀德之文。余以傍近後生。雖靡倂世。而嘗竊慕仰。固已久矣。玆不敢以匪其人牢辭。謹据家狀。略加修潤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