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고공 묘표(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高公墓表)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2.TXT.0002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고공 묘표
선덕(先德)이 말하기를 "후덕(厚德)한 사람은 반드시 복록과 장수를 누리지만 복택(福澤)은 사악한 사람에게 내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세상에서 이른바 복을 누렸다는 집안을 살펴보건대 그 선대에서 공덕을 쌓은 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니, 지금 우리 고을 고(故) 지재(止齋) 고공(高公)에게서 또한 볼 수 있다.
공은 빼어나고 영특한 자질로 경전에 힘쓰고 학문을 쌓았으며 마음을 세우고 몸을 삼갔으니, 그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신중하고 성실한 행실과 학문하고 시례(詩禮)를 익힌 풍모는 우뚝이 고을에서 명성이 있었다. 평상시 광채를 숨기고 자취를 감춘 채 시속을 따르지 않아, 득실과 이해에 대해서 아득히 알지 못하는 듯이 하였고, 시비와 훼예(毁譽)에 대해서 묵묵히 듣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오직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만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힘썼다.
이 때문에 부모를 섬길 적에는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형제를 대할 적에는 우애가 아주 넉넉하였으며, 친족을 대할 적에는 은덕과 정의가 두루 퍼졌으며, 벗을 사귈 적에는 신의가 뚜렷이 드러났으며, 생도를 가르칠 적에는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그리하여 안팎으로 원망이 없고 원근에서 한목소리로 서로 칭찬하여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후인이 계승하여 선생의 법도가 없어지지 않았고, 신명(神明)이 도와 복록이 끊기지 않았다. 이에 성대하게 한 고을의 모범적인 가문이 되었고 먼 후대에까지 복록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는 이른바 후덕한 사람은 반드시 복록과 장수를 누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린 바를 살펴보면 그 당시 쌓은 공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휘는 인건(仁建), 자는 사영(士英), 지재(止齋)는 그의 호이다. 고씨(高氏)는 계보가 탐라(耽羅)에서 나왔다. 휘 복림(福林)에 이르러 장택군(長澤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휘 열(悅)은 태종 때 호조 참판을 지냈다. 휘 상덕(尙德)은 지평이고, 휘 자정(自貞)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차관(敬差官)으로 본성(本省)을 순도(巡到)하였다. 휘 신긍(愼矜)은 충순위(忠順衛)로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는 휘 익심(益深)인데, 진사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이고, 증조는 휘 명진(明進)인데, 통덕랑(通德郞)이다. 조부는 휘 현(鉉)인데, 진사이다. 부친은 휘 경리(景离), 호 둔암(遯庵)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조의수(曺義修)의 따님이다. 온후하고 인애하며 곧고 훌륭하였으며 부덕(婦德)을 갖추었다.
공은 인묘(仁廟) 경오년(1630, 인조8)에 태어나 을묘년(1675, 숙종1) 9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46세이다. 나중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제민(金濟民)의 따님인데, 규중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묘소는 능주의 이지촌(鯉池村) 오른쪽 언덕 무좌(戌坐)에 있는데, 공과 상하로 봉분을 조성하였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대기(大器), 차자는 태익(泰益)이다. 장방손(長房孫)은 진모(振謨)이고, 증손은 명복(命復)이다. 차방손(次房孫)은 응성(應星)이고, 증손은 명집(命集), 명윤(命允)이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6세손 진규(鎭圭)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표를 청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해도 되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글을 짓는다.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高公墓表
先德有言曰。厚德必享祿壽。而福澤不降於滛人。嘗以是說而觀世之所謂享福之家。未有不由其父祖積累之力。今於吾鄕故止齋高公。亦可以見矣。公以挺邁開悟之資。劬經積學。立心飭躬。其孝友謹慤之行。學問詩禮之風。偉然有譽於鄕邦間。平居晦光斂迹。不趨時華。於得失利害。漠然若不省也。於是非毁譽。默然若不聞也。惟於素其位而行其義者。勉勉焉如恐不及。是以事父母而愛敬備至。在兄弟而友悌隆洽。處族戚而恩誼流通。交朋友而信義著行。敎生徒而信從日衆。內外無怨。遠近相得。一口稱賞。無有間言。以至來許承襲而典刑不空。神明扶佑而福祿不替。蔚然爲一鄕法家。百年福宅。此非所謂厚德必享祿壽者耶。觀其所享。而當日之積累。盖可知也已。公諱仁建。字士英。止齋其號也。高氏系出耽羅。至諱福林封長澤君。子孫仍貫焉。至諱臣傳。入我朝。官戶曹參議。諱悅太宗朝戶曹參判。諱尙德持平。諱自貞文科。以敬差官巡到本省。諱愼矜忠順衛。卽公之五世祖也。高祖諱益深進士昌陵參奉。曾祖諱明進通德郞。祖諱鉉進士。考諱景离號遯庵。有隱德。妣昌寧曺氏義修女。溫仁貞嘉。婦德甚備。公以仁廟庚午生。乙卯九月十九日卒。享年四十六。後贈承政院左承旨。配光山金氏濟民女。閫儀無闕。有女士風。墓綾之鯉池村右岡戌坐上下封。有二男。長大器。次泰益。長房孫振謨。曾孫命復。次房孫應星。曾孫命集命允。玄孫以下不能盡錄。六世孫鎭圭。抱家狀。來請表墓之文。余以非其人。牢辭不獲。謹據狀而爲之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