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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이조 정랑 죽림 황공 행장(吏曹正郞竹林黃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1
이조 정랑 죽림 황공 행장
공의 휘는 기한(起漢)인데 후에 처원(處源)으로 개명하였다가 또 기원(基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응조(應肇), 호는 죽림(竹林), 장수(長水) 사람이다. 고(故) 상국(相國) 방촌(厖村) 휘 희(喜)의 후손이다. 선생은 열성공(烈成公) 휘 수신(守身)을 낳았고, 열성공은 장원군(長原君) 휘 신(愼)을, 장원군은 대사간(大司諫) 휘 성창(誠昌)을, 대사간은 현령(縣令) 휘 칙(則)을, 현령은 학생 휘 사민(師閔)을, 학생은 판서 휘 눌(訥)을, 판서는 참의(參議) 휘 천일(千鎰)을, 참의는 참판(參判) 휘 용립(龍立)을, 참판은 참판 휘 종익(宗翼)을 낳았으며, 참판은 충의위(忠義衛) 휘 하서(河瑞)를 낳았으니 하서가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자중(宇中), 조부의 휘 상곤(象坤)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유진(有鎭)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선비(先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이흥(以興)의 따님이다. 숭정(崇禎) 190년, 우리 순조(純祖) 정축년(1817, 순조17)에 장흥(長興) 천포면(泉浦面) 벽신동(闢新洞)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기질이 특이하고 남달리 영특하였으므로 그를 본 사람들은 공이 큰일을 해내리라는 것을 알았다. 6세에 통정공(通政公)주 26)이 가족을 데리고 능주(綾州) 연화동(蓮花洞)으로 이사하였고, 10세에 마을 학당에서 배웠다. 어느 날 같이 배우는 자 가운데 이웃의 닭을 훔치기를 도모하니, 공이 말하기를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자기 집의 송아지를 끌고 와 잡게 하였다. 같이 배우는 자 가운데 가난하여 서책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혹 학업을 그만두기까지 하니, 공이 몇 묘(畝)의 전답을 팔아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등 다소의 책을 구입하여 재실(齋室)에 두고서 보게 하였다. 그의 기량(氣量)과 풍도는 이러한 유가 많았다. 18세에 유씨(柳氏) 춘수(春樹)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헌종(憲宗) 5년 기해년(1839, 헌종5)에 정시(廷試)에 합격하였지만 공은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학업을 성취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여가가 있으면 더욱 열심히 독서하였다. 경자년(1840, 헌종6)주 27)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842, 헌종8)에 효릉 별검(孝陵別檢)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던 날 동산과 연못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수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을사년(1845, 헌종11)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조경묘 영(肇慶廟令)으로 옮겼다. 무신년(1848, 헌종14)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지만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임자년(1852, 철종3)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도의 예(禮)를 지극히 하였다. 상기가 끝나자 노부인(老夫人)이 계시다는 이유로 벼슬하고자 하지 않았다. 무오년(1858, 철종9)에 강씨 부인의 병이 깊어짐을 근심하여 단지(斷指)의 정성으로 소생하게 하였다. 경신년(1860, 철종11)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는데, 어머니의 명으로 억지로 관직에 나아갔다. 임술년(1862, 철종13)에 철종대왕(哲宗大王)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친히 문신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장원을 차지하였다. 또 응제(應製)에 삼정책(三政策)을 올려 기용(器用)과 복식은 토산품을 사용하고 외국에서 생산된 물건은 사용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고,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다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864, 고종1)에 봉사(封事)를 올려 조경전(肇慶殿), 경기전(慶基殿)의 의물(儀物)을 개수하기를 청하였다. 이해 여름에 자인 현감(慈仁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치적이 있었다. 을축년(1865, 고종2)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866)에 서양 오랑캐가 강화도(江華島)를 함락하여 도성의 민심이 흉흉하여 대성(臺省)이 비니, 어떤 이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자, 공이 말하기를 "지방의 산관(散官)이라도 오히려 분문(奔問)하는 의리주 28)가 있다. 더구나 도성에서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변고를 만났는데 자기 한 몸만 빠져나가는 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스스로 요동하지 않으니, 당시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정묘년(1867)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거상(居喪)하는 일에 나이 많은 것을 핑계로 스스로를 관대하게 하지 않았다. 상기가 끝나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고, 여러 번 옮겨 정언(正言) 및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맡았다. 을해년(1875)에 외직으로 나가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다. 무인년(1878)에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879) 3월 15일에 병으로 관아에서 졸하였다. 그때 아들 작(稓)이 관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4월 17일에 보성군(寶城郡) 도촌면(道村面) 용호동(龍湖洞) 마을 뒤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나중에 장흥(長興) 천포면(泉浦面) 화동(花洞) 연봉(鳶峯) 아래 호은공(湖隱公) 묘소의 좌측 자좌(子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방촌 상국(厖村相國)으로부터 대대로 청렴결백한 것으로 서로 계승하였다. 내가 관직 생활한 이후로 일찍이 물건 하나에 스스로 얽매여 우리 방촌 선조가 남기신 교훈을 저버린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가업을 꾸리기를 권유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산업(産業)을 자손에게 남겨주면 어떻게 자손들이 청렴결백하기를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일을 부탁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관직에 있을 때 남에게 청탁을 받은 적이 없는데, 지금 사제(私第)에 거처하면서 도리어 남의 청탁을 받겠는가."라고 하자,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성품은 또 관간(寬簡)하여 평소 옆에서 어린아이가 울더라도 조금도 꾸짖거나 금하지 않았다. 하루는 서찰을 써서 책상 위에 두었는데, 아이가 그 위에 물을 엎질렀지만 조금도 화내는 기색이 없었고, 또 시속의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종족에게 화목하며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었다. 군주에게는 충성을 다해 섬기고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니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칭찬이 자자하였다. 다만 출사한 지 40여 년 동안 하급 관료에 머물러 있었기에 명망과 지위가 드러나지 않고 자신의 뜻이 펼치지 못하였으니,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유감스럽겠는가.
