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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선고 부호군 부군 행장(先考副護軍府君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03
선고 부호군 부군 행장
부군(府君)의 휘는 제현(濟玄), 자는 명서(命瑞)이다. 정씨(鄭氏)의 관향은 광주(光州)이니, 고려(高麗) 말기에 찬성사(贊成事) 휘 신호(臣扈)가 비조(鼻祖)이다. 7대를 전하여 휘 태(態)에 이르렀으니,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규(應奎)를 낳았으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으니,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모두 현조(顯祖)이다. 증조의 휘는 이도(履道), 조부의 휘는 채(埰), 선고(先考)의 휘는 가석(加錫), 선비(先妣)는 광산 이씨(光山李氏) 덕광(德光)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계해년(1803, 순조3) 5월 6일에 강진(康津) 월산(月山)의 우거하던 집에서 부군을 낳았다. 을해년(1815, 순조15)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병자년(1816, 순조16)에 현(縣)의 구상리(九祥里)에 우거하였다. 신사년(1821, 순조21)에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를 맞아들였으니, 춘채(春采)의 따님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무자년(1828, 순조28)에 어버이의 명으로 능주(綾州) 망방산(望防山)에 우거하였으니, 이는 소요를 피하여 먼저 조치를 취한 것이다. 경인년(1830, 순조30)에 주(州)의 대덕동(大德洞)으로 이사하였다. 갑오년(1834, 순조34)에 이씨(李氏)가 졸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에 다시 진원 박씨(珍原朴氏) 치성(致聖)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주 5)의 후손이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정미년(1847, 헌종13)에 백씨(伯氏)와 계씨(季氏)가 강진(康津)에서 주(州)의 묵계리(墨溪里)로 와서 우거하였다. 병진년(1856, 철종7)에 대덕동(大德洞)에서 품평리(品坪里)로 이사하였다. 정묘년(1867, 고종4)에 묵계리로 이사하였으니, 백씨, 계씨와 함께 만년에 서로 의지하면서 지낼 계획이었다. 무진년(1868, 고종5)에 불초 소생을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업하게 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백씨(伯氏)가 졸하였다. 정축년(1877, 고종14)에 박씨(朴氏)의 상을 당했다. 신사년(1881, 고종18)에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부직(付職)되었다. 계미년(1883, 고종20) 2월 2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4월 2일에 묵계리 화수치(火手峙) 미향(未向)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부군은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여 매우 지극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마음가짐이 성실하였으며 몸가짐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남과 담소를 나누는 경우가 적었고, 일을 만나면 꾸밈이 없었다. 집에 있을 적에는 한가롭게 상량(商量)하는 일이 적었고, 박에 나가서는 한가롭게 벗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았다. 무릇 세간의 바둑, 술자리, 질펀하게 노는 오락에는 한 번이라도 눈길을 둔 적이 없었고, 경박하고 괴이하며 남을 속이거나 허황된 말에는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으며, 이익을 꾀하고 영화를 탐하거나 아첨하고 청탁하는 자리에는 일찍이 한발 자국도 나아간 적이 없었다. 중년에 한번 한양에 가서 성곽, 궁궐, 산천 지리, 인물 풍속을 두루 보고 돌아왔다. 어버이를 떠나 밖에 거처한 적이 있는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빠뜨리지 않고 부모님을 뵈었다.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먼저 먹은 적이 없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백씨(伯氏)를 또한 어버이처럼 섬겼다. 만년에 한마을에서 세 형제가 함께 살았는데 나이가 모두 80세였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데도 함께 자고 마주 앉아 종일토록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은 생업이 있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비가 되어 끝내 내세울 만한 공이 없고, 농부가 되어 끝내 의뢰할 만한 재물이 없다면 이는 기물(棄物)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매우 독실하게 자식을 가르쳐 일찍이 다른 일로 학업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 평소 숙흥야매(夙興夜寐)하면서 종일 부지런하여 일찍이 나태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또한 편안하고 한가롭게 보내는 때가 없었다. 불초 소생이 매번 아침 문안을 여쭐 적에 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지 누워 계신 것을 보지 못했다. 하루는 선친께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자 하여 매우 일찍 갔지만 이미 엄연히 일어나 앉아 계셨으니, 40년 동안 슬하에 있으면서 하루라도 늦게 일어나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평생 각고의 노력으로 분발하고 진작하였기에 가계(家計)를 수립하여 가운(家運)이 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첫째 아들은 한룡(翰龍)이고, 셋째 아들은 상림(祥林)인데 재주가 매우 영특하여 크게 될 가망이 없지 않았지만 모두 요절하였다. 오직 불초 소생만 남아 있는데 지금 노년이 된 나이에 낡은 습관을 따르고 나태하여 당시 아버지께서 바라던 뜻에 조금도 부응하지 못하였으니, 이 한 몸의 죄를 천지간에 어찌 용납하겠는가. 너무나도 죄송스럽고 죄송스럽다. 바라건대, 세상의 군자는 혹 가련하게 여겨서 그 자식이 불초하다는 이유로 그 아버지의 훌륭한 명성까지 폐하지 않기를 실로 바라 마지않는다.
