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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 효자 둔재 안공 묘표(孝子遯齋安公墓表)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2.TXT.0011
효자 둔재 안공 묘표
공의 성은 안씨(安氏), 휘는 달득(達得), 자는 내성(乃成), 호는 둔재(遯齋)로, 순흥(順興) 사람이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가 그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휘 원(瑗)에 이르러 조선 초기에 형조 판서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서원(瑞原)의 별장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휘 세침(世琛)에 이르러 남평현(南平縣)으로 이사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증조는 휘 수린(壽麟), 조부는 휘 영(泳)이다. 부친은 휘가 종복(宗福), 호가 죽림재(竹林齋)이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채경(金彩敬)의 따님인데, 정종(正宗) 정사년(1797, 정조21)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효성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왕왕 지극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 일찍이 어버이가 병을 앓아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 기이한 꿈을 꾸고 이어서 집 정원에서 신약(神藥)을 얻어 이를 달여 올리니 과연 차도가 있었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 슬픔으로 몸을 상한 것이 매우 심하였기에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장사 지낸 다음 묘소의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배곡(拜哭)하되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나무를 베고 돌을 파내어 그가 왕래하는 길을 닦아 주었다.
공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포부가 원대하고 문사는 성대한 명성이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았다.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 가운데 그와 교유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만년에 봉악산(鳳嶽山) 아래에 초당을 짓고 한가롭게 노닐며 노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기둥에 바람이 불고 창엔 달빛 비치며, 수죽(水竹)이 뜰에 가득하여 한가롭게 시를 읊조리며 유연(悠然)히 속진(俗塵)을 벗어난 의표가 있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갑술년(1874, 고종11) 1월 2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죽곡면(竹谷面) 팔룡동(八龍洞) 봉악산(鳳嶽山) 동쪽 산기슭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도경(朴道敬)의 따님이다. 2남을 낳았는데, 장자는 평일(平一), 차자는 평길(平吉)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효라는 것은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으뜸이니, 큰 근본이 확립되면 만인에게 미루어 확대할 수 있다. 공은 효순(孝順)한 덕에 보은을 받아 장수하는 복을 받았는데, 안으로는 자제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종친들이 그 은혜에 감동하였으며, 밖으로는 벗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고 향리 사람들이 그 기풍을 칭송하였으니, 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오늘 후손이 그 뜻을 계승하기를 생각하고 선조를 더럽히지 않는 터전으로 삼는 것 또한 어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원하건대 안씨(安氏)는 힘쓸지어다.
증손 동식(東稙)이 나에게 묘도(墓道)에 기록할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삼가 전하는 유적(遺蹟)에 근거하여 글을 첨삭하여 다듬었을 따름이다.
孝子遯齋安公墓表
公姓安氏。諱達得。字乃成。號遯齋。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中系顯祖也。至諱瑗。當我朝初。以刑曹判書累徵不起。居瑞原別墅以卒。至諱世琛。移寓于南平縣。子孫因居焉。曾祖諱壽麟。祖諱泳。考諱宗福號竹林齋。贈左承旨。妣光山金氏彩敬女。以正宗丁巳生公。公性孝根天。自幼往往以至行聞於人。嘗有親癠。久而彌留一夕感異夢因得神藥於家園供而進之果見差愈。執喪哀毁過甚。見者釀涕。及葬。廬于墓側。晨昏拜哭。三年如一日。里人感之。爲之伐木鑿石。以修其來往之路。公涉獵百家。抱負贍富。文詞聲華。擅望於時。一時知名之士。無不與之結交。晩營邁軸於鳳獄山下。爲養閒終老計。風楹月戶。水竹滿庭。婆娑嘯詠。悠然有出塵之標。壽陞同中樞。甲戌正月二日卒。葬竹谷面八龍洞鳳嶽山東麓庚坐原。配密陽朴氏道敬女。生二男。長平一。次平吉。孫以下不盡錄。嗚呼。孝者百行之本。萬善之長。大本旣立。萬目可推。公服孝順之德。膺難老之福。內而子弟遵其敎。宗族感其恩。外而朋友服其義。鄕里頌其風。此豈無所自而然哉。然則今日後嗣之所以思述其志而爲無忝之地者。亦豈有以外於此者乎。願安氏勉之哉。曾孫東稙。謁余文以表墓道。余謹据所傳遺蹟爲修潤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