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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농은 오공 행장(農隱吳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08
농은 오공 행장
내가 약관의 나이에 집을 떠나 상서(庠序)에서 공부할 적에 우리 고을의 인물을 보니 원로와 저명한 선비가 많았는데 유독 농은(農隱) 오공(吳公)이 풍의(風儀)와 언론이 탁월하고 곧았으므로 그를 마음에 가장 흠모하였다. 이윽고 공이 돌아가시고 그 후손 수현(壽玹)이 공이 남긴 사적(事跡)을 수록하여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미 30년 전 일이 되었다. 향당(鄕黨)에서는 풍의와 언론이 더 이상 당시처럼 인물의 성대함을 보지 못했고 젊어서 배종하던 나 같은 자도 이미 늙었다. 만약 다시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명망과 자취가 더욱 사라질 것이니 어떻게 훗날의 역사가가 사실에 의거하여 훌륭함을 드러내는 바탕으로 삼겠는가. 이것이 내가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공의 휘는 지상(志祥), 자는 성심(聖心)으로, 고려(高麗) 때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을 비조로 삼는다. 문양공의 후손 가운데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진 현필(賢弼)이란 분이 있는데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보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고, 휘 방한(邦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晉州)에서 순절하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된 휘 진례(震禮), 증조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휘 세관(世觀), 조부는 휘 시유(始有)이다. 선고(先考)는 휘 석윤(錫胤), 선비(先妣)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필련(必煉)의 따님으로, 지족당(知足堂) 박성인(朴成仁)의 6대손이다. 순묘(純廟) 병인년(1806, 순조6) 12월 6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어서 12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지성으로 애통해하여 한편으로 곡을 하고 한편으로 발을 구르다가 갑자기 기절하였다. 대인(大人)께서 건강을 손상할까 염려하여 매양 위로하고 억제하여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니, 대인이 출타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때마다 슬픈 마음을 다 드러내었다. 계비(繼妣) 장씨(張氏)는 성품이 매우 엄격하여 거의 용납하지 못하였지만 공은 곡진하게 받들고 순종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니, 부지런히 봉양하는 것은 지성에서 나왔다. 장씨가 끝내 기뻐하자 마치 자기가 기쁜 듯이 여겼다. 부친 병간호를 할 적에 너무나도 근심하여 대변을 맛보고 차도가 있는지를 점검하였고,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소생시켰다. 부친상을 당해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수척하였으며, 정성과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아우 치상(致祥)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일상생활할 적에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재산과 물품은 있고 없는 것을 공유하였다. 22세 때 함안 윤씨(咸安尹氏) 범수(範壽)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영의정에 추증된 기견(起畎)의 후손이다. 효성스럽고 유순하며 온화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다. 공은 평소 몸가짐에 절도가 있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며 자제를 가르치고 동복(僮僕)을 부릴 적에 모두 분명하게 조리가 있었다. 이웃 마을이나 향당, 상서(庠序)나 학교의 일에 대해 명백하지 않은 것을 판단하고 폐단을 없애 한 고을의 풍기(風紀)를 세운 데는 그가 노력하여 힘쓴 공이 적지 않았다. 타고난 품성이 기개가 있고 곧아 사사로운 마음으로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으므로 남들도 감히 의롭지 않다고 보지 않았다. 만년에 금오산(金鰲山)의 빼어난 산수를 사랑하여 석정(石亭)에서 가족을 데리고 가서 머물렀는데, 유연히 그곳에서 노년을 마칠 뜻을 두어 농은(農隱)이라고 자호하였다. 갑술년(1874, 고종11)주 10) 3월 2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단양(丹陽)의 덕현(德峴)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4년 뒤에 부인 윤씨(尹氏)가 졸하자 공의 묘소 오른쪽 산등성이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수현(壽玹)·수빈(壽彬)이고, 딸은 홍우명(洪祐明)·문석홍(文錫弘)에게 시집갔다. 수현의 아들은 정섭(定燮)·창섭(昌燮)이고, 딸은 이인채(李仁采)·박두현(朴斗玹)에게 시집갔다. 수빈의 아들은 남섭(南燮)이다. 아, 공의 재주와 기개가 어찌 한 고을의 인물이 될 따름이겠는가. 향당에 매양 이러한 인물이 있다면 후생이 어찌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으며, 향리의 풍속이 어찌 아름답지 못한 것을 근심하겠는가. 공의 행실에 대해서 비록 대략적으로도 보지 못했지만 기업(基業)을 개창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게 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어서 서술하여 후세에 알리게 할 자는 또한 합당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주석 10)갑오년
원문은 '甲午'인데, 《松沙集》 「농은오공묘지명(農隱吳公墓誌銘)」에 근거하여 '午'를 '戌'로 바로잡았다.
農隱吳公行狀
余在弱冠出遊庠序中。見吾鄕人物。多耆舊名碩。而惟農隱吳公。風儀言論。俊偉宏直。最有欽艶於心。旣而公沒。而其遺胤壽玹。收錄遺事以請狀德之文。嗚乎。叵耐歲月。已屬三十年前事。鄕黨之間。風儀言論。非復當時人物之盛。而陪從少年如義林者。亦已老矣。若復少加日月。則聲望風蹟。益就泯然。而何以爲後史氏据實揄光之地乎。此余所以不敢牢辭者也。公諱志祥。字聖心。以麗朝文襄公諱延寵爲鼻祖。文襄之後。有賢弼封寶城君。子孫因貫焉。至我朝。有諱益孫。以學行除靖陵參奉。諱邦翰。壬亂殉節晉州。皆顯祖也。高祖贈戶曹參議諱震札。曾祖贈戶曹參判諱世觀。祖諱始有。考諱錫胤。妣咸陽朴氏必煉女。知足堂成仁六世孫。以純廟丙寅十二月六日。生公于七松里。幼有至行。年十二遭內艱。至誠哀痛。哭踊頓絶。大人慮有傷生。每慰抑之。不敢徑情。俟大人出。輒盡哀。繼妣張氏。性甚嚴。幾不見容。公委曲承順。毫忽無違。服勤就養。出於至誠。張氏竟底豫如己出。侍親癠。極其致憂。嘗糞以試差劇。血指以甦旣絶。及遭故。過於哀毁。情文備至。與弟致祥友愛甚篤。居處出入。未始相離。財産什物。有無共之。二十二聘咸安尹氏範壽女。贈領相起畎后。孝順柔嘉。其得婦道。公平居持身有度。治家有法。奉祭祀接賓朋敎子弟御僮僕。皆燦然有條。至於隣里鄕黨庠序學校之地。所以裁決疑晦刷滌弊瘼而立一方之風紀者。其力爲不少矣。天性儻直。未嘗以私干人。人亦不敢以非義見之。晩愛金鰲山水之勝。自石亭挈家往住之。悠然有終老之意。自號農隱。甲午三月二十一日考終于正寢。葬于丹陽之德峴甲坐原。後四年夫人尹氏卒。葬于公墓右岡艮坐原生二子二女。壽玹壽彬。女洪祐明文錫弘。壽玹子定燮昌燮。女李仁采朴斗玹。壽彬子南燮。嗚乎公之才局氣槪。豈惟爲一鄕人物而已。鄕黨之間。每有此等人物。則後生何患無賴。鄕俗何患不美哉。公之行。雖不槪見。而其爲創業可繼者若是。則繼而述之使之。有聞於後世者。想亦不無其人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