주석 5)박희중(朴熙中)
1364-1446. 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박첨(朴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홍서(朴洪瑞)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박온(朴溫)이다. 생원으로 1401년(태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 《海東筆苑》에 오를 정도로 명필이었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先考副護軍府君行狀
府君諱濟玄。字命瑞。鄭氏系出光州。麗末贊成事諱臣扈。其鼻祖也。七傳至諱態官弘文應敎。是生諱應奎。官節度使。是生諱演。副司直贈戶曹判書。皆其顯祖也。曾祖諱履道。祖諱埰。考諱加錫。妣光山李氏德光女。以純廟癸亥五月六日。生府君于康津月山寓舍。乙亥丁內艱。丙子僑寓顯之九祥里。辛巳聘夫人全州李氏春采女。孝寧大君補后。戊子以親命寓居綾州望防山中。蓋避擾先着也。庚寅移州之大德洞。甲午李氏卒。乙未繼娶珍原朴氏致聖女。葦南熙中后。甲辰丁外艱。丁未伯氏季氏自康津來寓州之墨溪里。丙辰自大德洞移品坪里。丁卯移墨溪。從伯季爲晩年相依計也。戊辰命不肖受業于蘆沙奇先生之門。丙子伯氏卒。丁丑朴氏喪。辛巳壽陞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癸未二月二十五日考終。享年八十一。四月二日葬于墨溪之火手峙負未之原。嗚乎。府君天性至孝。生長艱難。備經百故。而盡心盡力。備極忠養。立心忠慤。持身勤儉。與人罕笑語。遇事無表襮。居家少閒商量。處世少閒追逐。非其力不食。非其義不顧。凡世間局戱酒致曠蕩流連之娛。未嘗一寓目焉。浮靡乖僻欺誣狂誕之說。未嘗一傾耳焉。聲利繁華趨附造請之地。未嘗一濡跡焉。中年一赴漢師。周見城郭宮室山川道里風土人物而歸。嘗離親寓外。雖相距迃遠。每月朔月望。省覲無闕。有新味。未嘗先食。親歿後。事伯氏。亦如之。晩年同住一巷三昆季。年皆八十。華顔白髮。連床對榻。終日竟夕。笑語怡怡。嘗言人貴有業。業貴有成。爲士而終無可述之功。爲農而終無可賴之資。則是棄物也。是以敎子甚篤。未嘗以他業間之。平居夙興夜寐。終日孜孜。未嘗有懈怠之色。亦未嘗有暇豫之時。不肖每晨省。常見其坐而未見其臥。一日欲先府君起。早早而往。已儼然起坐矣。在膝下四十年。未嘗見其有一朝之晏起也。平生刻勵勤苦。抖擻拮据。至於樹立家計。家運不競。一男翰龍三男祥林。才性通曉。不無可望。而皆至夭折。惟不肖是在。年紀暮大。因循荒怠。未副當日一分之志。此身罪戾。天地安容。痛死痛死。惟世之君子。或爲之哀憐。不以其子之不肖而倂廢其親之令名歟。實有望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