주석 26)통정공(通政公)
부호군을 지낸 부친 황유진(黃有鎭)의 품계가 통정대부이므로 이렇게 호칭한 듯하다.
주석 27)경자년
원문은 '庚午'인데, 《승정원일기》 헌종 6년 7월 20일 괴원 분관(槐院分館) 기사에 근거하여 '午'를 '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석 28)분문(奔問)하는 의리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서 문후(問候)하는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난리를 피해 정(鄭)나라 시골 마을인 범(氾)에 머물면서 노(魯)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자, 장문중(臧文仲)이 "천자께서 도성 밖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서 관수에게 문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
吏曹正郞竹林黃公行狀
公諱起漢。後改處源。又改基源。字應肇。號竹林長水人故相國厖村先生諱喜之后。先生生烈成公諱守身。烈成生長原君諱愼。長原生大司諫諱誠昌。大司諫生縣令諱則。縣令生學生諱師閔。學生生判書諱訥。判書生參議諱千鎰。參議生參判諱龍立。參判生參判諱宗翼。參判生忠義衛諱河瑞。卽公之高祖也。曾祖諱宇中。祖諱象坤。考諱有鎭。副護軍。妣晉州姜氏以興女。以崇禎一百九十年。我純祖丁丑。生公于長興泉浦面闢新洞。幼有異質。穎悟絶人。見者知其爲遠器。六歲。通政公挈移于綾州蓮花洞。十歲出就里塾。一日同學者謀攘隣雞。公曰何必攘人之物。遂牽其家犢。令屠之。同學之貧者。多艱於書冊。或至廢業公賣數畝田。具四子六經多少書。貯之齋室以資之。其氣量風義。多此類。十八歲聘夫人柳氏春樹女。憲宗五年己亥。中廷試。公以少年登科。學業未就爲憂。公私之暇。讀書愈苦。庚午除承文院正字。壬寅除孝陵別檢。到莅之日。見園池湮廢。修而新之。乙巳除成均館典籍。旋移肇慶廟令。戊申拜司憲府監察。以親老歸養。壬子丁外艱。哀禮備至。服闋以老夫人在堂。不肯從仕。戊午憂姜夫人疾病。血指得甦。庚申除司諫院正言。以親命黽勉就職。壬戌哲宗大王臨春臺。親試文臣。公居魁。又應製上三政策。請器用服飾。用土物。勿用異物。拜監察。旋爲禮曹正郞。移宣傳官。拜吏曹正郞。甲子上封事。請修肇慶慶基兩殿儀物。夏出莅慈仁縣監。有治績。乙丑拜司憲府持平。丙寅洋夷陷江都。都下恟恟。臺省爲空。或勸之歸鄕。公曰散官在外。尙有奔問之義。況在輦轂之下。遭此非常之變。而脫身自私者。豈臣子之道耶。終不自撓。時論多之。丁卯遭內艱。哀毁之節。不以耆艾自恕。服闋。拜禮曹佐郞。累遷正言及吏曹正郞。乙亥出爲黃山道察訪。戊寅拜開城府經歷。己卯三月十五日。病卒于官。時子稓輿櫬歸鄕。以四月十七日。葬于寶城郡道村面龍湖洞村后艮坐之原。後移葬于長興泉浦面花洞鳶峯之下。湖隱公墓左子坐之原。公嘗曰。吾家自厖村相國。世以淸白相承。吾自守官以來。未嘗以一物自累以負我厖村先祖貽謨云。或勸立産業。公笑曰以産業遺子孫。何如以淸白爲子孫計耶。在家時有人以事來囑。公曰。吾在官未嘗受人囑。今居私第而反爲人行囑耶。其人慚而退。性又寬簡。平居僮幼啼呼於側。略不呵禁。一日業札而置於席上。僮幼溺其上。小無怒色。又不爲時好所趨。嗚乎。公孝於父母。睦於宗族。信於朋友。事君忠莅民愛。所至皆有聲稱。但出身四十餘年。低廻下僚。名位不揚。已志不伸。其爲斯世之憾。爲何如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