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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덕림재 안공 행장(德林齋安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5
덕림재 안공 행장
공의 휘는 수책(壽策), 자는 인직(寅直), 호는 덕림(德林)이다. 고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의 후손이다. 회헌 선생의 증손 휘 원형(元衡)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기에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죽성군의 증손 휘 을겸(乙謙)이 영암(靈巖)의 고을원이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장흥(長興)에 살았다. 고조의 휘는 영룡(迎龍)이고, 증조의 휘는 한징(漢徵)이다. 조부의 휘는 택인(宅仁), 호는 해옹(海翁)으로, 장흥부의 동쪽 건산촌(乾山村)에 대대로 살았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도움을 받아 생활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길을 가다가 추위에 떨며 구걸하거나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면 문득 옷을 벗어 입혀 주었으며, 또 풀어 준 노비가 백여 구(口)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몽원(夢元), 선비(先妣)는 청주 김씨(淸州金氏) 판관(判官)을 지낸 용채(龍采)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부덕(婦德)까지 겸비하였다. 정묘(正廟) 정사년(1797, 정조21) 11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난스럽게 행동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 마치 성인(成人)처럼 의젓하였으니, 비록 잠시 잠깐도 개구리 걸음걸이 하는 사이에도주 37) 어버이의 뜻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해옹공(海翁公)으로부터 대수가 내려오면서 가세가 기울어 의지할 곳이 없자 공이 온 힘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였다. 심지어 농사짓고 물고기 잡고 땔나무하며 품팔이하거나 장사하는 것까지 직접 하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비록 곤경에 처하여 떠돌아다니거나 온갖 세파 속에서도 반드시 책을 가지고 다녀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번번이 책을 폈으니, 옛날에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거나주 38) 나뭇짐을 지고 독서한 자주 39)와 같았다.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禮)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다. 어머니를 모실 적에 효심을 다해 봉양하여 어머니에게 질병이 있으면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 숟갈 뜨면 자기도 한 숟갈 뜨고 어머니가 두 숟갈 뜨면 자기도 두 숟갈 떴다.주 40) 하루는 어머니가 옴이 올랐는데, 갑자기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비자(枇子)를 사용하면 낫는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니 이 과일을 파는 자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구하여 바치자 과연 차도가 있었다. 또 어머니가 재차 학질에 걸려 몇 년 동안 낫지 않았다.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든 어버이가 계시는데 외출하였다가 들어가면서 드릴 맛있는 음식이 없구나.' 하였다. 마침 거위 무리가 강에 가득한 것을 보고서 지팡이를 던져 거위 한 마리를 잡아서 마침내 가지고 가서 어머니에게 올렸는데 학질이 곧 나았다. 김씨 부인이 언젠가 꿈속에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부르면서 말하기를 "효자 아무개는 이것을 받으라."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공이 없어서 김씨 부인이 나가서 받으니, 바로 종이 뭉치 한 봉(封)이었다. 사람들이 "상천에서 복을 내렸으니 필시 전답 문권(文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가세가 날로 형통해졌다. 중년에 능주(綾州)의 칠송리(七松里)로 이사하여 우거하면서 대문을 닫고 종적을 감춘 채 고요히 자신을 수양하였다. 한 방에 도서를 채우고 세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었으니, 유연히 석인(碩人)의 잊지 못하는 흥취주 41)가 있었다. 평소 숙흥야매(夙興夜寐)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반드시 삼가서 행하고 청소하는 것을 반드시 정결하게 하였다. 자제(子弟)와 가속들로부터 안팎의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직책을 나누어 주고 일을 분담시키는 것이 엄정하여 조리가 있었다. 족친과 빈붕(賓朋)을 접대할 때면 모두 기뻐하고 마음에 들어 허물없이 터놓고 지냈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2월 9일에 졸하니 향년 63세였다. 간리촌(澗里村) 뒤 애운동(靄雲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완산 이씨(完山李氏) 진방(震芳)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첫째 아들은 영({氵+穎}), 둘째 아들은 협(浹)이고, 딸은 서춘구(徐春球)에게 시집갔다. 영은 후사가 없고 세 딸을 두었으니, 문방호(文邦浩)·민정호(閔禎鎬)·이교일(李敎馹)에게 시집갔다. 협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국정(國禎)으로 장방(長旁)의 양자로 갔고, 딸은 양재선(梁在璇)에게 시집갔다. 국정(國禎)은 창섭(昌燮)·종섭(宗燮)·홍섭(弘燮)을 낳았다. 아, 국정은 선사(善士)이다. 독서하고 학문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삼가서 가업을 실추하지 않고 성대하게 능양(綾陽)의 명문가가 되게 하였다. 창섭 형제는 모두 스무 살 안팎 무렵에 특출하다는 소문이 났고 삼가고 조심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으니, 안씨(安氏)의 남은 복록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 덕림공(德林公)께서 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은 보답이니, '선행을 쌓으면 남은 경사가 있다.'라는 우리 부자(夫子 공자)의 훈계주 42)가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공은 내 선친의 벗이다. 옛날에 선친의 곁에서 모실 적에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서 들었다. 지금 국정이 기술한 가장(家狀) 1편을 얻어서 읽음에 당시 귀로 들은 것처럼 역력하니, 슬픈 마음 감당하지 못하겠다. 삼가 이처럼 서술한다.
