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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지남 처사 이공 행장(芝南處士李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3
지남 처사 이공 행장
공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지호(贄鎬),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이다. 관향은 광산(光山)이니, 고려(高麗) 때 명신인 상서 좌복야(尙書佐僕射)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가 된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일영(日映)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호는 옥봉(玉峯), 관직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이분이 휘 선제(先齊)를 낳았으니, 호는 필문(蓽門), 관직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조원(調元)을 낳았으니,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다. 은일(隱逸)로 여러 번 징벽(徵辟)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호선(好善)을 낳았으니, 호는 면재(勉齋),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렬(烈)을 낳았으니, 호는 졸암(拙庵), 관직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이분들은 모두 그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언규(彦規)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영근(永根)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광우(光佑)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면휘(勉徽)로, 호는 묵재(黙齋)이며, 선비(先妣)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이긍(履兢)의 따님이니 참판에 추증된 세규(世規)의 현손(玄孫)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헌종2) 11월 22일에 능주(綾州) 신산리(莘山里)의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필봉(筆峯)이 용으로 변하여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므로 어릴 때 자를 '필룡(筆龍)'이라고 하였다. 공은 자태와 용모가 의젓하였다. 조금 지각이 있을 적에 묵재공(黙齋公)의 곁에 있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돈을 보내자, 묵재공이 말하기를 "사지금(四知金)주 30)도 받지 않는데 더구나 오지금(五知金)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이 곁에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것으로 공에게 일마다 규범을 따르도록 가르쳤고, 일찍이 고식지계(姑息之計)를 낸 적이 없었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적에 백씨, 중씨 형과 함께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학업을 익혔으니,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지극하였다. 성동(成童)의 나이에 오서(五書)주 31)와 오경(五經)을 돌아가면서 섭렵하여 문리(文理)와 문장이 현저하게 일취월장하였다. 어느 해에 구씨(具氏) 가문과 혼인하였으니, 바로 첨지중추부사 상윤(相允)의 따님이다. 관례를 행한 뒤에 같은 고을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박 선생을 배알하고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한 나머지 거의 생명을 해칠 지경이었는데도 전후의 의식 절차는 한결같이 예경(禮經)대로 하였다. 맏형수 송씨(宋氏)가 병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공이 부인 구씨와 더불어 다른 일은 제쳐두고 한마음으로 병을 치료하는 데 전념하여 여러 달 동안 낮에는 자리에 앉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맏형수가 세상을 뜨고 백형(伯兄)이 또 고질을 앓으니, 공이 또 맏형수에게 한 것처럼 6개월 동안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는 절차와 연상(練祥)의 의절에 정성을 다하고 예문을 갖추니, 이웃 마을에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비록 부모나 장인 장모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아가 된 어린 조카를 매우 애처로운 마음으로 키우며 자기 자식처럼 기르고 가르쳤다. 중년에 개연히 탄식하기를 "내가 시문(時文)에 인생을 그르쳤으니 비록 이전의 잘못은 뒤미처 고치지는 못하지만 아마 만년의 공부는 조금이나마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심경(心經)》과 성리학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연구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태극도(太極圖)」, 「경재잠(敬齋箴)」, 구용구사(九容九思)주 32)를 좌우(座右)에 붙여 두고 늘 스스로 경계로 삼았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적에 한결같이 《소학(小學)》에 따라 응대하고 진퇴(進退)하는 절차와 몸가짐과 행동거지에 대해서 착실하게 이끌어주고 신칙하여 확실하게 과정(課程)을 두었다. 늘 생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입지(立志)는 학문을 하는 근본이다.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궁격(窮格)주 33)과 존양(存養)주 34)은 교차하여 힘을 쏟아야지 한쪽을 폐해선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敬)은 성시성종(成始成終)주 35)이고 철상철하(徹上徹下)이다.'주 36)라는 말은 성인이 제시하신 덕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이보다 간절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이 말한 "심(心)이라는 것은 일신의 주재(主宰)이니, 만약 맑게 한다면 허명하고 깨끗한 부고(府庫)가 되고, 맑게 하지 못한다면 더럽고 탁한 주머니가 된다."