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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죽계 홍공 행장(竹溪洪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4
죽계 홍공 행장
공의 휘는 정모(珽謨), 초휘(初諱)는 수정(壽挺), 자는 의범(懿範), 호는 죽계(竹溪)이다. 관향은 풍산(豐山)이니, 일송(一松) 휘 치(治)의 후손이다. 고조는 휘 천규(天奎)로,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받았다. 증조의 휘는 이발(履潑)이고, 조부의 휘는 영구(永九)이며, 선고(先考)의 휘는 양우(亮禹)이다. 전비(前妣)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지옥(之玉)의 따님이고, 선비(先妣)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윤호(允鎬)의 따님이다. 인릉(仁陵 순조(純祖)의 능호) 정해년(1827, 순조27) 10월 6일에 우봉리(牛峯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무릇 출입하거나 장난칠 때 한번도 어버이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얻으면 반드시 품속에 넣어 가서 어버이에게 드렸다. 집안이 늘 가난하여 변변치 못한 음식조차 자주 잇지 못하였으므로, 몸소 물고기를 잡거나 땔나무를 하고 직접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곁에서 봉양하였다. 부모가 이에 의지하여 편안하였고 가업이 그 덕분에 흥성하였다. 11세에 어버이의 병이 매우 심해지자 목 놓아 울면서 실신할 듯이 하였다. 한밤중에 홀로 의원을 찾아가는데 깊은 산 험준한 고개에서 맹수가 우는데도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벽에 의가(醫家)에 이르렀다. 의원이 그에게 물어보고서 사정을 알고는 놀라고 기특하게 여기면서 "지극한 정성이 이러하니 어버이의 병이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청도 김씨(淸道金氏) 홍만(弘萬)의 따님을 맞아들였다. 을사년(1845, 헌종11)에 김씨가 졸하고, 병오년(1846, 헌종12)에 밀양 박씨(密陽朴氏) 재호(在浩)의 따님을 맞아들였는데 평소에 서로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공경하였다. 박씨 또한 온화하고 인자하고 유순하였으며 부도(婦道)를 잘 지켰다. 임자년(1852, 철종3)에 부친상을 당하고, 갑자년(1864, 고종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심하고 슬퍼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장례를 치르는 도구와 상례를 거행하는 절차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여 한결같이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을 따랐으니, 대개 살아 계실 때 섬기며 돌아가신 뒤 장례 치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예(禮)로써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에게는 아우 하나가 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밤낮으로 단란하게 모여 다정하게 웃고 이야기하였으며, 음식과 의복 등 온갖 물품은 있고 없는 것을 공유하였다. 이를 미루어 확대하여 족친과 붕우, 이웃 마을과 향당에까지 미쳤으니, 자상하고 화락한 풍습이 두루 퍼졌다. 일찍이 성내는 말이나 화난 얼굴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기에 남들도 감히 바른 이치가 아닌 것을 가지고 간범하지 못했다. 일찍이 젊었을 때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가숙(家塾)을 세우고 훌륭한 스승을 초빙하여 자식과 손자를 가르쳐 권면하고 힘쓰게 한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 가문의 규범을 세워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의리를 강론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서 예의 바른 풍속으로 사귀는 법을 밝혀서 상서(庠序)와 교원(校院)에서 곧은 논의를 내었으니, 그 계획하고 경영한 것이 그의 힘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침수정(枕漱亭)은 선조 팔우공(八愚公)이 지은 것인데 퇴락한 지 오래되었다. 공이 일찍이 개탄스러운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가 족질(族侄) 채주(埰周)와 함께 도모하여 중건하여 날마다 족친, 빈붕(賓朋)과 더불어 그 정자에서 소요하고 시를 수창하였으니, 그 풍모와 운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앙모하게 하였다. 기축년(1889, 고종26) 11월 7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3월 13일에 부춘동(富春洞) 굴등(窟嶝)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원근의 사우들이 제문을 지어 와서 조문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아들은 형주(馨周)·근주(垠周)·기주(基周)이고, 딸은 이진표(李晉杓)·구치모(具致模)에게 시집갔다. 형주의 아들은 우팔(祐八)·우경(祐璟)이고, 근주의 아들은 우열(祐烈)이며, 기주는 재종숙부(再從叔父) 각모(珏模)의 양자로 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어려서나 장성해서나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노년에는 의리를 좋아하였으니, 공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 군자나 장자(長者)로 추중(推重)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신묘년(1891, 고종28) 봄에 홍우경(洪祐璟)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천태우사(天台寓舍)로 나를 방문하여 후대에 남길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변변치 못하다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어 삼가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竹溪洪公行狀
公諱珽謨。初諱壽挺。字懿範。號竹溪。系出豐山。一松諱治後。高祖諱天奎通德郞。曾祖諱履潑。祖諱永九。考諱亮禹。前妣慶州金氏之玉女。妣昌寧曺氏允鎬女。以仁陵丁亥十月六日。生公于牛峯里第。公性至孝。自幼凡出入嬉戱。未嘗一咈親意。得一美味。必懷而供之。家素貧。菽水屢空。躬幹漁樵。親執滫瀡。左右就養。父母賴以安。家業賴以興。十一歲。親癠甚劇。號泣不能支。夜半獨行尋醫。深山峻嶺。虎豹叫嘷。公少不畏。曉頭至醫家。醫問知驚異曰。至誠如此。親疾必瘳。甲辰聘淸道金氏弘萬女。乙巳金氏卒。丙午聘密陽朴氏在浩女。平居相待如賓。朴氏亦溫仁柔嘉。克執婦道。歲壬子丁外艱。甲子丁內艱。哀傷慘怛。見者無不釀涕。送終之具。執喪之節。必誠必信。一遵情文。蓋其生事死葬。可謂終始以禮矣。公有一弟。友愛甚篤。日夕團聚。笑語款洽。飮食衣服。凡百資用。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隣里鄕黨。慈詳愷悌之風。浹洽周徧。未嘗以忿言戾色。加於人。人亦不敢以非理干之。嘗恨少貧失學。立家塾延賢師。敎子課孫。勸勉甚至。立門規講敦睦之義。修洞約。明禮俗之交。出以風議於庠序校院之間。其所以謀畫經紀。多其力焉。枕漱亭先祖八愚公所構。而頹廢久矣。公嘗懷慨歎。與族侄埰周。合謀重建。日與族親賓朋。逍遙酬唱於其中。其風儀趣想。令人可仰。歲己丑十一月七日。考終于正寢。以三月十三日。葬于富春洞窟嶝子坐原。遠近之友。操文來弔者甚衆。男馨周垠周基周。女適李晉杓具致模。馨周子祐八祐璟。垠周子祐烈。基周出爲再從叔父珏模後。餘皆幼。嗚呼。幼壯孝悌。老而好義。知不知。皆以君子長者推之而無異辭。辛卯春。祐璟抱家狀。訪余於天台寓舍。請不朽之託。余以無似。牢辭不得。謹次如右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