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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조고 통정대부 부군 행장(祖考通政大夫府君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01
조고 통정대부 부군 행장
공의 휘는 가석(加錫), 자는 유경(裕卿), 또 다른 휘는 언복(彦福), 자는 자구(自求)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니, 고려(高麗) 말기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휘 신호(臣扈)가 비조(鼻祖)이다. 7대를 전하여 휘 태(態)가 있었는데,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규(應奎)를 낳았으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으니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판서의 5대손 가운데 휘 만철(萬喆)이 있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는 유(瑜)이고, 조부는 이도(履道)이고, 선고(先考)는 채(埰)이며, 선비(先妣)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이택(爾宅)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영조(英祖)) 갑신년(1764, 영조40) 11월 8일에 낭주(朗州)의 우거하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장수 황씨(長水黃氏) 익채(翼采)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가 다시 김해 김씨(金海金氏)에게 장가들었지만 모두 자식을 낳지 못했다. 다시 광산 이씨(光山李氏) 덕광(德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중년에 낭주(朗州)에서 금릉(金陵)으로 옮겨 우거하였다. 정미년(1787, 정조11)에 부친상을 당했고, 무신년(1788)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객지에 떠돌아다녀 외롭고 고달픈 몸 의지할 곳이 없었으니, 자신의 신세가 몹시 처량하여 길을 가다가 눈물을 흘렸다. 공은 질박하고 성실하여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고 사람을 응대하며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일을 처리할 때 조금이라도 꾸미거나 자랑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여 성품이 부지런하며 농사일에 힘을 다하였고, 권세와 이익, 화려한 명성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자손을 가르치고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릴 적에 일을 분담시키고 맡겼으며주 1)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워서 성공하기를 책면(策免)하였다. 집안의 많은 어려움을 만나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돌아와 성현의 모훈(謨訓)과 고금의 사적에 대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자세히 살펴보아 그 의리의 지취를 넓혔다. 부인 이씨(李氏)는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인의 도덕과 규범에 대해서 빠뜨림이 없었다. 을해년(1815, 순조15) 7월 11일에 이씨가 졸하였다. 갑진년(1844, 헌종10) 9월 27일에 공이 졸하니, 향년 81세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성산(星山)에 장사 지냈다가 능주(綾州) 어시랑(御侍郞) 안산(案山)의 인좌(寅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모두 3남 1녀를 두었으니 이씨의 소생이다. 첫째 아들은 제철(濟哲)이고, 차례로 제현(濟玄)과 제일(濟馹)이며, 딸은 황상현(黃祥顯)에게 시집갔다. 장방(長旁)의 아들은 종림(宗林)·창림(昌林)·동림(東林)·희림(熙林)이고, 딸은 곽종협(郭宗協)·윤자승(尹滋升)에게 시집갔다. 차방(次旁)의 아들은 의림(義林)이고, 딸은 안모(安模)·이병성(李秉誠)·이광무(李光茂)·김장석(金章錫)·홍승명(洪承命)에게 시집갔다. 삼방(三旁)의 아들은 항림(恒林)이고, 딸은 김규원(金奎源)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손자 정의림(鄭義林)은 삼가 기술한다.
주석 1)맡겼으며
일을 맡긴다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주관하는 일과 비상시의 일을 말한다. 《常變通攷 卷3 居家雜儀》
祖考通政大夫府君行狀
公諱加錫。字裕卿。一諱彦福。字自求。系出光州。麗末贊成事諱臣扈。爲鼻祖。七傳有諱態。弘文應敎。是生諱應奎。節度使。是生諱演。贈戶曹判書。判書五世有諱萬喆。卽公之高祖也。曾祖瑜。祖履道。考埰。妣天安全氏爾宅女。英宗甲申十一月八日。生公于朗州寓第。娶長水黃氏翼采女。系娶金海金氏。皆無育。系娶光山李氏德光女。中年自朗州寓居金陵地。丁未丁外艱。戊申丁內艱。流離客土。孤苦無依。其情景懇惻。行路涕零。公質實誠慤。行已酬人。接物處事。未嘗有一毫修飾表襮底意。生長艱難。性勤稼穡。而於勢利聲華。泊如也。敎子孫御家衆。分之以職。授之以事。而嚴立課程。責其成功。遭家多難。辛勤來歸。而於聖賢謨訓。古今事迹。隨暇考閱。以博其義理之趣。夫人李氏溫仁勤儉。閫範無闕。乙亥七月十一日李氏卒。甲辰九月二十七日公卒。享年八十一。壽陞通政。葬星山。移窆于陵州御侍郞案山負寅之原。擧三男一女。李氏出也。長濟哲。次濟玄濟馹。女黃祥顯。長旁男宗林昌林東林熙林。女郭宗協尹滋升。次旁男義林。女安模李秉誠李光茂金章錫洪承命。三旁男恒林。女金奎源。曾孫以下不錄。孫義林謹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