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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인재 기공 행장(忍齋奇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6
인재 기공 행장
인재 기공은 우리 고을의 선배(先輩) 항렬이다. 내가 어린 나이에는 공의 현덕(賢德)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직접 얼굴을 뵙지는 못하였다. 그 후에 공의 후사(後嗣)인 기종섭(奇{土+宗}燮)과 벗이 되고 또 공의 손자인 기세진(奇世搢)과 서로 교류하면서 공의 전형(典型)에 대해서 개괄할 수 있었다. 또 그 후에는 집안에 보관된 글을 보고 공의 평소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아, 같은 고을이고 또 같은 시대였건만 백발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 속의 고인(古人)으로 대하였구나! 행장과 같은 글은 진실로 나처럼 보잘것없는 자가 손을 대면 안 되지만, 고금을 돌이켜 보니 감회를 이기지 못하겠기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짓는다. 공은 휘가 동규(東奎)이고 자는 윤집(允集)이다. 기씨(奇氏)는 세계(世系)가 행주(幸州, 경기도 고양지역의 옛 지명)에서 나와서 신라, 고려 시대부터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시호(諡號)가 정무(貞武)인 휘 건(虔)은 응교(應敎)를 지낸 휘 찬(襸)을 낳고 휘 찬은 호가 물재(勿齋)인 휘 진(進)을 낳았다. 물재는 아우인 복재(服齋)주 43)가 기묘년(1519, 중종14)의 화를 당하자 마침내 광주(光州)로 물러나 지냈다. 재랑(齋郎)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좌찬성에 추증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대림(大臨)을 낳았는데, 대림은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고봉(高峰) 선생 기대승(奇大升)주 44)의 형으로 공에게는 11대 선조이다. 고조는 휘가 종태(宗泰)이고 증조부는 휘가 상호(商頀)이며 조부는 휘가 사봉(師鳳)이다. 고(考)는 휘가 하진(夏震)이며 비(妣)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달권(達權)의 따님이다. 순종(純宗) 무자년(1828, 순조28)에 능주(綾州 전라도 화순 지역의 옛 지명)의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게 되어서는주 45) 응대 진퇴(應對進退)나 평소의 과정(課程)이 스승이 이끌어 주거나 깨우쳐 주지 않아도 법도를 따르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대학》에 더욱 정통하였고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을 평생에 걸쳐 실천해야 하는 요결(要訣)로 삼았다. 이해하지 못하면 손에서 놓지 않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정이 격앙되어 분하고 답답하게 여기다가 뜻을 이해하게 되면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기뻐하는 얼굴빛과 온순한 용모로 모시고 봉양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받드는 데 필요한 물품을 모두 넉넉하게 공급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이를 미루어 친족과 벗들에게 미치니 공경스러우며 즐겁고도 편안하여 원망 섞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는 정성스럽게 알려주고 상세하게 일깨워 듣는 자가 자기도 모르게 성심을 다해 흠모하고 복종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시렁 위에 있던 책자(冊子)가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이 가져간 사람을 찾아내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훔쳐 간 것이 아니라 빌려 가면서 미처 주인에게 알리지 못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누군가가 사과를 하고 돌려주었다. 향리(鄕里)의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분쟁을 일으킨 뒤 마침내 원한이 쌓여서 여러 해가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공만이 깨우치고 화해시켜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내게 하였다. 