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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죽와 홍공 행장(竹窩洪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07
죽와 홍공 행장
공의 휘는 이수(履洙), 자는 자원(子源), 호는 죽와(竹窩)이다. 홍씨(洪氏)는 관향이 풍산(豐山)이니, 직학사(直學士)인 휘 지경(之慶)을 비조(鼻祖)로 삼는다. 조선에 들어와 휘 귀(龜)인 분이 계셨는데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고조의 휘는 애(埃)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덕우(德遇)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경고(景古), 호는 침수정(枕漱亭)으로, 은덕(隱德)이 있어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천규(天奎), 호는 오은(鰲隱)이고, 선비(先妣)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통정대부 인호(仁毫)의 따님이다. 명릉(明陵) 을유년(1705, 숙종31)에 주(州)의 월곡리(月谷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성실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어버이를 섬길 적에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10세에 모부인(母夫人)이 종기를 앓아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공이 주야로 울부짖으며 백방으로 치료할 방법을 상고하여 마침내 입으로 빨아 낫게 하였다. 오은공(鰲隱公)이 일찍이 부증(浮症)을 앓아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두꺼비 고기를 먹는 것이 가장 효험이 있다."라고 하였다. 추운 날씨에 눈이 쌓여 있는 때라 사방으로 구했지만 구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큰 두꺼비 한 마리가 앞에 있었다. 이것을 잡아서 돌아가 올리니 병이 과연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 외출하였는데 갑자기 가슴이 뛰고 몸에 땀이 나기에 즉시 집으로 돌아오니 오은공이 위독한 병을 앓아 실낱같은 숨이 끊어질 듯하였다. 마침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어 결국 회생하게 하였으니, 남다른 행실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몸가짐은 단정하고 정중하였고 말은 간략하면서 어눌하였다. 비록 한가할 때라도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비록 위급한 상황이라도 다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득실(得失), 이해(利害), 시비(是非), 훼예(毁譽)에 이르러서는 귀를 막아 듣지 못한 듯이 하고, 담담하게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 날마다 두 아우 및 종반들과 함께 한 방에서 독서하고 이치를 궁구하면서 오랫동안 드러내지 않고 수양하였는데 신망(信望)이 사방으로 퍼져 생도들이 문하에 운집하였고 붕우들이 그를 관아에 천거하였다. 임신년(1752, 영조28) 가을에 오은공의 상을 당하여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몸이 여위었고 장사 지낸 뒤에 시묘살이하느라 수척하여 병이 들었다. 다음 해 6월 14일에 여차(廬次)에서 졸하니 향년 49세였다. 아, 선인 군자(善人君子)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며 은거하여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듯하지만 남에게 미치는 이로움과 은택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 향리에서 가법이 있다고 이름난 사족(士族) 가운데 홍씨(洪氏)가 그 하나인데, 후세 자손 중에 또 성대하게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많았으니 이 어찌 유래가 없는 것이겠는가. 당대에 쓰이지 못한 것은 족히 경중을 따질 것이 못 된다.
배위(配位)는 함풍 이씨(咸豐李氏) 두평(斗平)의 따님으로 부원군(府院君) 언신(彦信)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이 있었고, 모두 2남을 두었으니, 영환(永桓)과 영표(永杓)이다. 계배(繼配)는 진주 정씨(晉州鄭氏) 통덕랑(通德郞) 최(最)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단정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 모두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영막(永漠)과 영극(永極)이고, 딸은 정혁(鄭爀)에게 시집갔다. 공의 묘소는 주(州)의 해하리(海鰕里) 병좌(丙坐) 언덕에 있다. 이씨는 합장하였고, 정씨는 묘혈 아래 사좌(巳坐)에 있다. 6대손 승환(承渙)이 그의 숙조(叔祖) 영택(永宅)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남길 글을 청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사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竹窩洪公行狀
公諱履洙。字子源。號竹窩。洪氏系出豐山。以直學諱之慶爲鼻祖。入我朝有諱龜。中郞將。高祖諱埃。中司馬兩試。贈掌樂院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判。祖諱景古。號枕漱亭。有隱德。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妣仁川李氏通政仁毫女。明陵乙酉。生公于州之月谷里第。幼有至性。事親無遠。十歲。母夫人患癰幾危。公晝夜號泣。百方稽效。遂吮之得愈。鰲隱公嘗患浮症彌留。醫云。用蟾肉最妙。時天寒雪積。四求不得。忽有一大蟾當前。持之以歸。病果得差。一日出遊。忽心驚體汗。卽歸家。鰲隱公方患劇疾。奄奄垂絶。乃血指注口。竟見回甦。其出人之行。多此類。儀狀端重。言語簡訥。雖燕閒之時。未嘗有怠慢之容。雖顚沛之時。未嘗有急遽之色。至於得失利害是非毁譽。充然如不聞也。泊然如不見也。日與二弟及羣從。同處一室。讀書硏理。晦養積久。孚信旁達。生徒坌集于門。朋友薦報于官。壬申秋。遭鰲隱公喪。哀毁過甚。旣葬廬墓。以羸瘠成疾。翌年六月十四日。卒于廬次。得年四十九。嗚乎。善人君子之於世也。窮居潛藏若無所爲。而其利澤之及人。有不可誣者也。吾鄕士族名有家法者。洪氏居其一焉。而後嗣子孫。又彬彬多志學之人。此豈無所自耶。其不得試於一時者。不足爲輕重也。配咸豐李氏斗平女。府院君彦信后。有婦德。擧二男。曰永桓永杓。系配晉州鄭氏通德郞最女。貞靜端淑。閨門雍睦。擧二男一女。曰永漠永極。鄭爀。公墓州之海鰕里負丙之原。李氏祔左。鄭氏祔下巳坐。六代孫承渙。以其叔祖永宅所撰家狀。來請所以立言垂後者。余以非其人。牢辭不得。謹據家狀而爲之說如是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