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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 계광 처사 진공 묘표(溪狂處士陳公墓表)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2.TXT.0006
계광 처사 진공 묘표
공의 성은 진씨(陳氏), 휘는 석형(錫馨), 자는 윤영(允英), 호는 계광(溪狂)이다. 관향은 여양(驪陽)이다. 고려 때 휘 총후(寵厚)라는 분이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는데, 바로 그 비조(鼻祖)이다. 증조는 휘 성언(聖彦)이고, 조부는 휘 덕리(德履)이다. 부친은 휘 광표(光表)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 정복형(鄭福亨)의 따님인데, 순묘(純廟) 무인년(1818, 순조18) 2월 8일에 능주의 정천리(淨泉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총명하고 영특하여 범상한 사람과는 매우 달랐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이끌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바깥일을 물리치고 문을 닫고 휘장을 내린 채 밤낮으로 공부에 전념하여 오서(五書), 오경(五經)으로부터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섭렵하여 깊게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윽고 같은 고을에 사는 만희재(晩羲齋) 양 상사(梁上舍)에게서 차츰 듣지 못하던 바를 듣고, 차츰 보지 못하던 바를 보고 더욱 학문을 갈고닦아서 채우고 확충하였다. 이에 문사가 찬란하여 거침없고 분방함이 물이 샘솟는 듯 산이 우뚝 솟은 듯하였으니, 비록 급작스럽게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하여 급히 지어주는 상황이라도 물 흐르는 것처럼 민첩하고 빨랐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시를 읊조렸고 붓으로는 멈추지 않고 써 내려갔으니, 옛날 조식(曺植)의 칠보시(七步詩)주 65)나 온정균(溫庭筠)의 팔차(八叉)주 66)도 이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사원(詞苑)의 거벽(巨擘)으로 당대에 재능을 떨치던 자들이 모두 옷깃을 여미고 공에게 선두(先頭)를 양보하며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명망과 명성이 원근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니, 서울의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주군(州郡)의 관찰사 가운데 혹은 편지를 보내 공경하는 뜻을 보이고, 혹은 집으로 찾아와 교유하기를 청하였다.
과장(科場)에 들어갈 때마다 과장에 가득한 응시자들이 가리키면서 서로 말하기를 "아무개 선생이 왔다."라고 하였으며, 붓을 들어 글씨를 쓰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처럼 에워싸곤 하였다. 다만 시대와 어긋나고 운명이 기구하여 주옥같은 시문으로 명성을 떨친 자를 조정에 천거하여 문장의 성률(聲律)을 조화롭게 하여 나라에 영화(榮華)를 보태게 하지 못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의 실망이 어떠하였겠는가. 산재(山齋)와 촌숙(村塾)에서 생도를 가르칠 때 아침에는 부추를, 저녁에는 소금 반찬을 먹으며 궁핍함 속에서 고생을 두루 겪었는데, 오직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소요하고 수창하는 즐거움은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말은 반드시 삼갔으며, 젊은 후생(後生)을 대할 적에는 반드시 옛 선현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적을 인용하여 사람에 따라 일에 따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는 것이 마치 근원이 있는 샘물이 마르지 않는 것과 같았다.
무인년(1878, 고종15) 2월 26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품평촌(品坪村) 뒷산 직동(直洞) 해좌(亥坐)에 있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만환(朴萬煥)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성수(性洙), 차자는 문수(玟洙)이며, 딸은 문영주(文永周)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동윤(東潤)이고, 차방(次房)은 중부(仲父)의 양자로 갔다.
아, 내 어렸을 적에 한묵(翰墨) 사이에서 공을 배종(陪從)하였기에 받은 것이 적지 않았는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득히 옛일이 되었으니, 회상하매 슬픈 마음 매양 감당하지 못하겠다. 지금 동윤이 묘갈명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대해 어찌 차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사양하겠는가.
주석 65)조식(曺植)의 칠보시(七步詩)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조식이 지은 칠보시를 말한다. 조식은 문재(文才)가 뛰어났는데, 이를 시기한 형인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짓게 하고, 만일 짓지 못하면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조식은 과연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연두시(燃豆詩)를 지었다. 《世說新語》
주석 66)온정균(溫庭筠)의 팔차(八叉)
당(唐)나라 온정균은 재주가 민첩하여 부(賦)를 지을 때 팔짱을 끼고 구상하였는데, 여덟 번 팔짱을 끼면 팔운(八韻)을 다 완성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온팔차(溫八叉)로 일컬었다. 《北夢瑣言 卷4 溫李齊名》
溪狂處士陳公墓表
公姓陳氏諱錫馨。字允英。號溪狂。貫驪陽。高麗時。有諱寵厚。封驪陽君。卽其鼻祖也。曾祖諱聖彦。祖諱德履。考諱光表。世有隱德。妣河東鄭氏福亨女。純廟戊寅二月八日。公生于綾之淨泉里。聰明開悟。絶異凡常。就傳上學。不待提飭而孜孜不怠。稍長。益自奮勵。掃却外事。杜門下帷。焚膏繼晷。自五書五經至諸子百家。次第涉躐。無不淹貫。旣而從同鄕晩羲齋梁上舍。益聞所未聞。益見所未見。磨礱淬濯。克長展拓。於是文瀾詞華。淓沛奔放。如水湧而山出。雖在忽卒副急。而敏速如流。口不絶呼。筆不停草。古之曺七步溫八叉。無以過之。詞苑巨擘蜚英一時者。無不斂衽推先。自以爲不可及。聞望聲譽。膾炙遠邇。京洛縉紳。州郡侯伯。或抵書致款。或造門請交。每入試圍。滿場擧子。指而相語曰。某先生來矣。至揮毫行墨。觀者如堵墻焉。但畸於時危於命。使瓊据大聲。未得薦之郊廟協之聲律。以增國家之光。其爲一時之缺望何如耶。山齋村塾敎授生徒。朝薤暮塩。備經窮約。惟是風月文酒逍遙唱酬之樂。綽綽有餘地。平居夙興。衣帶必勅。言語必謹。對後生少年。必引古之嘉言善行。隨人隨事。懇懇誘解。如源泉之不渴也。戊寅二月二十六日卒。墓品坪村後山直洞亥坐。配密陽朴氏萬煥女。擧二男一女。長性洙。次玟洙。女適文永周。長房孫東潤。次房出爲仲父後。嗚呼。余在小少。陪從翰墨間。受賜爲不少矣。而荏苒日月。漠然若先天事。追惟悲慨。每不勝堪。今於東潤碣文之託。豈忍以非其人辭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