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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 증 가선대부 호조 참판 박공 묘표(贈嘉善大夫戶曹參判朴公墓表)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2.TXT.0003
증 가선대부 호조 참판 박공 묘표
면주(綿州) 서망산(西望山) 남쪽 산기슭 부갑(負甲)의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공(朴公)의 의발이 묻힌 곳이다. 공의 이름은 경란(慶欄), 자는 자선(子善)인데, 선묘(宣廟) 신축년(1601, 선조34)에 면주(綿州)의 고절리(高節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다. 대답하고 응대하며 주선하고 수고로움을 다하여 뜻을 받드는 봉양과 물질적인 봉양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여섯 형제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함께 공부하고 함께 잠자며 화목하게 지내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화기애애함을 친족과 향당에까지 확대시켜 두루 화합하고 공경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포부가 컸으니, 당시 저명한 구화(九華) 나공 무춘(羅公茂春)주 64)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와 교유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정사를 어지럽히자 향리에서 문을 닫고 지내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는데, 정권을 장악한 간사한 무리들이 국모를 폐하기를 도모하려 하자, 이에 이익을 탐하고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곳곳에서 선동하였다. 공이 듣고 크게 놀라서 "자식이 만약 부모를 무시하고 신하가 군주를 업신여긴다면, 이는 천하 만고의 막대한 변고이니, 어찌 둥근 머리와 네모진 발을 가지고 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가 마음에 싹틔워 발설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백씨(伯氏) 직장공(直長公) 경록(慶祿), 종형(從兄) 참판공(參判公) 정(侹), 지봉공(芝峯公) 임(任), 승지 임동(林埬), 진사 신유길(辛惟吉), 사인 이시정(李時挺)과 더불어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대의(大義)로 호소하였다. 또 경내 인사 가운데 적신(賊臣)을 추종한 자를 찾아내어 경외(境外)로 쫓아내었다. 이보다 앞서 함평(咸平) 고을원 박정원(朴鼎元)이 흉도(凶徒)를 쫓아내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기까지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혹 이러한 예를 들어 경계하니, 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의리상 해야할 바이니 비록 죽더라도 어찌 회피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당시 의론이 옳다고 여겼다.
현종 갑인년(1674, 현종15)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숙종 갑자년(1684, 숙종10) 10월 28일에 별세하였다.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아, 공은 멀고 외진 지방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가난하게 살았고, 훌륭한 자질이 있었는데, 덕을 숨긴 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삼강오륜, 존망과 굴신(屈伸)에 관계된 분수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만한 위엄이나 윽박지르는 위세를 개의치 않고 앞장섰으니, 의연히 수많은 사람을 대적할 만할 기세가 있었다. 만일 평소 깊이 함양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대의(大義)를 만목(萬目) 가운데에서 드러내고 대방(大防)을 당대에 보존하였으니, 그 공이 어찌 얕겠는가. 당시 조직(趙稷), 정유(鄭維) 같은 제공들이 모두 포의(布衣)로 절개를 드날렸다. 공도 버금가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박씨(朴氏)는 계보가 무안(務安)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국학 전주(國學典酒)인 휘 진승(進昇)이 그 시조이다.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명성이 있었다. 고조 휘 익경(益卿)은 호가 애한정(愛閒亭)인데, 효도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성공 삼문(成公三問), 박공 평년(朴公彭年)과 도의로 교제하였으며, 장릉(莊陵 단종)이 양위(讓位)하자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나중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성(城)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이고, 조부는 휘 언순(彦純)인데, 호조 참의이다. 부친은 휘가 념(恬)이고, 호가 죽헌(竹軒)인데,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에게서 수학하였는데 김하서(金河西), 송규암(宋圭庵), 유미암(柳眉巖) 제현과 동문으로 친하게 지냈다.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모친은 공인(恭人)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정양공(靖襄公) 심귀령(沈龜齡)의 따님이다. 아들 여섯을 낳았으니, 공은 그중 막내이다. 배위(配位)는 고성 김씨(固城金氏)로, 김시의(金始義)의 따님이다. 묘소는 합장하였다. 아들 여섯을 낳았다. 장자인 중길(重吉)은 호가 청검재(淸儉齋)로 가정의 훈계를 잘 계승하였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다음은 효길(孝吉), 숭길(崇吉), 성길(聖吉), 지길(之吉), 진길(眞吉)이니, 모두 유자의 행실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자손이 번성한 것은 어찌 선인이 공덕을 쌓은 보답이 아니겠는가.