라는 말을 늘 암송하였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가 말한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생존하는 이치가 그만 끊어지게 된다."라는 말에 대해서 "이는 심학(心學)에서 매우 중요한 말이다.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자손이 된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안의 규범을 정하여 돈독하고 화목한 도리를 강론하였고, 마을 규약을 만들어 서로 구휼하는 의리를 밝혔다. 학문계(學問契)를 만들어 마을 자제들이 학업을 익히는 비용을 마련하고, 흥학계(興學契)를 만들어 동네 생도들을 강학에 모으는 계책으로 삼았다. 원전(原錢)은 양사재(養士齋)에 두어서 온 고을 장보(章甫)들이 향음례(鄕飮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는 경비로 삼게 하였다. 수시로 향방(鄕坊)과 상숙(庠塾)에 모여서 개강(開講)하거나 예를 익혔으므로 제기가 질서 정연하고 의관이 단정하니 보는 사람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였다. 경인년(1890, 고종27) 봄에 선비들을 모아 《정암선생문집(靜庵先生文集)》을 중간(重刊)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신묘년(1891)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예부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였다. 임진년(1892) 3월 24일에 졸하였다. 신산(莘山) 뒤 기슭 술좌(戌坐) 언덕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모두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는 승우(承愚), 차자는 승정(承正)이다. 딸은 동복(同福) 오계영(吳桂泳)에게 시집갔다. 공은 용모가 단아하였고 절조가 굳세고 우뚝하여 뺏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고, 남에게 뒤지지 않는 언변이 있었다. 담론(談論)을 잘하고 풍자하는 데 장점이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현인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며, 선을 즐거워하고 의리를 좋아하는 것은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였다. 포부와 경륜은 당시에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거처하는 바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이를테면 여리(閭里)와 향방(鄕坊) 같은 곳에서 고심하고 주선하여 유풍(儒風)과 예속(禮俗)을 성대하게 일으켰으니,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 것이 적지 않았다. 나는 함께 종유한 사람으로 매양 간절하게 추억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그 자손이 영원히 남길 글을 지어 달라는 청에 대해서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더하고 뺀다.
주석 30)사지금(四知金)
후한(後漢) 때의 학자 양진(楊震)과 관련한 고사이다. 양진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양진에게서 무재(茂才)로 천거받았던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金) 10근을 바치자, 양진이 "그대의 친구인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故人知君, 君不知故人, 何也?]" 하니, 왕밀이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하고 금을 물리쳤다. 《後漢書 楊震列傳》
주석 31)오서(五書)
사서(四書)인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와 《소학(小學)》을 이른다.
주석 32)구용구사(九容九思)
구사(九思)는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으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생각하고,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하기를 생각하고, 말할 때는 충성되기를 생각하고, 일할 때는 조심하기를 생각하고, 의심날 때는 묻기를 생각하고,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생각하고, 얻을 것을 보고서는 의리에 맞는지를 생각하라.〔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이다. 《論語 季氏》 구용(九容)은 군자가 수행(修行)하고 처신(處身)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자세로, "걸음걸이의 모양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의 모양은 공손해야 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해야 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의 모양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이다. 《禮記 玉藻》
주석 33)궁격(窮格)
궁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이고, 격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반성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주석 34)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말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아니,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주석 35)성시성종(成始成終)
주자(朱子)가 "경은 성학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다.[敬者, 聖學之所以成始成終者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경(敬)을 통해 학문을 시작하고 경을 통해 학문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주석 36)철상철하(徹上徹下)
상하를 모두 통한다는 말이다. 《논어》〈자로(子路)〉에 "거처할 때에 공손히 하며, 일을 집행할 때에 공경하며 사람을 대할 때에 충성스럽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비록 이적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라고 하였는데 그 집주에 "정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상하를 모두 통하는 말씀이니 성인은 애당초 두 말씀이 없는 것이다.[程子曰, 此是徹上徹下語, 聖人初無二語也.]"라고 하였다.
