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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숙부인 구씨 행장(淑夫人具氏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7
숙부인 구씨 행장
부인은 성이 구씨이고 세계(世系)는 능성(綾城)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휘 민첨(民瞻)이 상세(上世)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고조인 휘 삼익(三益)은 진사(進士)였고 증조인 휘 채(埰)도 진사였으며 조부인 휘 찬원(贊源)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 상윤(相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비(妣)는 고성 이씨(固城李氏) 석윤(錫淵)의 딸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 12월 14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이 어려서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첨지중추부사공이 언문(諺文)으로 《소학(小學)》을 적어 부인을 가르쳤다. 또 "남자는 요순(堯舜)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여자는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주 46)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하고, 인하여 학임(學任)으로 이름을 짓고 15세에 계례(笄禮)를 치르자 희임(希任)으로 자(字)를 지어 주었다. 부인은 교도(敎導)와 훈계(訓戒)를 따르며 감히 어기지 않았다. 18세에 처사공(處士公) 이지호(李贄鎬)에게 출가하였다. 공경과 순종으로 시부모를 받들고 남편을 섬겼으며 동서들에게도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목하게 지내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시어머니 박씨(朴氏)가 나이도 많고 병환이 위중하여 항상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보살피고 섬기는 일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비록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한 번도 편안히 쉬지를 않아 보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소박하고 초라한 의복과 음식으로도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이웃의 아녀자가 조롱하며 비웃는 말을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농사를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배부르기를 기약하지만, 유학을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굶주릴 것을 각오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니 어찌 괴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평소 살림살이는 매우 검약하였지만 제사를 받들거나 빈객을 접대하는 일은 어떻게든 주선하고 장만하여 기어코 풍성하고 정갈하게 준비하고자 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고 피땀을 흘리며 고생스럽게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여유롭게 되었다. 일찍이 여러 며느리에게 경계하기를, "아녀자의 행실은 순종이 으뜸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훈계나 명이 규중(閨中)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말소리가 문밖으로 들리지 않았으니, 가풍(家風)이 어떠하였겠는가. 만년에 집안이 어렵고 궁핍해져 여러 아들이 이를 걱정하자 부인이 책망하기를, "가난은 선비의 일상이니 걱정할 일도 아니지만 너희들이 학문을 그만두어 집안의 명성이 실추될까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행동거지가 침착하여 태만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종족(宗族)은 온화하면서도 절도있게 대하고 동복(僮僕)은 은혜로우면서도 엄하게 다스려 가까운 이웃에 이르기까지 기뻐하면서 흡족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갑진년(1904, 고종41)에 숙부인에 봉해졌는데, 이는 추증(追贈)된 남편을 따라 봉호(封號)를 받은 것이다. 무신년(1908, 순종2) 1월 4일에 생을 마쳐 비사등(飛沙嶝) 선영의 오른쪽 산등성이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자는 승우(承愚), 차자는 승정(承正)이고 딸은 동복(同福)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어리다. 아, 내가 지남옹(芝南翁)주 47)과 종유(從遊)하고 또 그의 윤자(胤子)와 앞뒤로 수십 년간 교유하면서 숙부인이 집안에서 보인 품행이 훌륭하고 자애로운 가르침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오래도록 익히 들었다. 지금 그 집안의 가장(家狀)을 보니 전에 들은 내용과 다르지 않으니 부모를 속이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다. 더욱 힘을 쏟아 학문을 그만두지 않고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당시 숙부인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빛내는 도리일 것이다.
주석 46)태임(太任)과 태사(太姒)
태임은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사는 무왕(武王)의 어머니로 모두 어진 후비(后妃)였다.
주석 47)지남옹(芝南翁)
남편인 이지호(李贄鎬, 1836∼1892)의 자호(自號)이다.
淑夫人具氏行狀
夫人姓具氏。系出綾城。麗朝平章事諱民瞻。其上系顯祖也。高祖諱三益進士。曾祖諱埰進士。祖諱贊源贈戶曹參判。考諱相允僉樞。妣固城李氏錫淵女。以純祖癸巳十二月十四日生。夫人幼而能言。僉樞公以諺文。書小學以敎之。且曰。男子當以堯舜爲法。女子當以任姒爲法。因名之以學任。及笄字之以希任。夫人遵循敎戒。無敢違越。十八歸于處士李公贄鎬。奉舅姑事君子。克敬克順。與娣姒溫恭和洽。未有間言。其姑朴氏年高沈疾。常在床褥。晝夜侍供。殫誠竭力。雖勞苦之極。未嘗就便。見者一辭稱賞。家貧甚。縕袍麤糲。處之裕如。隣家婦女。有譏笑之言。夫人曰。業農之家。其妻必飽。業儒之家。其妻必飢。此是常事。何足怪也。日用調度。極其儉約。而至於奉祭祀接賓客。周旋營辨。期於豐潔。夙興夜寐。血力拮据。以至事力稍紓。嘗戒諸婦曰。女子之行。以順爲上是故敎令不出於閨中言語不聞於門外。其家風爲何如也。晩年家力艱乏。諸子以爲憂。夫人責之曰。貧者士之常。不足爲憂。而但恐汝輩失學以墜家聲也。性度溫仁。動止安詳。怠慢之氣。不形於色。華麗之物。不近於身。待宗族和而節。御僮僕惠而嚴。至於比近隣里。無不懽然稱愜焉。甲辰封淑夫人。蓋從其君子追贈也。戊申正月四日卒。葬飛沙嶝先壟右岡午坐原。生二男一女長承愚次承正。女適同福吳桂泳。孫男女皆幼。嗚乎。余從芝南翁遊。又與其胤子遊。前後數十年。其內行之備。慈誨之美。稔聞久矣。今見其家狀。與前所聞者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更惟勉力。無失其學。無墜家聲如當日之敎也。此實立揚顯親之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