공의 충직하고 순후한 마음이 만물에 미치고 정성과 신의가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경오년(1870, 고종7)에 중병에 걸렸다. 하루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부모를 섬기는 것이 보잘것없었다. 지금 또 병이 들어 장차 일어나지 못할 상황이니 불효한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구나. 너는 반드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잘 섬겨서 네 아비가 땅속에서 품고 있을 한을 위로해다오." 하였다. 끝내 1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양평(加陽坪)의 선영 아래 을좌(乙坐)에 매장하였다가 뒤에 배위(配位) 염씨와 합장하였다. 배(配)는 파주 염씨(坡州廉氏) 백우(柏佑)의 딸이다. 착하고 온순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부덕(婦德)에 모자람이 없었다. 을유년(1825, 순조25) 에 태어나 공보다 17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둘을 두었으며 이름은 종섭({土+宗}燮), 정섭(楨燮)이다. 손자는 세진(世搢), 세엽(世曄), 세만(世萬)이며 손녀는 선영기(宣永基)에게 출가하였다. 이들은 장방인 종섭의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물살이 도도하게 흐르듯 세상이 점차 쇠퇴하여 민간과 선비들의 풍습이 실로 한심스러워할 만하고 향당(鄕黨) 선배의 근후(勤厚)한 풍도는 끝내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다. 설령 이를 붙잡아 되돌려 놓는 것을 지금 세상의 책무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자손이 되어 선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할 방도만은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진(世搢)이 학문에 뜻을 세우고 사우(士友)들과 종유(從遊)하고 있으니 집안의 학업이 그에게 의뢰하여 땅에 떨어지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주석 43)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의 호이다. 자는 자경(子敬),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끝내 유배지에서 교살(絞殺)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저서로 《복재집(服齋集)》,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주석 44)기대승(奇大升)
1527~1572.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558년(명종13)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벼슬이 대사간ㆍ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고봉집(高峯集)》이 있다.
주석 45)스승에게……되어서는
10살 무렵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라고 하였다.
忍齋奇公行狀
忍齋奇公。吾鄕先輩行也。余小少聞其賢。而未及承顔。其後得與其遺胤琮燮友。又得其孫世搢相過從。而公之典刑。可以槪矣。又其後得家藏文字。而公之平生行義。可以詳矣。嗚乎。旣同鄕矣。又倂世矣。而至於白首之年。始對以卷中古人耶。狀行之文固非淺劣所可犯手。而撫念今古。不勝曠感。謹据家狀。公諱東奎。字允集。奇氏系出幸州。自羅麗爲東方鉅族。我朝有諱虔。諡貞武。生諱襸應敎。生諱進。號勿齋。弟服齋。遭己卯之禍。遂退居光州。除齋郞不就。贈左贊成。封德城君。生大臨。贈左承旨。高峰先生大升之兄也。於公爲十一世。高祖諱宗泰。曾祖諱商頀祖諱師鳳。考諱夏震。妣河東鄭氏達權女。以純宗戊子。生公于綾州牛峯里。幼而騰異。不類凡兒。及就傅。應對進退日用課程。不待提勅而循循不怠。尤邃於大學。以格致誠正爲一生受用之訣。不得不措。激昂憤悱。至有會意。輒怡然如也。性至孝。怡色婉容。左右服勤。志物之養。莫不畢給。推以至於族戚儕友。愷悌樂易。人無怨言。敎授生徒。指意懇到。開喩詳悉。使聽者不覺誠心向服。一日失架上冊子。傍人欲推尋。公曰。非竊去也。必是借去而姑未及告於主人耳。未幾。有人果謝而還之。鄕里有人與人忿爭。遂成嫌隙。積年不平。人無有能解者。公獨喩和之。使如平昔。蓋其忠厚之及物。誠信之感人。多此類也。歲庚午沈疾。一日語其子曰。吾平日事親無狀。今又嬰疾。勢將不起。不孝之罪。莫大於此。汝須善事二親。以慰乃父泉下之恨也。竟以十一月二十七日卒。葬于加陽坪先隴下乙坐合祔。配坡州廉氏柏佑女。和順勤儉。婦德無闕。乙酉生。後公十七年卒。擧二男。曰琮燮楨燮。孫世搢世曄世萬。孫女宣永基。長旁出也。餘皆幼。嗚乎。世級漸下。如水淊淊。民風士習。實可寒心。而鄕黨先輩長厚之風。終不可得以復見耶。縱不能把持挽迴以爲斯世之策。而爲人子孫者。獨不思所以繼述闕祖者乎。世搢有志學問。方從遊士友間。庶幾家庭之業。賴之而不墜於地。余有望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