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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송암 오공 행장(松庵吳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8
송암 오공 행장
송암 오공의 휘는 수화(壽華), 자는 태중(泰仲)이다. 고려조의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주 48)이 공의 시조(始祖)이다. 4대를 내려와 휘 현필(賢弼)에 이르러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지고 이로 인하여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대대로 작위와 공훈이 드러났다. 휘 충을(忠乙)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현손(玄孫)인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다. 보성으로부터 능주(綾州)의 대곡(大谷)에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인하여 무덤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부터 오씨는 능주에 살게 되었다. 증손인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절제사(節制使)로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하여 조정에서 병조 참판에 추증하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공의 8대조이다. 고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후유(厚有)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이다. 고(考)는 휘가 치상(致祥)이고 호는 계은(溪隱)이며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경우(警禹)의 딸로 일송(一松) 홍치(洪治)주 49)의 후손이다. 헌종 을미년(1835, 헌종1) 11월 무자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스스로 말하고 먹을 줄 알게 되자 응대와 대답에 어김이 없이 순종하였으며, 부모가 병환을 앓으면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8세 때 대인(大人)이 몸소 밭을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몰래 주막으로 가서 술을 사서 대인을 대접하려고 하자, 주막 아낙이 공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겨 안주까지 갖추어 주고서 값을 말하지 않았다. 맏형과 뜻을 같이하고 경서를 물려받아 쓰면서 밤낮으로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세가 되자 맏형에게 이르기를, "집안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셨으니 우리 형제는 형편상 함께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집안일을 맡아 늙은 부모를 편안히 모시고 또 형님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몸소 부지런히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대인(大人)의 성품이 준엄하여 노기를 띨 때마다 집안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지만, 공은 그때마다 온화한 말로 넌지시 간하여 대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대인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둘째 아이와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저절로 풀어진다."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매우 위독해지자 여러 날에 걸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뽑아 바쳤으며 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몸이 말라 뼈만 앙상한 채로 애통해하는 모습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대인이 연로한 나이에 배필을 잃은 것을 보고 마음이 공허하고 적적할 것을 염려하여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가까운 옛친구들을 초빙하여 부친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중년의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분가(分家)를 하였지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그치지 않았다. 집안일은 반드시 부친의 일을 먼저 처리한 뒤 자기 집안일을 처리하였다. 형제 5인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각각 성가(成家)를 하여 차례차례 분가(分家)하게 되자 살림을 차리는 데 필요한 온갖 것에 대하여 공이 반드시 물자를 대어주어 형 집에서 나누어 내는 비용이 없도록 하였다. 얼마 뒤 여러 아우에게 이르기를, "아버님의 연세가 매우 많으시다. 공양하는 의절은 나중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찌 오로지 큰형님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있겠는가. 한 달 중에서 15일 치 양식은 내가 드릴 것이니 나머지 15일은 너희 세 명이 각각 5일 치씩 드리거라." 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번갈아 양식을 대어 매우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喪禮)를 치를 때 노쇠했다는 이유로 애통함을 누그러트리지 않았으며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와 산재(散齋)에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큰형을 섬기는 것도 엄부(嚴父)를 섬기는 듯하여 크고 작은 집안일을 반드시 여쭌 다음 거행하였다. 큰형이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설사를 하면 그때마다 자기 손으로 치웠다. 형의 자식을 보살피는 일도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지극하여 갖가지 보살피는 일을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여러 아우와 여러 제부(弟婦)도 역시 서로 친애하여 가진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함께 나누었다. 