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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봉남헌 홍공 행장(鳳南軒洪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2
봉남헌 홍공 행장
공의 휘는 채주(埰周), 자는 경좌(卿佐), 다른 휘는 종진(鍾鎭), 자는 응중(應仲), 호는 봉남(鳳南)이다. 홍씨(洪氏)의 관향은 풍산(豐山)이니, 고려(高麗)의 직학(直學) 휘 지경(之慶)의 후손이다. 침수정(枕漱亭) 휘 경고(景古)의 6세손이다. 고조의 휘는 이수(履洙), 증조의 휘는 영한(永漢), 조부의 휘는 희우(羲禹), 선고(先考)의 휘는 수모(壽謨)이다. 선비(先妣)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휘 대현(大鉉)의 따님이니, 칠졸재(七拙齋) 창우(昌禹)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갑오년(1834, 순조34) 8월 25일에 우봉리(牛峰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기골이 장대하였고 2세 때 능히 말을 하였다. 6세에 이웃집 아이가 독서하는 것을 보고 가서 공부하기를 여러 번 청하였지만 부형은 그가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8세에 가숙(家塾)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가볍고 맑은 것이 위에 있다.'라는 구절주 29)에 이르러서 즉시 문을 열고 하늘을 보며 말하기를 "저 어둡고 검은 것은 무슨 물건입니까?" 하자, 말하기를 "이것은 운기(雲氣)이다. 구름이 걷히면 하늘이 실로 가볍고 맑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문리가 일취월장하여 문장을 지으매 매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5세 되던 무신년(1848, 헌종14)에 하동 정씨(河東鄭氏) 가문 원렬(元烈)의 따님과 혼인하였으니, 금성군(錦城君) 성(盛)의 후손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향당(鄕黨)의 여러 선생을 찾아뵙고 공손하게 제자의 예를 올렸다. 동년배의 사우(士友)로 말하면 남들에게 추앙을 받는 문학과 조행(操行)이 있는 사람이 모두 깊이 교제를 맺어 끓이지 않고 왕래하였다.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시험 공부를 하여 향시(鄕試)와 정시(廷試)에 해마다 응시하였는데 합격 불합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성품이 명민(明敏)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장점이 있었다. 또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진신 사대부(縉紳士大夫)들이 정사에 통하지 않는 점이 있고 일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찾아와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은 옛일을 끌어다가 현재의 문제를 바로잡아 밝힘에 응답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였다. 향당(鄕黨)과 상서(庠序)에서 풍속의 기율을 돈독히 하고 장려하며, 사대부의 풍습을 가지런히 하고 바르게 한 것은 그의 힘이 또한 컸다. 경오년(1870, 고종7)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경진년(1880, 고종17)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 과거에 응시한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던 뜻이었는지 모르겠거니와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쇠약함과 병만 더욱 깊어졌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대문을 닫고 세상 사람들을 사절하려는 마음을 먹고 산 한 기슭을 매입하여 침수정(枕漱亭)을 중건하여 남은 생애를 편안하게 의탁할 곳으로 삼았다. 때때로 친구나 마을의 자제(子弟)들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문장을 지으며 유유자적하였으니, 이러한 즐거움을 늦게 얻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정해년(1887, 고종24) 윤4월 10일에 숙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마을 뒤 국수봉(菊秀峯)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자식이 없어 종자(從子) 우전(祐銓)을 후사로 삼았다. 우전의 아들은 승환(承渙), 승택(承澤), 승준(承浚)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매우 고상하였고, 풍도(風度)가 범상하지 않았으니, 많은 사람 속에 있으면 마치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았다. 부모를 섬길 적에는 매우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며, 형제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처자식을 대할 적에는 엄격하면서도 다정하였으며, 종족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벗과 교제하고 향려(鄕閭)에 거처한 것으로 말하면 평탄하고 곧고 자애롭고 미더운 풍모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평상시 말하고 웃는 것을 삼가고 출입을 간소하게 하였다. 항간의 비루한 습속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고, 향인에 대해서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하고 사람들에게 학문하기를 권유한 것으로 말하면 간절하게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의 문장은 온후하고 화평하여 화려하거나 기이하며 괴벽하거나 난삽한 뜻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스스로 탄복하였으니,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이 돌아가신 다음 해 겨울에 승환(承渙)이 유문(遺文)을 가지고 벽산서실(碧山書室)로 나를 찾아와 덕을 형용할 수 있는 문장을 지어 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이는 당일에 종유하던 분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보잘것없는 내가 실로 남의 집안에서 영원히 전할 글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대해 감히 손을 대지 못하지만 깊은 교분으로 인하여 끝까지 사양하기 어려웠다. 보고 들은 것을 수습하여 후일 훌륭한 글을 지을 사람의 붓을 기다린다.
