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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 유인 이씨 묘표(孺人李氏墓表)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2.TXT.0008
유인 이씨 묘표
유인(孺人)의 성은 이씨(李氏)로, 관향은 공주(公州)이다.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의 후손이다. 대부(大父)의 휘는 직무(直茂)이고, 부친의 휘는 병희(秉禧)이다. 모친은 곡부 공씨(曲阜孔氏)로, 계로(啓魯)의 따님인데, 철종(哲宗) 병진년(1856, 철종7)에 능주(綾州)의 예암리(禮巖里)에서 유인을 낳았다.
자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드러웠으니,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18세에 사인(士人) 김권일(金權一)에게 시집왔다. 시부모님를 섬길 적에 공손하고 순종하는 예도를 다하였으며, 행동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오직 명하신 대로 하였다.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동온하청(冬溫夏凊)의 예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반드시 조심하여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평상시에 말수가 적고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떠들썩한 소리는 규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사치품은 문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미신을 믿지 않았으며, 성품이 길쌈하는 데 부지런하여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선대의 기일이 다가오면 미리 재계하고 정결하게 하였다. 내외 친족과 향리의 노소에 대해서까지 안부를 묻고 구휼하는 것을 때에 따라 행하고 폐하지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절약하여 조금의 은혜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두루 베풀었다.
일찍이 밤에 소를 잃은 적이 있는데 집안사람들이 찾고자 하니, 유인(孺人)이 말하기를 "도적이 막다른 길에 있게 되면 어찌 헤아리지 못할 화가 없으리라고 장담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그만두게 하였다. 자식을 가르칠 적에는 늘 어진 벗과 교유하게 하였고, 무릇 불량한 사람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말게 하였다. 일찍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정도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멀리하는 것은 집안의 자제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더구나 온갖 사설(邪說)이 난무하는 말세에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 잘 지내며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게 하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이다. 어찌 사람의 도리를 버리고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느 날 몸져눕게 되자 네 아들을 불러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의 형제는 우애롭게 지내며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실추시키지 말라."라고 하였다. 막내아들을 가리키며 세 아들에게 말하기를 "부모가 없다고 하여 막내를 너무 아껴 가르치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으니, 때는 정미년(1907, 순종1) 12월 11일이었다. 향년 52세이다. 장사 지낸 뒤에 어은동(漁隱洞) 진사공(進士公) 묘소 아래 간좌(艮坐)에 이장하였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봉희(鳳熙), 학희(鶴熙), 용희(龍熙), 인희(麟熙)이고, 딸은 장흥(長興) 임태주(任泰柱)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용희는 나와 교유하였는데, 어느 날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평소 익숙하게 아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지금 어른께서 이웃에 산 지 오래되었으니, 저의 돌아가신 모친의 평소 행실에 대해서는 응당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돌아가선 모친을 위하여 훌륭한 글을 남길 붓을 잡을 이는 어른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나는 유인이 어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유장에 기록된 글에서 듣지 못했던 말을 더 알게 되었으니, 더욱 공경할 만하다. 다만 정신이 혼미하고 글이 거칠어, 글로는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이는 용희가 마땅히 윤색하는 데 달려 있다.
孺人李氏墓表
孺人姓李氏籍公州。恭肅公諱明德后。大父諱直茂。父諱秉禧。妣曲阜孔氏啓魯女。哲宗丙辰。生孺人于綾之禮。巖里資質溫仁柔嘉。有女士風。十八歸于士人金權一。事舅姑。盡恭順之禮。動作進退。惟命是聽。晨昏定省。冬夏溫淸。必誠必謹。未有闕儀。平居。穻言語寡喜怒。喧囂之聲。不出於閨房。奢麗之物。不入於門庭。不用巫覡之術。性勤紡績。未嘗暇逸。値先世忌諱之辰。宿齋戒致潔。至於族戚內外。鄰里老幼。問訊賙恤。隨時不替。遇饑歲。縮衣節食。而升斗之惠。遍於貧乏。嘗夜失牛。家人欲追之。孺人曰。賊當窮途。安知無不測之禍乎。令止之。敎諸子。常令從賢士友遊。凡浮浪之人。紛競之地。勿令近之。嘗戎之曰。守正遠邪。此是人家子弟最初路頭。況在末世百邪交作之日乎。切宜愼之也。又曰。孝於父母。和於兄弟。睦於族戚。信於朋友。勤於學問。篤於行治。此是人道之當然。安有去人道而可以爲人者乎。一日屬疾。招四子而戒之曰。汝兄弟極其友愛。無墜世業也。指季兒而語三子曰。勿以無父母而愛踰於敎也。言訖而終。時丁未十二月十一日也。享年五十二。葬而移窆于漁隱洞進士公墓下艮坐。生四男一女。鳳熙鶴熙龍熙麟熙。長興任泰柱。孫以下不錄。龍熙從余遊者。一日抱遺狀。示余曰。凡狀人之行。必平素相熟人乃可。令丈人與相接隣。不爲不久。則吾先妣平日之行。想應聞之。然則爲吾先妣。把立言之筆者。非丈人伊誰。嗚呼。余聞孺人之賢。盖巳久矣。而今於狀辭。益聞其所未聞。尤可敬也。但神昏筆澁。辭不能達其意。此則在龍熙之所宜修潤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