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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선비 유인 박씨 행장(先妣孺人朴氏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04
선비 유인 박씨 행장
선비(先妣) 박씨(朴氏)의 관향은 진원(珍原)이니,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의 후손이다. 증조는 만열(萬烈), 조부는 귀현(貴玄), 선고(先考)는 치성(致聖), 선비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태방(泰邦)의 따님이다. 순조(純祖) 기묘년(1819, 순조19) 장흥(長興) 갈령리(葛嶺里)에서 태어났으니, 바로 박씨의 세거지이다. 아직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던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겨우 일을 살필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사촌 언니의 손에서 자랐다. 사촌 언니는 바로 문씨(文氏)에게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된 이였다. 성품이 엄정하여 과부로 살면서 은장도를 늘 머리맡에 두었으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매우 경계하여 비록 이웃에 있는 친척이라도 일이 없으면 간 적이 없었으니, 엄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 고아가 된 나의 선비를 보고 매우 가련하게 여겨 온 정성을 바쳐 돌보고 가르쳤다. 선비는 17세에 시집왔는데 당시 선고께서는 덕동(德洞)에 우거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것이 매우 서툴렀다. 선비께서 어린 나이에 가사를 책임져 온갖 일을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처리하니 살림을 맡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집안 형편이 조금 펴졌다. 지아비를 섬길 적에는 부인의 도리를 다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는 법이 없었고 한 마디 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전 부인의 기일이 되면 성의를 다했고, 전 부인이 낳은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 시집간 딸의 경우에는 비록 사위와 외손자라도 차별 없이 대하였다. 친척과 이웃 마을에 은혜를 두루 베풀어서 모두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정결하였으며, 기물은 소박하면서도 완전히 갖추었다. 해지거나 파손된 것이 있으면 즉시 보수하였다. 옷 한 벌 버선 한 컬레를 10년 동안 바꾸지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을 구휼할 적에는 관대하고 넉넉하게 하는 데 힘썼고 아끼거나 인색하지 않았다. 일찍이 친가에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친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고 묘를 지키게 하였는데 은애(恩愛)와 돌봄이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 두터웠다. 조카며느리 양씨(梁氏)가 일찍 과부가 되어 자식이 없자 매우 가련하게 생각하여 전답을 나누어 주어서 생계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병진년(1856, 철종7) 겨울에 덕동(德洞)에서 품평(品坪)으로 이사하였는데, 온 마을 부녀자들이 모두 친척을 잃은 듯이 눈물을 흘리며 10리까지 따라가 한낮이 되도록 작별하지 못하였으니, 인심을 얻음이 이와 같았다. 자손에게 학문을 권장하기를 매우 지극하여 현숙(賢淑)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랐고 장난치거나 잡담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매우 엄히 경계하였다.(매우 경계하고 금지하였다. "切戒禁之") 명촌(明村) 황 처사(黃處士)와 관수재(觀水齋) 박 선생(朴先生)은 모두 소자(小子)의 어릴 적 사장(師長)인데 철마다 이분들에게 문후하는 것을 빠뜨림이 없게 하였다. 민속 명절이 되어 한가하게 노니는 날이면 번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한가한 날을 만났는데 어찌 아무개 어른을 찾아뵙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을 아이들을 따라 세시풍속 놀이를 할까 염려해서였다. 