이를 미루어 친척과 벗에게까지 미치니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한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다. 도중에 그 사람이 병에 걸리자 함께 오던 이들은 모두 먼저 떠났지만, 공은 행낭 안의 물건을 팔아 그를 치료해주고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왔다. 이웃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집을 짓도록 물자를 대주어 편안히 지내도록 하였고 열읍(列邑)의 선비들이 글방을 마련하려고 하자 공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다방면으로 알아보아 일이 진척되도록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마련하여 종족(宗族)을 화목하게 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 고향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였다. 흉년이 들어 빈궁한 교우(交友)나 가난한 친족이 살아가기 어려우면 그때마다 진휼(賑恤)하였고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사망(死亡)과 상사(喪事)에 문안하거나 물품을 보내는 일을 그때마다 빼놓지 않았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비적(匪賊) 무리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공은 자제(子弟)들과 친척을 모아놓고 잘못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평소에 인륜(人倫)을 사랑하고 선(善)을 즐겨 행하며 의(義)를 좋아하였고 화려한 명성이나 영달(榮達)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별서(別墅)를 짓고 작은 길을 내어 오가며 시를 읊조리고 빈객이나 벗이 이르면 그때마다 곧바로 잔을 돌려 술에 취하면서 몹시 즐거워하였다. 평소 행실이 쌓이자 명망이 암암리에 드러나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의 유림이 조정에 천거하고 아뢰어 침랑(寢郞)에 제수되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표창을 받았다. 여러 아들이 정문을 세우려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무엇 하나 잘한 것이 없건만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이 되어 하늘을 속인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고, 굳이 물리쳤다. 이 때문에 여러 아들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을미년(1895) 봄 병이 들어 거의 위태롭게 되자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경계하기를, "효(孝)로 선조를 받들고 의(義)로 자식을 가르치며 선한 자가 아니면 사귀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야 선대의 유업을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다. 보화(寶貨)는 써버리면 다 사라지지만 충효는 누려도 끝이 없다. 학식을 쌓자면 반드시 성취를 이루어야 하고 농사를 업으로 삼자면 반드시 힘을 다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를 기억하거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세상을 떠나니 곧 3월 27일이었다. 향리(鄕里) 인사(人士)들은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칠송(七松)의 가락동(嘉樂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니 곧 전배(前配) 고씨(高氏) 묘의 왼쪽이었다. 고씨는 본적이 장택(長澤)이고 시우(時祐)의 딸이며 참의를 지낸 신부(臣傅)의 후손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다. 계배(系配)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석우(錫祐)의 딸이며 학성군(鶴城君) 완(完)의 후손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장섭(長燮), 덕섭(德燮)이고 딸은 이승정(李承正)에게 출가하였다. 장섭은 재동(在東), 재남(在南), 재경(在慶)을 낳았고 덕섭은 재원(在元)을 낳았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로웠으며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의가 있었다. 또 마음 씀씀이가 후덕함에 가까웠으며, 처신은 주도면밀하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자애롭고 인정이 넘쳤으며 일 처리는 공평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사람이나 외부인이나 공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공을 편안하게 여겼다. 자신은 화락함을 누리고 집안은 이로써 평안하였으며 훌륭한 명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시경》 〈벌목(伐木)〉에서 노래한 '신이 들어주어 마침내 화평하게 되리라.'는 것이 공을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지우(知遇)를 입어 앞뒤로 20년에 걸쳐 논의를 반복하며 깨우침을 얻었고 출입하며 의지하였으니 그 힘이 적지 않았다. 어찌 공이 조금 더 머물지 않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버릴 줄 알았겠는가. 장섭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행장은 평소에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 쓸 수 없습니다. 대인과 서로 잘 알던 분으로 말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식견이 천박하고 고루한 몸이라서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차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어서 대략을 약술하여 돌려 보낸다.
주석 48)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윤관(尹瓘)과 여진을 정벌하는 데 참여하였다.
주석 49)홍치(洪治)
1441~1513.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여평(汝平), 호는 일송(一松)이다. 저서로 《심학장구집주대전(心學章句集註大全) 》이 있다.
