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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훈련원 봉사 농은 민공 행장(訓錬院奉事農隱閔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09
훈련원 봉사 농은 민공 행장
공의 휘는 대승(大昇), 자는 승여(昇汝), 호는 농은(農隱),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묵헌(黙軒) 선생 휘 지(漬)의 후손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고, 저명한 선비들이 즐비하였다. 휘가 회삼(懷參)이란 분에 이르러서는 호가 의암(義庵)인데, 세조(世祖)가 양위를 받자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대정현(大靜縣)으로 좌천되었다. 귀양에서 풀려나서는 능주(綾州)에 은둔하였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여기에 살게 되었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희점(希點)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조부의 휘는 충익(忠翼)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선고(先考)의 휘는 영우(英雨)로, 병절 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선비(先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세화(世華)의 따님이다. 선묘(宣廟) 계유년(1573, 선조6)에 주(州)의 서정리(西亭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장성해서는 문사(文詞)가 특출하고 무예까지 겸비하였다. 호방하고 강개(慷慨)하였으며, 기절(氣節)과 담략(膽略)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붓을 던지고 무과로 출신하여 관직을 옮겨 훈련원 봉사(訓錬院奉事)에 올랐다. 어느 날 상이 문관과 무관에게 재예를 시험하였는데 공이 장원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품계를 건너뛰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권귀(權貴)의 눈 밖에 나서 관직에서 물러나 전리(田里)로 돌아가서는 외부 일에 관심을 끊고 대문을 닫고 휘장을 드리운 채 옛날에 익힌 학문을 복습하고 정리하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생을 마감하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리자, 우산(牛山) 안 선생 방준(安先生邦俊)과 의병을 일으켰다. 옥과 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浡), 찰방(察訪) 이기발(李起浡), 순창 군수(淳昌郡守) 최온(崔蘊),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 유집(柳楫), 전 찰방 김선(金旋) 등이 일시에 호응하여 기한 내에 모였다. 광주(光州)의 경계에 이르러 전군(前軍)이 지체하면서 나아가지 않자, 공이 큰소리로 매우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군주가 치욕을 받으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 대의(大義)이다. 나라가 이처럼 위급한데 도리어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니, 온 군중이 숙연하였다.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다. 또 말하기를 "당당하게 예의를 지키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차마 머리를 풀고 좌임(左袵)하는 오랑캐가 되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인하여 '원컨대 허리에 찬 칼을 가지고, 곧장 누란왕을 베어 죽였으면 한다.[願將腰下劍 直爲斬樓蘭]'라는 시구주 11)를 읊조리며 끊임없이 혀를 차며 애석해하였다. 향리로 돌아와 대문을 닫고서는 다시 출사하지 않았다. 작은 정자를 짓고 망미정(望美亭)이라고 편액하고 당시의 명사와 더불어 산수에서 노닐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지냈다. 현종(顯宗) 갑진년(1664, 현종5) 10월 29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주(州)의 세청면(世淸面) 개선동(改善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주준(柱俊)의 따님이다. 장자는 성(誠), 차자는 간(諫)으로, 병자년(1636, 인조14)에 아버지를 모시고 의병에 나아갔다. 측실(側室)의 두 아들은 의(誼), 계(誡)이고, 딸은 이두연(李斗延)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행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마음이 잘 맞는 때를 만났지만 산관(散官)의 반열에서 배회하여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았기에 산림으로 물러나 종적을 감추고 은거한 채 평소 포부를 조금도 드러내지 못 하였으니, 식자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오직 의병을 일으킨 일로 말하면 비록 중도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늠름한 충의, 엄정하고 분명한 기율, 신속하게 호응하여 모인 것에서 평소 수양의 깊이와 신망의 중함을 알 수 있어 먼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니, 저 한때의 부침을 가지고 어찌 경중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9세손 재호(在鎬)가 가장(家狀)을 보여 주고 인하여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내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 추앙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주석 11)원컨대……시구
이백(李白)의 〈새하곡(塞下曲)〉에 나오는 구절이다. 《李太白集 卷4》
訓錬院奉事農隱閔公行狀
公諱大昇。字昇汝。號農隱。驪興府院君黙軒先生諱漬后也。世襲簪纓。名碩磊落。至諱懷參。號義庵。當光廟受禪。以定順王后親屬。謫守大靜縣。及放還也。遯于綾州。子孫因居焉。於公爲高祖也。曾祖諱希點。忠順衛。祖諱忠翼。忠順衛。考諱英雨。秉節校尉。妣水原白氏世華女。以宣廟癸酉。生公于州之西亭里。幼有至行。及長文詞出夷。武藝兼至。倜儻慷慨。有氣節瞻略。屢中鄕解。見屈禮部。於是投筆。出身遷至訓錬院奉事。一日上試藝文武官。公居第一。特命超資折衝。旣而爲權貴所忤。退歸田里。掃却外事。杜門下帷。以溫理舊業。獎進後學。爲畢生計。及丙子朔警。與牛山安先生邦俊。倡起義旅。玉果縣監李興浡察訪李起浡淳昌郡守崔蘊前翰林梁曼容前察訪柳楫前察訪金旋等。一時響應。刻期赴會。至光州界。前軍遲留不進。公揚言大責曰。主辱臣死。此是大義。國之危急如此。而乃玩愒時日乎。一軍肅然。至礪山。聞和成。北向痛哭。且曰忍令吾堂堂禮義之邦。淪爲被髮左袵耶。因誦願將腰下劒直爲斬樓蘭之句。咄咄不已。還鄕杜門。不復出仕。築一小亭。扁其額曰望美。與一時名士。遊從於山水文酒之間顯宗甲辰十月二十九日終。葬州之世淸面改善洞午坐原。夫人淸州韓氏柱俊女。長子誠次子諫。丙子侍親赴義。側室二子誼誡。女李斗延。孫曾以下不能悉記。嗚乎。公以孝友之行。文武之才。當明良會遇之際。而低廻散班。位不稱德。退休林樊。斂跡潛光。使平日所抱。不少槪見。爲識者之缺望大矣。惟其擧義一事。雖未免中途左次。而其於忠義之凜烈。紀律之嚴明。應聚之敏速。可見素養之深。宿望之重。而百世之下。足令人起敬。彼一時之低昂。何足爲輕重也。九世孫在鎬示以家狀。因請狀德之文。余以鄕里後生。追仰有素。不敢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