소자가 14세 때 과장(科場)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느질하는 도구를 사서 바치자, 선비(先妣)께서 이르기를 "행탁(行橐)에 여유가 있으면 마땅히 서책을 구입할 것이지 바느질하는 물건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면서 호되게 꾸짖으셨다. 중년 이후로 여러 차례 이사하고 자주 혼사를 치르느라 가세가 점점 기울었지만 여유가 있게 처신하였고 남에게 집안의 옹색한 형편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별도로 약간의 물품을 마련해 두었다가 소자(小子)가 과거를 보러 가는 때나 사우(師友)를 따라 멀리 유람하러 가는 길에는 번번이 힘을 보태 권유하여 보내서 경비가 부족하여 곤란을 겪는 근심이 없게 하였다. 생활비를 다 써 버렸다고 할 때에는 못 들은 척하였으나 종이와 먹이 부족하다고 할 때에는 그때마다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셨다. 소자를 따라온 객이 있으면 반드시 얼굴에 기쁜 기색이 드러나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에게 타일러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게 하였다. 소자에게 손님을 만류하도록 하고 그가 떠나갈 적에는 노잣돈을 주어서 보내게 하였다. 향리(鄕里)에 조문할 곳이 있으면 반드시 부의(賻儀)를 갖추어 가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인사는 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소자가 다른 곳에서 돌아오면 "어찌 늦게 돌아왔는가."라고 하시고, 사문(師門)에서 돌아오면 "어찌 빨리 왔는가."라고 하셨다. 소자가 혹시라도 집안일을 하면 반드시 대신 그 일을 하시고는 서숙(書塾)에 가도록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지나치게 마음을 다른 곳에 두는가."라고 하셨다. 부인은 아들 셋을 낳았지만 생존한 자식은 불초 소생뿐이었으니, 애정이 지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입이 짧은 것을 근심하여 생선과 육류 등의 음식을 날마다 보내주셨고, 혈기(血氣)가 허한 것을 근심하여 막걸리를 날마다 마시게 하였다. 제사가 임박하여 장차 치제(致齊)하려고 할 때면 전혀 참견하시지 않았지만 소자가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의사가 있으면 통렬하게 꾸짖으셨다. 매달 초하루 참알(參謁)하는 때 혹 초하루인지 잊어버리면 번번이 알려주시어 "오늘 삭조(朔朝)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만약 손님과 함께 앉아 있어 알리기 어려울 때면 도포(道袍)를 보내어서 깨우쳐 주셨다. 소자가 처음에 두 자식들을 두었으니 상묵(尙黙)과 상돈(尙敦)이었다. 한 아이에게는 유학을 공부하게 하고 한 아이에게는 농사짓게 하고자 하니, 선비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하고 부귀한 것은 명(命)에 달려 있는 것이니 유학이나 농사와는 상관이 없다. 설령 농사지어 부유하더라도 유학을 하여 가난한 것만 못하고, 무식하여 호의호식하는 것이 유식하여 악의악식(惡衣惡食)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흉년이 들었을 때 손자들이 물고기 잡고 나물 캐는 것을 일삼자 선비께서 그들이 학문을 그만둘까 근심하여 조금 한가한 틈이 있으면 번번이 불러서 책을 읽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완전히 그만두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소 글 읽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셨다. 혹 병중(病中)이나 조석으로 일이 없을 때 아이들로 하여금 모시고 글을 읽게 하면 번번이 즐겁게 들으셨다. 늘 소자를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가난하다고 하여 딴마음을 먹지 말고 오직 독서하고 자신을 단속하여 훌륭한 자손이 되려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죄를 짓지 말라. 죄를 지으면 남들은 알지 못하더라도 하늘이 내리는 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너는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정축년(1877, 고종14) 6월 4일에 졸하였다. 8월 27일 기유(己酉)일에 장현(章峴)에 장사 지내고, 10년 뒤 병술년(1886, 고종23) 봄에 고묵곡(古墨谷) 손좌(巽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아, 선비는 자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였으며, 규중의 위의가 정숙하여 비속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매우 곤궁하고 힘들더라도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매우 노쇠하더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며 온화하고 양순하여 부덕(婦德)을 겸비하였으니, 옛날의 숙원(淑媛)에 견주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아, 형편없는 불초 소생은 30년 동안 슬하에 있으면서 일찍이 조금도 지물(志物)의 봉양주 6)을 한 적이 없다. 