松庵吳公行狀
松庵吳公諱壽華。字泰仲。勝朝文襄公諱延寵。其鼻祖。四傳至諱賢弼。封寶城君。因以貫焉。世著爵勳。至諱忠乙。入我朝。官贊成。玄孫諱益孫。以學行除寢郞。自寶城葬其親於綾州大谷。因寓墓下。綾之有吳始此。至曾孫諱邦翰。壬辰之亂。以節制使殉節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八代祖也。高祖諱世觀贈戶曹參判。曾祖諱厚有。僉樞。祖諱錫永號竹湖。考諱致祥號溪隱。孝友著聞。妣豐山洪氏警禹女。一松治后。以憲宗乙未十一月戊子。生公于七松里。自能言能食。應對唯諾。承順無違。父母有疾。涕泣廢食。八歲見大人躬耕。心甚悶然。竊往店幕。將沽酒餉之。酒媼嘉其意。具與肴饌而不言其直。與伯氏共方連業。晝夜不懈。至成童。謂伯氏曰。家貧親老。吾兄弟勢難倂學。吾當幹家。安養老親。又使兄專業。不亦可乎。躬服勤勞。家力稍舒。大人性峻。每有怒色。家人莫出一語。公溫言幾諫。輒廻其意。大人嘗語人曰。吾與二兒言。不覺怒氣自解。母夫人有病甚劇。血指延數日。遭故。毁瘠過甚。哀動傍人。見大人年高喪耦。慮有窮寂之懷。日夕不離側。招致故舊所善以悅其意。中年以親命析箸。而晨昏不廢。家務必先幹父而後及於私。兄弟五人。友愛甚篤。及各有室。次第析箸。而其設産凡百。公必資給。使兄家無分損之費。旣而謂諸弟曰。親年極隆。供養之節。不可歇后。豈可專委於伯氏耶。一月之內。十五日之養。我當供之。餘十五日。君三人各供五日也。自是迭相進供。備極其養。執喪哀戚。不以衰老自恕。遇諱辰。致齋散齋。極其誠敬。事伯氏如嚴父。家事巨細。必稟而行。有疾。晝夜扶持。泄痢輒掬而除之。撫愛兄子恩意甚至。種種周恤。無所吝。諸弟諸婦。亦相親愛。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各得其心。嘗自京還。同行一人。中路遘疾。諸伴皆先去。公賣行槖什物。爲之調治。俟其愈而同歸。隣有火患。出力營構。使之安堵。列邑多士。將營講舍公嘉其意。爲之血力周章。俾就其緖。設門憲以睦宗族。立洞規以和鄕井。遇飢歲。窮交貧族。有難存活。輒加賑恤。吉凶死喪。存訊贈遺。隨時不替。甲午匪徒大熾。公會子弟族戚。戒勿犯。平日愛好人倫。樂善嗜義。於聲華利達泊如也。築室開逕。嘯詠其中。賓朋至。輒行酒酣暢。極其歡洽。平生積累。聲譽闇章。鄕道儒林。薦報於朝。除寢郞。蒙旌褒諸子將營棹楔。公曰。無一善狀而至有此擧是欺天也。人而欺天。於心安乎。固却之。是以諸子不果。乙未春。遘疾幾危。會家衆戒之曰。奉先以孝。敎子以義。非善不交。非禮不行。可以不失先業也。寶貨用之有盡。忠孝享之無窮。績學必要其成。業農必盡其力。爾輩識之。言終而逝。卽三月二十七日也。鄕里人士知不知。莫不痛惜。葬七松之嘉樂洞午坐原。卽前配高氏墓左也。高氏籍長澤。時祐女。參議臣傅后。早逝無育。系配金海金氏錫祐女。鶴城君完后。生二男一女。長燮德燮。李承正也。長燮生在東在南在慶。德燮生在元。嗚乎。公孝於父母。友於兄弟。睦於宗族。信於朋友用心近厚。行己周愼。接物慈惠。處事公平。是以內外懷之。上下安之。身享和樂。家用平康。令聞令望。藉藉人口所謂神之聽之。終和且平者。非公之謂耶。猥受知遇。前後二十年之間。所以往復規警出入倚仗者。其力爲不少矣。豈知公不少留而遽棄乃爾耶。長燮持家狀示余曰。狀行。非平素相熟不可。與大人相熟。匪公伊誰。余以淺陋。固知其有難承膺。而撫念事契。有不忍終辭者。略舒梗槪以還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