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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낙청헌 처사 위공 행장(樂淸軒處士魏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10
낙청헌 처사 위공 행장
공의 성은 위(魏), 휘는 형권(衡權), 자는 중지(重之), 호는 낙청헌(樂淸軒)이다. 시조의 휘는 경(鏡)으로,주 12) 당(唐)나라 학사(學士)로 동방에 와서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태종(太宗)을 섬겼고, 관등은 대아찬(大阿飱)이고,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회주(懷州)는 바로 지금의 장흥(長興)이다. 휘 창주(菖珠)에 이르러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시중(侍中)이었다.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으니, 벌열(閥閱) 가문의 찬란함은 조야(朝野)의 전적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다. 휘 충(种)에 이르러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人心)에 따라 보위에 오를 때 추대한 공이 있었다. 4대를 전하여 휘 유형(由亨)에 이르러 승문원 습독(承文院 習讀)을 지냈는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 제현과 벗하여 잘 지내면서 기록한 창수록(唱酬錄)이 있다. 또 3대를 전하여 휘 덕화(德和)에 이르러서는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고,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어주 13)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또 4대를 전하여 휘 명덕(命德)에 이르러 병계(屛溪) 윤 선생(尹先生 윤봉구(尹鳳九))을 사사하여 문학과 품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는데 호는 잉여옹(剩餘翁)으로 유고가 세상에 전해지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사갑(師甲), 호는 부계(富溪)로, 학문은 가업을 이었으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증조의 휘는 수택(守澤), 호는 묵와(黙窩)로, 족숙(族叔)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매우 칭찬하여 중히 여겼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조부의 휘는 영진(榮震), 호는 송탄(松灘)으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익조(益祚), 호는 성성재(惺惺齋)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사우(士友)와 교유하였다. 몸소 실천하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남복(南服 남쪽 지방)의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선비(先妣)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재규(在奎)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온유하였으며 규중의 법도에 빠뜨림이 없었다. 순묘(純廟) 기유년(1819, 순조19) 9월 16일에 공을 부(府)의 북쪽 단촌(丹村)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가 장대하고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영특하고 명민하여 보통사람과는 매우 달랐으니, 할아버지 송탄공(松灘公)이 늘 애지중지하여 "우리 집안 앞날의 희망은 이 아이에게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할 때 학습 과정을 감독하지 않아도 일과를 매우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사의(辭義)를 토론하고 문장을 지을 적에는 뜻이 통창하고 어휘가 풍부하고 화려하여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양친을 섬길 적에는 정성과 힘을 다해 봉양하였고, 화락한 안색과 조심스럽고 경건한 위의를 잠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빠뜨림이 없었다. 18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쇠약해진 나머지 병이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여러 차례 위로하고 타일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김에 더욱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입맛에 맞는 음식과 몸에 편한 물건을 올림에 좌우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부족하게 한 적이 없었다. 신축년(1841, 헌종7)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자 아버지를 대신한 아픔을 더욱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였다. 모든 정리(情理)와 예법(禮法)은 일일이 예문과 같이 하였다. 모부인께서 병이 들어 잉어를 드시고자 하였다. 공이 강에 가서 울부짖으니 갑자기 한 자 남짓한 잉어 한 마리가 그물에 뛰어들었다. 잡아서 올렸는데 병이 마침내 나았으니, 사람들이 왕상(王祥)의 효성주 14)에 견주었다. 병인년(1866, 고종3)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하여 예를 행하였는데 노쇠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파리하고 실의에 빠진 용모주 15)와 야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은 주위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공경히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하는 것을 초하루와 보름 및 봄가을로 하여 때마다 폐하지 않았다. 기휘(忌諱)하는 때를 만나면 치재(致齋)하고 산재(散齋)하는 것주 16)을 반드시 삼가고 제사 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을 반드시 직접 마련하였으며, 감개하고 숙연하여 마치 살아 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주 17)을 다 바쳤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봉양을 마치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생각하여 《맹자(孟子)》의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라는 구절주 18)을 읽을 때면 반복해 읊조리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른 나이에 같은 군(郡)에 사는 남파(南坡) 이공(李公)을 스승으로 섬겨 고인(古人)의 위기지학(爲己之學)주 19)에 대해 듣고 부지런히 따라 하면서 오직 부족할까 두려워하였고, 간혹 여가가 있으면 공령(功令 과거(科擧))에 필요한 시문(詩文))과 근체(近體)의 문장을 공부하여 부모와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이 때문에 문사(文辭)가 풍부하여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니,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두 동생을 사랑으로 보살펴 은의(恩誼)가 융성하였으므로 집 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동생들을 위해 스승을 가려 부지런히 배우도록 하여 큰 유학자가 되게 하였다. 중년 이후에 자식들에게 "내가 전일에 과거 공부하는 잘못을 면치 못한 것은 다만 구구하게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는 뜻이었다. 부모님을 여읜 지금에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엇 때문에 다시 풍부(馮婦)처럼 팔뚝을 걷어붙이고 호랑이를 잡으러 나가는 짓주 20)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과거를 보지 않고 문을 닫은 채 한가로이 마음을 기르며 《논어(論語)》, 《맹자(孟子)》, 성리서(性理書) 등을 가져다 침잠하여 반복하여 읽고 이전에 연구하지 못한 것에 더욱 매진하였다. 