주석 37)개구리……사이에도
개구리 걸음은 선 자리(脚下)가 편안하지 못한 것을 이른다.
주석 38)경서를……하거나
전한(前漢)의 예관(兒寬)에 대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마다 독송하였다.[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라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58 兒寬傳》
주석 39)나뭇짐을……자
육조(六朝) 시대 서진(西晉)의 문신이자 학자 유지(劉智)는 어릴 때 가난하여 나뭇짐을 지고 글을 읽었으며 유행(儒行)으로 이름났다.
주석 40)어머니가……떴다
《소학(小學)》〈계고(稽古)〉에 "문왕이 병이 나자 무왕은 관과 띠를 벗지 않고 봉양하였다. 문왕이 한 숟갈 먹으면 무왕도 한 숟갈 먹고, 문왕이 두 숟갈 먹으면 무왕 또한 두 숟갈 먹었다.[文王有疾, 武王不說冠帶而養. 文王一飯, 亦一飯, 文王再飯, 亦再飯.]"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41)석인(碩人)이……흥취
석인은 어진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고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주석 42)선행을……훈계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자손에게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
德林齋安公行狀
公諱壽策。字寅直。號德林。勝朝文成公晦軒先生諱裕後。先生曾孫有諱元衡。封竹城君。子孫因貫焉。竹城君曾孫有諱乙謙。宰靈巖。因寓于長興。高祖諱迎龍。曾祖諱漢徵。祖諱宅仁號海翁。世居府東乾山村。愛人好施。賴活甚衆。行見寒乞僵路。輒解衣衣之。又白放奴婢百餘口。考諱夢元。妣淸州金氏判官龍采女。端淑貞靜。婦德備至。以正廟丁巳十一月某日生。公自幼不戲動不妄言。凝然如成人。雖造次蛙步之頃。未嘗一咈親意。自海翁公下世。家計無聊。公盡力就養。至於耕稼漁樵。行傭賃販。身親爲之。好讀書。雖在流離艱阻。世故萬端之中。而必以書自隨。少有間隙。輒披閱。如古之帶經而鋤。負薪而讀者。十九遭外艱。哀毁過禮。奉慈幃。盡孝養。有疾晝不離側。夜不就寢。一飯再飯。惟親是視。一日患疥瘡。忽夢有老人曰。用枇子可愈。夢訖。有鬻是果者。果見差愈。又患再瘧。積年彌留。一日自外歸家。自念病親下。出入無一味可以歸供。適見羣鵝滿江。因擧杖投之。中一鵝。遂持以供之。瘧疾乃差。金夫人嘗夢有仙人自天而下。呼之曰。孝子某受此。時公不在。金夫人出而受之。乃一封紙塊也。人以爲上天降福。必是土田文券也。自是家享漸息。中年移寓于綾州之七松里。杜門斂跡澹寂自養。一室圖書。三逕花竹。悠然有碩人不諼之趣。平日夙興夜寐。定省必謹。掃洗必淨。自子弟家衆。至內外婢僕。分職授事。嚴有條理。待族戚接賓朋。皆歡欣相得。絶其畦畛。以哲宗己未二月九日卒。得年六十三。葬于澗里村後靄雲洞亥坐原。配完山李氏震芳女。生二男一女。長氵+穎。次浹。女適徐春球。氵+穎無嗣。三女適文邦浩閔禎鎬李敎馹。浹一男一女。男國禎出后長旁。女適梁在璇。國禎生昌燮宗燮弘燮。嗚乎。國禎善士也。讀書學問。修身謹行。使家業不墜。蔚然爲綾陽名家者。昌燮兄弟。皆妙年騰異。謹勅從學。安氏餘祿。豈有量哉。此皆德林公積累不食之報。吾夫子積善餘慶之訓。豈不信然乎。公我先友也。昔者侍先人側。得聞公之行義。今得國禎所述家狀一編。讀之歷歷如當日耳聞。不勝悲感之私。謹述之如此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