지금 또 백발이 성성한 늙은 나이인데도 끝내 이룬 것이 없으니, 불효한 죄는 만번 죽더라도 속죄할 수 없다. 오직 끊어질 듯한 실낱같은 목숨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어찌 지하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겠는가. 천지를 우러러 보고 굽어봄에 지극히 애통한 마음이 끝이 없다. 모두 3남 7녀를 두었다. 장녀는 광산(光山) 이병성(李秉誠)에게 시집갔고, 장남 한룡(翰龍)은 지행(至行)이 있었는데 8세에 요절하였다. 둘째 아들은 바로 불초 소생이다. 둘째 딸은 공주(公州) 이광무(李光茂)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청도(淸道) 김장석(金章錫)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요절하였고, 다섯째 딸은 풍산(豐山) 홍승명(洪承命)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은 상림(祥林)으로 5세에 요절하였다. 여섯째 딸과 일곱째 딸은 요절하였다. 겨우 1남 4녀만 성장하였다. 네 딸은 시집가서 모두 조신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소문났으니, 사람들이 선비(先妣)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주석 6)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先妣孺人朴氏行狀
先妣朴氏。貫珍原。葦南熙中后。曾祖萬烈。祖貴玄。考致聖。妣仁川李氏泰邦女。以純祖己卯。生于長興葛嶺里。卽朴氏世居地也。未省事。失所恃。纔省事。失所怙。鞠於從女兄。兄卽適於文氏而早寡者也。性嚴正。其寡居。刀劒不離於寢側。門鎖藩障。極其戒勅。雖親族在比隣。非有故未嘗往之。其衛身之嚴如此。見我先妣之早孤。甚加哀矜。撫養敎誨。務盡其心。先妣年十七于歸。時先考僑寓德洞。生理甚疎。先妣以沖齡當室。凡百幹理。無異老成。行未幾年。家力稍舒。事君子甚得婦道。無一事擅爲。無一言違異。遇前室忌日。備盡誠意。撫前室所生如己出。及適人。雖婿郞外孫。待之無間。族戚隣里。恩意周徧。皆得其心。衣服儉而潔。器用質而完。有所敝缺。隨手補治。一衣一襪。十年不易。而至於周恤匱乏。務從寬厚。無所係吝。嘗恨親家無嗣。令親族一人主祀守墓。而恩愛眷恤。終始彌篤。從子婦梁氏早寡無育。甚加哀憐。分給田地。資其生計。丙辰冬。自德洞移品坪。一村婦女。莫不號泣如失親戚。追至十里。至日中而不能別。其得人心如此。敎子孫勸學甚至。而欲其親近賢淑。至於遊戱喧雜之地。切戒禁之。明村黃處士觀水齋朴先生。皆小子幼時師長也。時節問候。勉令無闕。當俗節遊閑之日。輒曰。迨此暇矣。何不往謁某丈也。蓋恐其從村兒作俗節戲也。小子十四歲。自科場還。買針線之具獻之。先妣曰。行橐有餘。當買書冊。針線之物。何關於汝。責之不已。中年以來。累度搬移。頻經昏嫁。家力至於不贍。而處之裕如。未嘗對人言窘艱之狀。別蓄若干物。每當小子赴擧之日及從師友遠遊之行。則輒助其方而勸送之。俾無拘費難行之患。至若家用告罄。若不聞焉。紙墨告乏。輒副其急。有客從小子至。必喜形于色。戒廚人善其供具。戒小子使之挽留。其發也。具行贐使送之。鄕里有問弔處。必具賻儀。命行之曰。人事不可廢也。小子自他處還則曰。何其遲也。自師門還則曰。何其速也。小子或親家務。必代執其勞。而命之書塾曰。何其外馳之過也。夫人男子三人。所存惟不肖。其慈愛可謂至矣。憂食性之短。而魚肉之羞。日以饋之憂血氣之虛。而酒醪之物。日以飮之。至於臨祭而將致齊焉。則絶不與之。小子有欲食之意。痛責之。當月朔參謁之時而或忘其爲朔日。則輒告之曰。今日非朔朝耶。若與客倂坐而難於告之。則持送道袍以喩之。小子初有二息。曰尙黙尙敦。欲令一兒業儒一兒業農。先妣曰。貧富有命。無關儒農。設令農而富。不若儒而貧。無識而美衣美食。不若有識而惡衣惡食。丙子歲饑。諸孫以漁採爲業。先妣憂其廢學。稍有暇隙。輒招而使讀之曰。如此者其不愈於全廢乎。平日好聽讀書聲。或在病中及晨昏無事之時。使兒輩侍而讀之。輒欣然聽之。嘗戒小子曰。勿以貧窶貳其志。惟讀書勅躬。無失爲佳子孫。是吾願也。又曰。罪不可作。作罪則人雖不知。天可逃乎。汝其勉之。丁丑六月四日卒。八月二十七日己酉。葬于章峴。後十年丙戌春。移葬于古墨谷巽坐原。嗚乎。先妣天姿溫仁。閫儀貞靜。口不出鄙俗之言。身不接奢麗之物。雖困苦之極而不見有怨懟之色。雖衰老之甚而不見有怠弛之氣。從容和順。婦德備摯。視諸古之淑媛。可以無愧矣。嗚乎。不肖無狀。在膝下三十餘年。曾未有一分志物之養。今且白首頹齡。而迄未有成。不孝之罪。萬死莫追。惟是一縷溘然。行在不遠。而何以見慈顔於地下乎。俯仰天地。至痛罔極。擧三男七女。一女適光山李秉誠。一男翰龍。有至行。八歲而夭。二男卽不肖也。二女適公州李光茂。三女適淸道金章錫。四女夭。五女適豐山洪承命。三男祥林。五歲而夭。六女七女夭。成長僅一男四女。四女適人。皆以謹勤聞。人以爲有先妣之風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