매양 자제와 생도들에게 강의할 적에 그들을 위해서 요지를 말하되 매우 자세하고 상세하게 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병인년(1866, 고종3)에 해구(海寇)의 변고주 21)가 일어나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자 원근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공은 같은 군(郡) 사인(士人) 아무아무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규모가 대략 정해졌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악한 무리들이 매우 치성하니,주 22) 공이 매양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학(邪學)에 물들어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도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 더구나 사학을 하는 자가 반드시 산다고 보장하지도 못하고 정도를 지키는 자가 꼭 죽는다고 보장하지도 못하는 데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친족과 벗들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공이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책을 읽고 선을 밝히며 자신의 몸을 닦고 행실을 검속하여 광명정대한 곳에 그 몸을 우뚝이 세우는 것이 사람의 본분에 제일가는 사업이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속여서 구하여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내가 취하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본래 평탄한 길이 있다. 자신을 단속하고 학문에 힘쓰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사람들과 화합하는 것이 모두 복을 받는 길이다. 더구나 제사를 지내면 복이 내린다는 말이 《시경(詩經)》에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님에랴. 부처에게 시주하고 승려들에게 공양하며 무당들에게 빌고 부적을 부치는 따위는 복을 받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만 있으니, 그것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망치고 가법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너희들은 잘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계사년(1893, 고종30)에 본 고을 사또 이후(李侯)가 공을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샘이 흐르고 바위가 있는 고향의 승경지에 거처를 정한 다음 초가집을 짓고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사방 벽에 도서(圖書)를 가득 채우고 소요하면서 유유자적하였으니, 그 훌륭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에 대해 누가 말세의 완인(完人)주 23)이라고 하지 않겠으며, 남복(南服 남쪽 지방)의 일민(逸民)주 24)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금상 기해년(1899, 고종36) 12월 28일에 생을 마감하자, 부음을 듣고 사람들이 서로 조문하고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돌아가셨다."라고 하였다. 다음 해 3월 무오에 본군(本郡) 용계면(龍溪面) 연하동(烟霞洞)의 충렬공(忠烈公) 묘소 아래 기슭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사(府使) 김후 택규(金侯宅圭)가 전의(奠儀)를 보냈고, 사방에서 와서 보았으며 여러 고을에서 다 모였다. 배위(配位)는 청풍 김씨(淸風金氏) 인성(麟性)의 따님으로, 모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계홍(啓宖)이고, 딸은 김방현(金邦鉉)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는 해미 곽씨(海美郭氏)로, 1남을 두었으니, 계상(啓尙)이다. 장방(長旁)은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규(性奎)이고, 딸은 조의환(曺毅煥)·신권성(愼權晟)·윤용주(尹瑢柱)·김보인(金輔仁)에게 시집갔다. 차방(次旁)은 1남을 두었으니, 수규(壽奎)이다. 성규는 아들 석룡(錫龍)을 두었다. 아, 내가 공의 두 아들과 친하게 지냈으니, 교제한 인연으로 공을 찾아뵙고 절하였다. 공은 풍채가 중후하고 고인의 풍모가 있었으며 말은 간중(簡重)하였으니, 한번 보면 덕이 있는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행실과 평생 이력은 충신(忠信)과 성실에서 벗어나지 않은 데다가 학문으로 성취하였으며 사우(師友)의 도움을 받아 연마하고 펼쳐 나갔다. 다스림을 낼 적에는 광채가 있었으니, 아마 부자(夫子)가 이른바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라는 것주 25)에 가까울 것이다. 세상의 수준이 점점 떨어져 위선이 판을 쳐서 선배들의 질박하고 성실한 기풍을 다시 볼 수 없으니, 고금을 돌아봄에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공의 두 아들은 노성하여 연세와 덕망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두 손자는 사우(師友)와 교유하여 나이가 젊고 학문에 힘쓰니, 공의 평소 가르침이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기에 당대에 보답 받지 못한 덕은 필시 앞으로 크게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계홍(啓宖)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울면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선군(先君)을 아는 것이 그대만 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행장을 지어서 영원히 후대에 남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잔약하고 용렬한 내가 그 청을 받아들일 자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평소 우러러 사모하였으니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주석 12)휘는 경(鏡)으로
장흥 위씨(長興魏氏)의 시조는 위경(魏鏡)으로 당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으로 전해진다. 위경의 동래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신라 태종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였다는 설과,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하자 보내준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위경은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상서시중(尙書侍中)에 이르렀으며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회주(장흥)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의 기록이 실전되어 신라 말에 대각관시중(大覺官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하여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주석 13)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어
호성 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간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1604년(선조37)에 세 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1등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2명, 2등은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 31명, 충근정량호성 공신 86명이다.
