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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 숙암 안공 묘표(淑庵安公墓表)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2.TXT.0009
숙암 안공 묘표
영평(永平) 욱곡면(郁谷面) 반암(盤巖)의 서쪽 기슭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이는 숙암(淑庵) 안공(安公)이 편히 잠든 곳이다. 공의 휘는 후걸(厚傑), 자는 후평(厚平)이다. 안씨(安氏)는 계보가 순흥(順興)에서 나왔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가 그 현조(顯祖)이다. 우뚝한 공훈과 높은 관작이 대대로 찬란하였다. 휘 원(瑗)에 이르러 조선이 개국할 때 여러 번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으며, 서원(瑞原)의 별장에 거처하다 생을 마쳤다. 휘 세침(世琛)에 이르러 남평현(南平縣)에 우거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는 휘 몽성(夢省)이고, 부친은 휘 경룡(競龍)이다. 모친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아무개의 따님인데, 효종(孝宗) 경인년(1650, 효종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천품이 영특하여 범상한 사람과 달랐다. 효성과 우애, 문학으로 젊어서 이름이 났다.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선생이 많은 기대를 하여 손수 "안자와 맹자는 봄처럼 온화하고 가을처럼 준엄하였다.[顔子孟子春生秋殺]"라는 여덟 자의 큰 글씨를 써 주었다. 또 문답을 주고받은 약간의 편지가 있다. 동문인 권 수암(權遂庵), 김 농암(金農巖), 이 한포재(李寒圃齊) 등 여러 명망가와 도의로 사귀어 교유하고 강론하여 노년에도 폐하지 않았다. 선생이 제주(濟州)로 귀양 갈 적에 박손재 광일(朴遜齋光一), 박안촌 광후(朴安村光後) 제공과 더불어 전별하였는데 강진(康津)의 만덕사(晩德寺)에 이르는 여러 날 동안 배종(陪從)하였고, 선생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본 뒤에 돌아왔다. 이로부터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교유를 끊고, 오직 시서(詩書)와 서책을 보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다.
숙종(肅宗) 경자년(1720, 숙종46) 11월 24일에 별세하였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선무원종공신(宣務原從功臣) 정일생(鄭鎰生)의 따님이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장자는 사립(士立), 차자는 두칠(斗七), 두생(斗生)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먼 시골의 일개 포의(布衣)로 한적한 곳에서 은거하였는데 당시 석덕(碩德), 홍유(鴻儒), 명공(名公), 거경(鉅卿)이 서로 추중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수창한 것이 마치 훈지(壎箎)와 같았으니, 이 어찌 취할 것이 없는데 그러하였겠는가. 여기에서 공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시대와 어긋나 산림에 은거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평소 뜻과 사업을 당시에 시험해 보지 못했으니, 식자들의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 뒤에 후손들이 영락하여 유풍(遺風)과 남겨진 훌륭한 말씀이 막혀서 드러나지 못하고 전하는 실제의 자취도 육정(六丁)주 67)이 가져감을 면치 못하여 보존된 것이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니, 더욱 한스러워할 만하다. 8세손 상익(相翊)과 동식(東植)이 유적(遺蹟)을 가지고 와서 묘표의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옛 감회에 잠겨서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67)육정(六丁)
도교(道敎)의 이른바 정묘(丁卯)ㆍ정사(丁巳)ㆍ정미(丁未)ㆍ정유(丁酉)ㆍ정해(丁亥)ㆍ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다. 도사(道士)의 경우 부록(符籙)을 사용하여 이들을 불러서 부릴 수가 있는데, 이 귀신을 잘 부리면 먼 데 있는 물건도 가져오게 할 수 있고 일의 길흉도 미리 알 수 있다고 한다. 《後漢書 卷50 梁節王暢列傳》
淑庵安公墓表
永平郁谷面盤巖之西麓。有崇四尺而坐酉向卯者。是淑庵安公妥藏之所也。公諱厚傑。字厚平。安氏系出順興。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顯祖也。嵬勳達爵。世代煒燁。至諱瑗。我朝革命之際。累徵不起。居瑞原別墅以卒。至諱世琛。寓居南平縣。子孫仍家焉。卽公之曾祖也。祖諱夢省。考諱競龍。妣星山李氏某女。以孝宗庚寅生。公天稟潁悟。異於凡常。孝友文學。早歲著稱。師事尤庵宋先生。先生期詡甚重。手書顔子孟子春生秋殺八大字以贈之。又有答問往復若干篇。與同門人權遂庵金農巖李寒圃齋諸名勝。爲道義交。遊從講磨。老而不替。及先生謫于濟州也。與朴遜齋光一朴安村光後諸公。餞至康津之晩德寺。累日陪從。見先生渡海而後歸。自是杜門斂迹。絶遊息交。惟以詩書文籍爲餘日計。肅宗庚子十一月二十四日考終。官同中樞。配河東鄭氏宣務原從功臣鎰生女。墓合祔。擧三男。長士立。次斗七斗生。孫以下不盡錄。鳴呼。公以遐鄕一布衣。隱於閒寂之濱。而當時之碩德鴻儒名公鉅卿。互相推重。往復酬唱。如壎如箎。此豈無所取而然哉。於此而公之爲公。可以槪矣。然事與時違。沈晦林樊。使平日志業。未見有所試於時。識者之恨爲何如耶。身後數百年。雲仍零替。使遺韻餘馥。鬱而不暢。而所傳實蹟。亦不免爲六丁收去。存者不過十之一。尢可恨也。八世孫相翊東植。奉遺蹟。請爲表墓之文。余以曠感攸激。不忍終辭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