후손 기용(淇容)과 안상(顔相)이 한겨울에 발이 부르틀 정도로 고생하면서 멀리서 찾아와 묘표를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형편없는 내가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한 것은 백세토록 전해지는 성운(聲韻)에 감회가 절실하고, 양가 선대의 교분도 모른 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석 64)나공 무춘(羅公茂春)
1580~1619.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구봉(九峯)ㆍ구화(九華)ㆍ기지(耆之)이다.
贈嘉善大夫戶曹參判朴公墓表
綿州西望山南麓負甲之原。有崇四尺。卽故贈嘉善大夫戶曹參判朴公衣履之藏也。公諱慶欄字子善。以宣廟辛丑。生于綿之高節里。幼而岐嶷。至孝根天。唯諾應對。周旋勤勞。凡百志物。無不克備。兄弟六人。友弟純篤。對床連被。怡怡無間。推以至於族戚鄕黨。和敬周至各得其心。勤身力學。抱負贍博。一時知名如九華羅公茂春諸人。皆其從遊也。光海政亂。閉門鄕閭。不赴公車。及群壬當路。謀廢國母。於是嗜利無恥之輩。在在煽動。公聞之大駭。以爲子而無父。臣而無君。此是天下萬古莫大之變。豈圓頭方足戴天履地者之所可萌諸心而出諸口者耶。與其伯氏直長公慶祿。從兄參判公侹。芝峯公任。承旨林埬。進士辛惟吉。士人李時挺。通諭列邑。聲告大義。又探境內人士趨赴賊臣者。逐出境外。先是咸平宰朴鼎元。以斥出凶徒。至被竄謫。人或擧此爲戒。公奮然曰。義所當爲。雖死何避。時論韙之。顯宗甲寅陞通政。肅宗甲子十月二十八日考終。嘉善其追贈也。嗚呼。公生長遐荒。窮約布素。懷瑾握瑜。闇然不露。而於綱常倫理存亡屈伸之分。不知威武之可畏。氣燄之可拍。而挺身出脚。毅然有千萬人可往之氣。如非素養之深。安能乃爾。聾大義於萬目。存大防於一世。其功豈淺淺哉。當時如趙稷鄭維諸公。皆以布衣著節。公亦其流亞一隊人也。曷不偉然。朴氏系出務安。麗朝國學典酒諱進昇。具始祖也。文學仕宦。世代煒燁。高祖諱益卿號愛閒亭。孝除寢郞。與成公三問朴公彭年爲道義交。莊陵遜位。掛冠歸鄕。後贈吏曹參判。曾祖諱城禦侮將軍。祖諱彦純戶曹參議。故諱恬號竹軒。軍資監判官。受學于慕齋金先生。與金河西宋圭庵柳眉巖諸賢。同門友善。乙巳禍作。棄官歸鄕。妣恭人靑松沈氏靖襄公龜齡女。擧六男。公其季也。配固城金氏始義女。墓合祔。育六男。長重吉。號淸儉齋。承襲庭訓。贈左承旨。次孝吉崇吉聖吉之吉眞吉。皆以儒行著聞。孫曾以下。不能殫記。螽斯椒聊。其非積累餘蔭耶。後孫淇容顔相。大冬遠趼。來請表墓之文。余以無狀。不忍牢讓者。以百世聲韻。有切曠感。而兩家先契。又不可以二視之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