주석 14)왕상(王祥)의 효성
진(晉)나라 때의 효자 왕상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繼母)의 학대를 받으며 살았으나 늘 효도를 지극히 하였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계모가 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므로 왕상이 얼음을 깨고 직접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얼음이 갑자기 녹으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晉書 王祥列傳》
주석 15)파리하고 실의에 빠진 용모
《예기》 〈옥조(玉藻)〉에 "거상할 적의 모습은 파리하고 실의해서, 낯빛의 모양은 근심스러우며, 보는 모양은 놀라서 다급하고 분명치 못하며, 말하는 모양은 낮고 미미하다.[喪容纍纍, 色容顚顚, 視容瞿瞿梅梅, 言容繭繭.]"라고 하였다.
주석 16)기휘(忌諱)하는……것
《예기》 〈제의(祭義)〉에 "안에서 치재하고 밖에서 산재하여, 재계하는 날에 조상이 거처하시던 곳을 생각하며, 그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뜻과 생각을 생각하며, 그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즐기던 것을 생각하여, 재계한 지 3일에 마침내 그 재계한 조상을 보게 된다.[祭義曰:致齊於內, 散齊於外, 齊之日,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嗜, 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라고 하였다.
주석 17)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
《중용》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성대하게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하였다.
주석 18)맹자(孟子)에……구절
《맹자》〈만장 상(萬章上)〉에 "대효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나니, 50세까지 부모를 사모하는 것을 나는 대순에게서 보았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고 하였다.
주석 19)위기지학(爲己之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20)풍부(馮婦)처럼……짓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진(晉)나라의 풍부라는 사람이 호랑이를 잘 때려잡았는데 뒤에 마음을 바꾸어 선비가 되었다. 어느 날 들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호랑이를 산모퉁이에 몰아 놓고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가 풍부가 수레를 타고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맞이하니, 풍부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기뻐하였으나 선비들은 풍부가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孟子 盡心下》
주석 21)병인년 해구(海寇)의 변고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0월 프랑스의 로즈(Roze)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귀리에르(Guerriere)를 비롯하여 함대 7척과 6백 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14일 강화부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점령하였다.
주석 22)갑오년에……치성하니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봉기를 이른다.
주석 23)완인(完人)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화나 당쟁 같은 변란 속에서도 자신의 절조와 목숨을 모두 온전하게 지킨 사람을 가리킨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 때 활동한 유안세(劉安世)가 그런 인물이다. 유안세는 사마광(司馬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철종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가 장돈(章惇)에 의해 밀려났다. 그 후 30년 동안 전전하다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환관 양사성(梁師成)이 권력을 잡아 그에게 관직에 나오라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밀려난 지 거의 30년이 되도록 권력을 가진 자에게 편지 한 자 주고받은 적이 없다. 나는 '원우의 완인'으로 그대로 남고 싶으니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12》
주석 24)일민(逸民)
뛰어난 학문과 덕행을 소유하고서도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주석 25)부자(夫子)가……것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이르기를 "예악을 행함에 있어 선배들은 촌사람처럼 순박하였고 후배들은 군자처럼 문채가 나는데, 내가 만약 행한다면 나는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 하였다.