주석 29)가볍고……구절
《동문선(東文選)》 「청향정기(淸香亭記)」에 "하늘과 땅이 처음 나누어질 때 가볍고 맑은 것이 위에 있게 되었는데, 인물이 생겨날 때 이 기운을 온전히 타고난 자는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된다.[天地之判也, 輕淸者在上, 而人物之生, 禀是氣以全者, 爲聖爲賢.]"라는 구절이 있다.
鳳南軒洪公行狀
公諱埰周。字卿佐。一諱鍾鎭。字應仲。號鳳南。洪氏系豐山。高麗直學諱之慶後。枕漱亭諱景古六世孫。高祖諱履洙曾祖諱永漢。祖諱羲禹。考諱壽謨。妣順天朴氏諱大鉉女。七拙齋昌禹後。以純廟甲午八月二十五日。生公于牛峰里第。體質歧嶷二歲能言語。六歲見隣兒讀書。累請就學。父兄以其幼不許。八歲出就家塾授讀。至輕淸在上。卽開門仰天曰。彼昏黑者何物。曰此是雲氣也。若雲捲則天固輕淸也。自是文理日就。綴文點句。每驚傍人。十五歲戊申委禽于河東鄭氏之門元烈女。錦城君盛后。旣成人。出見鄕黨諸先生。恭執弟子之禮。至於年輩士友。有文學操履爲人推服者。無不深相結納。往復不絶。以親命學擧子業。鄕解廷試。逐年應擧。而不以得失經心。性明敏。長於料事。又邃禮學。縉紳士大夫。政有所不通。事有所可疑。多就咨訪。公援古訂今。酬答如流。至於鄕黨庠序之間。所以敦獎風紀。齊整士習者。其力亦多矣。歲庚午遭外艱。庚辰遭內艱。自念平生赴擧。未見所以供悅之意。而風樹遽驚。衰病轉深。於是有杜門謝世之志。買山一麓。重建枕漱亭以爲餘日寄傲之所。時與親朋鄕子弟。或行酒或講文。悠然自適。恨其得此之晩。丁亥閏四月十日。以宿症終于正寢。葬里後菊秀峯壬坐原。公無育。以從子祐銓爲後。祐銓子承渙承澤承浚。公天稟甚高。風儀不羣。在稠人中。如雲鶴之於野雞。事父母。極其愛敬。處兄弟。極其友悌。御妻孥。嚴而有恩。待宗族。和而有節。至於交朋友處鄕閭。易直子諒之風。感動於人。平居愼言笑簡出入。里巷俚俗。不經於目。鄕人毁譽。不出於口。至於導人爲善。勉人以學。懇懇不遺餘力。其文章溫厚和平。無華麗奇巧隱僻艱澀之意。而見者怡然自服。可知其爲有德之言也。公沒翌年冬。承渙抱遺文。訪予于碧山書室。請狀德之丈曰。此非當日從遊人之責乎。嗚乎。予以無狀。固不敢犯手於人家不朽之託。而契誼甚厚。有難牢讓。收拾見聞以俟後日立言之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