芝南處士李公行狀
公姓李。諱贄鎬。字東賢。號芝南。系出光山。以麗朝名臣尙書佐僕射諱珣白爲鼻祖。入我朝。有諱日映。號玉峯。副提學。生諱先齊。號蓽門。大提學。封慶昌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生諱好善。號勉齋。大司成生諱烈。號拙庵。同副承旨皆其顯祖也。高祖彦規贈戶曹參議。曾祖永根。贈兵曹參判。祖光佑。贈掌樂院正。考勉徽。號黙齋。妣咸陽朴氏履兢女。贈參判世規玄孫。憲宗丙申十一月二十二日。生公于綾之莘山里第。夢筆峯化爲龍。入懷而有娠。故小字曰筆龍。姿相岐嶷。稍有知。在黙齋公側。適有人餽以錢物。黙齋公曰。四知金猶爲不受。況五知乎。蓋指公之在側也。是以敎公事事循蹈規矩。未嘗爲姑息計。及就傅上學。與伯仲二兄同案連業。友悌甚至。至成童。五書五經。循環涉獵。文理詞華。斐然日就。某歲委禽于具氏之門。卽僉樞相允女也。旣冠。造謁同鄕無邪齋朴先生。因受周易。遭內外艱。哀毁過甚。幾於傷生。前後儀節。一遵禮經。伯嫂宋氏有疾彌留。公與具氏舍置他事。專以迎合調治爲務。晝不就席。夜不就枕者數月。及歿。伯兄又得貞疾。公至誠救護亦如之。至六朔而竟不起。喪葬之節。練祥之儀。備盡情文。隣里感歎。以爲雖在父母舅姑。無以過之。撫其幼孤。極加哀矜。養育敎誨。無間已出。中歲慨然歎曰。吾爲時文所誤。縱不能追補前闕。庶可以少收晩業。遂將心經性理諸書。沈潛硏究。手不釋卷。太極圖敬齋箴九容九思。貼之座側。常自鏡攷。敎授蒙率。一依小學。應對進退。威儀容止。循循提勅。的有課程。常戒生徒曰。立志是爲學之本。本旣立則窮格存養。交致其力。不可偏廢。又曰。敬是成始成終徹上徹下語。聖賢所示人德之方。無有切於此。每誦淸心堂所謂心者一身之主宰。苟能淸之。則爲虛明瑩澈之府。不能淸之。則爲汚陋穢濁之囊。履素齋所謂動靜語黙之間。毫釐有差則生理便息之語曰。此是心學切要之語。凡爲學者所當佩服不忘。況其爲子孫者乎。定門規以講敦睦之道。立洞約以明周恤之義。設學問契爲村中子弟肄業之資作興學契爲坊裏生徒講聚之計。置原錢養士齋爲一鄕章甫飮射之需。隨時會聚於鄕坊庠塾之間。或開講或習禮。樽俎之秩秩。衣冠之濟濟。觀者感悅。庚寅春。會多士。重刊靜庵先生文集。布行于世。辛卯中鄕解。赴禮部見屈。壬辰三月二十四日卒。權葬於莘山後麓戌坐原。擧二男一女。長承愚。次承正。女適同福吳桂泳。公體相端粹。志節勁特。有不可奪之操。有不可屈之辯。善於談論。長於風諭。好學慕賢。出於至誠。樂善嗜義。如恐不及。抱負經綸。未得見試於時。而隨其所居所接。如閭里鄕坊之地。苦心周章。使儒風禮俗。蔚然興行。其爲世敎之補不少矣。余以從遊餘生。每切追惟之悵。今於其遺胤不朽之托。不忍牢辭。謹据家狀爲之增刪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