樂淸軒處士魏公行狀
公姓魏。諱衡權。字重之。號樂淸軒。始祖諱鏡。以唐學士東來。仕新羅事太宗。官大阿飱。封懷州君。子孫仍貫焉。懷州卽今之長興也。至諱菖珠。仕麗官侍中。世有聞人。閥閱煒燁。朝野載籍。班班可考。至諱种。在我太祖應順之際。有推戴功。四傳至諱由亨。官承文習讀。棄官歸鄕。與南秋江諸賢相友善。有唱酬錄。又三傳至諱德和。彦陽縣監。以扈聖錄勳。贈戶曹判書。又四傳至諱命德。師事屛溪尹先生。文學行義。爲士林所推重。號剩餘翁。有遺稿行于世。卽公之五世祖也。高祖諱師甲。號富溪。學襲家庭。隱德不仕。曾祖諱守澤。號黙窩。受學于族叔存齋先生之門。先生稱詡甚重。有遺集。祖諱榮震。號松灘。孝友著聞。考諱益祚。號惺惺齋。承襲家學。遊從士友。踐履行治。爲南服儒林之望。妣漆原尹氏在奎女。貞靜柔嘉。閫儀無闕。以純廟己卯九月十六日。生公于府北丹村之第。體相岐嶷。聲音弘亮。穎悟開爽。逈異凡常。王考松灘公每撫愛之曰。吾家前頭之望在此兒。及其就傅。不待程督而課日甚勤。至於討辭解義。行文綴句。通暢贍麗。無異老成。事二親。致誠致力。怡愉之色。洞屬之儀。不以須臾而有間。不以絲毫而有闕。十八丁外艱。哀毁過禮。羸瘠成疾。王考婁慰諭之。俾免傷生。事王考及慈幃。尤盡誠敬。適口之味。適身之物。左右竭蹶。未嘗見乏。辛丑丁王考憂。代父之痛。益不自勝。凡百情文。一日如禮。母夫人病。嘗欲鯉魚。公臨江號泣。忽有一鯉長尺許。躍八于網。持以供之。病乃得愈。人擬之於王祥之孝。丙寅遭內艱。執喪行禮。不以衰老而自恕。繭梅之容。柴骨之象。可以感動傍人。祗謁廟宇。展省墳墓。朔望春秋。隨時不廢。遇忌諱之辰。致散必謹。供具必親。慨然肅然以盡如在之誠。常恨早違所怙。未終其養。讀孟子終身慕之語。未嘗不三復沈咏。聲淚俱發。早師同郡南坡李公。得聞古人爲己之學。遵循娓娓惟恐不足。而間以餘日。及於功令近體之文。以爲父母門戶之望。是以詞藻藹蔚。累捷鄕解。而見屈於禮部。物論惜之。撫愛二弟。恩誼隆洽。庭除之間。無有間言。爲之擇師勤學。至成巨儒。中年以後。謂諸子曰。吾於前日。不免爲場屋之累者。只是區區供悅之意。今風樹孤露。靡所逮及。何爲而復揚馮婦之臂乎。自後不赴公車。杜門養閑。取論孟性理等書。沈潛反復。益究前日之所未究。每講子弟及生徒。爲之說道要義。縷縷詳悉。聽者感服。丙寅海寇之變。沁都失守。遠近汹汹。公與同郡士人某某謀起義旅。規模略定。聞亂靖而罷。甲午匪類大熾。公每戒人曰。與其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況邪者未必得生。正者未必得死耶。是以族戚知舊皆得免焉。公嘗戒子孫曰。讀書明善。修身飭行。卓然立其身於光明正大之地。此是人生本分第一事業。若其枉求非分。沾沾自足。吾所不取也。汝等戒之。又曰。人之獲福。自有坦道。謹身力學。孝於親忠於上和於衆。莫非福也。況祭祀降福之說。見於詩者非一乎。若其供佛飯僧巫覡符章之類。不惟無福而有禍。其爲敗世敎亂家法爲何如哉。汝等切宜識之。歲癸巳。本倅李侯以公孝行。剡薦于朝。除童蒙敎官。所居有邱林泉石之勝。結茅開逕。蒔花裁竹。四壁圖書。婆娑倘佯。其偉韻遐躅。孰不謂叔世之完人。南服之逸民乎。今上己亥十二月二十八日考終。聞者相弔曰。哲人萎矣。翌年三月戊午。葬于本郡龍溪面烟霞洞忠烈公墓下麓艮坐原。府倅金侯宅圭爲致奠儀。四方來觀。數郡畢集。配淸風金氏麟性女。擧一男一女。男啓宖。女適金邦鉉。繼配海美郭氏。擧一男。曰啓尙。長旁一男四女。男性奎女適曺毅煥愼權晟尹瑢柱金輔仁。次旁一男壽奎。性奎男錫龍。嗚乎。余與公二子相友。夤緣過從。拜公於床下。公體厚貌古。言辭簡重。一見可知爲有德君子。若其平生行治終始。履歷不出乎忠信誠慤之外。而濟之以學文師友之助。磨礱展拓。出治光采。庶幾乎夫子所謂從先進者矣。世級浸下。虛僞日滋。而先輩質慤之風。不可以復覩。俯仰今古。寧不慨然。公二子耆老年德。聲聞偉然。二孫遊從師友。年富力學。公平生之敎。可謂不墜於家。而不食之報必將有大來之日矣啓宖持家狀。泣而示余曰。知先君。孰有如吾子。願爲之狀行以垂不朽於來許也。余以殘劣。極知其非所承膺。而慕仰有素。豈忍辭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