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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백파 김 상사 행장(白波金上舍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05
백파 김 상사 행장
내 일찍이 시골의 부로(父老)를 모시는 자리에서 우리 고을 근고의 인물의 성대함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풍의(風儀)가 수려하고 언론이 뛰어나서 활달하여 범상하지 않은 기상이 있는 분으로는 애당초 백파(白波) 김공(金公)을 으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휘는 재탁(再鐸), 자는 맹경(孟警), 호는 백파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휘 추(錘)의 후손이다. 고려 말에 휘 이안(履安)이란 분이 계셨는데, 판삼사(判三司)로 절개를 세웠으니, 공에게는 15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성옥(聲玉), 호는 온면당(穩眠堂)이고, 조부의 휘는 시춘(始春), 선고(先考)의 휘는 응복(應福), 선비(先妣)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빈(彬)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10월 7일에 도장리(道莊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장난치고 노는 것이 여느 아이와 매우 달랐다. 조금 성장하여 재종제(再從弟) 앙탁(仰鐸)과 함께 스승을 찾아가 배워서 뜻을 넓히고 학업을 넓게 펼쳤다. 이 때문에 지향하는 뜻이 넓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대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교제하기를 원했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워 양지(養志)와 양체(養體)주 7)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를 간호할 적에 외진 바닷가나 험한 산중에서 의원을 찾고 약을 구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첩첩산중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그의 범상하지 않는 행실은 이러한 유가 많았다. 젊었을 때 남애(南厓) 정공(鄭公)에게 수업을 받았기에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 되어서도 매양 그 묘소에 성묘하였고, 그 아비 잃은 자식을 불쌍히 여겨 언제나 잊지 않았다. 종족과 이웃 마을에 대해서는 애정이 두루 미쳤고 오래된 벗에 대해서는 안부를 묻는 것이 줄어들지 않았다. 향리와 학교의 사이에서 곧은 논의를 내었으니, 그가 경영하고 계획한 것은 볼만한 것이 많았다. 온면당(穩眠堂)을 중건하여 돌아가신 분을 간절하게 흠모하는 정성주 8)을 부쳤고, 집 곁 시냇가 바위 위에 백파정(白波亭)을 지어서 손님을 맞이하고 벗을 모아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마음껏 노니는 장소로 삼았다. 중년 이후로 산천 구경을 좋아하였다. 동복 한 명을 대동하고 나귀 한 마리를 타고 여장(旅裝)은 단출하게 하여, 가다가 기이하고 빼어난 산과 수석이 맑게 펼쳐진 전경을 만날 때마다 이리저리 거닐며 시를 읊조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유숙하기도 하였다. 평생 은거하였지만 명망과 실제가 더욱 융성하였으므로 여리(閭里)에서는 그 효성에 보답하고 주군(州郡)에서는 그 재주를 천거하기까지 하여 그가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해년(1827, 순조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병오년(1846, 헌종12) 5월 7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71세이다. 조치(鳥峙) 방축동(防築洞)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동완(東完)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신중하며 온유하여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처신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익(漢益), 한창(漢昌)이고, 딸은 임처상(林處相), 이인휘(李仁徽), 고시상(高時相)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지금 쇠미한 말세에 인물이 보잘것없는데 이렇게 평지에서 돌출하듯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태어난 것은 하늘의 뜻이 우연이 아닌 듯하지만 끝내 또한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공은 병오년(1846)에 돌아가시고 나는 을사년(1845, 헌종11)에 태어났다. 이는 삼성(參星)이 막 빛을 발하자 상수(商宿)가 갑자기 사라진 것과 같아서,주 9) 30리 한 고을에 이렇게 어질고 덕이 있는 장로가 있었지만 세상을 함께 누리는 즐거움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남아 있는 전장(田莊)을 바라봄에 직접 뵙지 못한 한스러움만 간절해진다. 공의 현손(玄孫) 홍기(弘基)가 그의 유집 2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교감해 주기를 부탁하고,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후생이 공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공의 명성을 향리의 부로들에게 들었다. 지금은 향리 부로들의 얼굴과 함께 모두 보지 못하고, 오직 이 한 책을 후생이 노년이 된 날에 얻었으니, 책을 어루만지며 서글퍼서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겠다. 이에 교정하는 일을 마치고 돌려주고 또 이어서 이처럼 행장을 서술한다.
주석 7)양지(養志)와 양체(養體)
양지는 어버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것이고, 양체는 물질적으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해 드리는 것으로,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주석 8)간절하게 흠모하는 정성
죽은 사람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이나 그를 앙모(仰慕)하여 앉아서는 요 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을 때면 요 임금을 국[羹]에서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주석 9)삼성(參星)이……같아서
삼성(參星)은 동쪽 하늘에 있고 상성(商星)은 서쪽 하늘에 있어서 각각 뜨고 지는 시각이 다른 관계로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다. 《春秋左氏傳 昭公元年》
白波金上舍行狀
余嘗侍鄕父老。聞吾鄕近古人物之盛。而其風儀秀爽。言論英暢。有磊落不常之氣。則未始不以白波金公爲第一焉。公諱再鐸。字孟警。號白波。新羅敬順王子諱錘之後。麗末有諱履安。以判三司立節於公爲十五世也。曾祖諱聲玉。號穩眠堂。祖諱始春。考諱應福。妣全州李氏彬女。以正宗丙申十月七日。生公于道莊里。幼而嬉遊。絶異凡兒。稍長與再從弟仰鐸。負笈從師。開廣其志。展拓其業。是以抱負博洽。聲聞藹蔚。一世名碩。無不願交。天性孝順。養志養體。無不備至。其侍疾也。尋醫求藥於窮海艱險之中。其遭故也。築室侍墓於深山萬疊之中。其偉行多此類。少時受業於南厓鄭公。至老白首。每省其墓。恤其孤。眷眷不忘。於宗族隣里。恩愛周洽。故舊朋友。存訊不替。出以風議於鄕邦學校之間。其經紀條畫。多有可觀焉。重建穩眠堂以寓羹墻之慕。結白波亭於宅畔溪石上。爲延賓會友文酒遊衍之所。中年以後。好遊山水間。以一僮一驢。裝服蕭然。行遇林巒奇絶。水石淸曠。輒徘徊吟哦。或移時焉。經宿焉。平生隱淪。望實益隆。以至閭里報其孝。州郡擧其才。莫不欲其爲世用也。丁亥中進士。丙午五月七日終。享年七十一。葬鳥峙防築洞酉坐原。配全州李氏東完女。淑愼柔嘉。甚得婦道。二男三女。漢益漢昌。女林處相李仁徽高時相。孫以下不能記。嗚乎。當今衰叔。人物藐然。鍾此出夷不常之器。天意似不偶然。而終亦沈淹何耶。公歸於丙午。而余生於乙巳。參星纔出。商宿遽沒。使同鄕一舍。有此賢德長老。而未見倂世之樂。瞻言遺庄只切罔及之恨。公玄孫弘基。奉其遺集二卷。屬余校勘。且請狀德之文。嗟惟晩生。旣失公之面。而得公之聲於鄕父老。今則倂與鄕父老之面而皆失之矣。惟此一書。得於晩生垂老之日。撫卷悲愴。有不忍終辭。玆以了還校役。又從而狀述之如是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