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 정헌대부 호군 만은 백공 묘표(正憲大夫大護軍晩隱白公墓表)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표(墓表)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2.TXT.0001
정헌대부 호군 만은 백공 묘표
장흥(長興) 고읍면(古邑面) 하발촌(下鉢村) 뒤 곤좌간향(坤坤艮向)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정헌대부(正憲大夫) 대호군(大護軍) 백공(白公) 휘는 영필(永弼), 자는 경흥(敬興)의 의발이 묻힌 곳이다.
공은 순묘(純廟) 경진년(1820, 순조20)에 태어나 금상(今上) 갑오년(1894, 고종31) 12월 15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94세이다. 타고난 기질과 품성이 온후하고 질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집안이 대대로 너무나 가난하였기에 부지런히 일하여 부모님을 봉양하였는데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마련하여 올렸다. 병간호할 적에는 집 밖에서 기도하고 약을 올리기 전에 먼저 맛보았으며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질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에 흘려 살렸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슬픔이 지나쳐서 몸을 상할 정도였으므로 이웃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비석을 세우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더라도 폐하지 않았다. 4대의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오래 유지할 규정을 만들었다. 또 종가(宗家)를 도와주고 구휼하여 본업을 편안하게 영위하게 하였다.
몇 칸의 가숙(家塾)을 지어 서적을 소장하고 곡식을 축적한 다음 원근의 명사를 널리 초빙하여 모여서 서로 강론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본받는 바가 있게 하였다. 친척과 벗들 가운데 추위에 떠는 자가 있으면 옷을 마련해주고 굶주린 자가 있으면 음식을 주었다. 성품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조금도 인색한 적이 없었다. 흉년에는 번번이 인근의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이 몇인지 헤아려 달마다 일정하게 주고서 다음 해 보리를 수확할 때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살아난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는데, 그 비문에 대략 "100리 땅 안에 공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굶주리는 우리를 살렸으니 많은 사람에게 비석으로 전한다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빌렸다가 갚지 않은 돈이 수백 금이었는데 ,공의 아들이 관아에 보고하여 독촉하고자 하자, 공이 크게 꾸짖기를 "붕우 간에 재물을 융통하는 것은 의리이고,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것은 형편 때문이다. 처음에는 의리와 우의로 사귀다가 끝에 가서 다투어 송사하겠는가."라고 하고는 즉시 그 문서를 가져다가 태워 버렸다.
일찍이 자식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시례(詩禮)는 선비가 늘 행하는 일상의 다반사이니, 이것을 버린다면 마음 쓸 곳이 없어진다. 우리 선대에서는 문학과 관직이 계속 끊이지 않아 향리에서 명문가가 되었다. 만약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지 않아서 대대로 전한 옛 가업을 하루아침에 실추하게 한다면 어찌 선조의 죄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집안일을 제쳐두고 세상일도 물리친 다음 별장 한 칸을 짓고 만은(晩隱)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곳에서 날마다 친족 중의 기로(耆老)들, 향당의 벗들과 더불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유유자적하게 즐기며 애오라지 세월을 보내며 생을 마쳤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높은 품계에 올랐는데 위로 3대의 선조에까지 추증되었다. 아들 4인 가운데 3인이 과적(科籍)에 올랐으니, 영광이 성대하게 빛났다. 하늘이 덕 있는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다.
백씨(白氏)는 관향이 수원(水原)이니, 고려 때 충숙공(忠肅公) 휘 장(莊)이 먼 선조이다. 해성군(海城君) 휘 맹하(孟夏), 정해군(貞海君) 휘 수장(壽長), 술고당(述故堂) 휘 민수(民秀)는 모두 중엽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종택(宗澤)인데, 호조 좌랑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유(瑜)인데, 통덕랑(通德郞)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남현(南鉉)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이효(金利孝)의 따님이다. 공은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윤철(崔允喆)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어 다시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종현(金宗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4남 1녀를 낳았다. 호인(灝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태인(泰寅)이 있고, 규인(珪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지냈다. 우인(禹寅)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딸은 청풍(淸風) 사람 김익천(金益天)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호인이 백발의 노년에 백리 길을 고생하며 찾아와서 묘석(墓石)에 기록할 문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잔약하고 용렬한 내가 실로 감히 부탁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부지런한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대략 보태고 수정하여 짓는다.
正憲大夫大護軍晩隱白公墓表
長興古邑面下鉢村後坤艮原。有崇四尺。卽故正憲大夫大護軍白公諱永弼字敬興之衣履攸藏也。公生於純廟庚辰。卒於今上甲午十二月十五日。享年九十四。天稟溫厚質慤。自幼有至行。聞於人。家世貧甚。服勤就養。備盡甘胹。侍病露禱嘗藥。衣不解帶。疾革。血指得甦。執喪過毁。隣里感涕。葬而樹碣表阡。朔望展省。風雨不廢。營置四世祭田。定爲久遠之規。又助恤宗家。使之安業。立家塾數間。儲書籍蓄粮穀。廣延遠近名士。聚相講磨。使諸子諸孫。有所矜式。親戚知舊。寒者衣之。飢者食之。性好施予。未有少吝。遇飢歲。輒計鄰近村落飢戶眷口。月給有程。至明年麥登而已。所活甚衆。鄕人立碑誦之。其文略曰。地惟百里。公其一人。活我飢戶。萬口碑傳。有人負債未償者。爲數百金。公之子。欲聞官督之。公大責曰。朋友通財。義也。貧而無償勢也。始以義誼相交。終以爭訟相加耶。卽取其券焚之。嘗戒諸子曰。詩禮是士子日用茶飯。舍此則無所用心。我先世文學仕宦。綿延不絶。爲鄕里名家。若不謹其身。不勉其學。使世傳舊物。一朝墜地。則豈非先朝之罪人乎。及其晩年。掃斥家務。屛除外事。修別庄一室。題其顔曰晩隱。日與族戚者老。鄕黨故舊。賦詩行酒。談笑歌詠。優遊娛樂。聊以卒歲。壽陞祟品。上以追贈三世。子男四人。三陞科籍。光榮赫然。天之報施有德。果爲不虛矣。白氏貫水原。麗朝忠肅公諱莊。其遠祖也。海城君諱孟夏。貞海君諱壽長。述故堂諱民秀。皆中葉顯祖也。曾祖宗澤戶曹佐郎。贈司僕寺正。祖諱瑜通德郞。贈左承旨考諱南鉉。贈戶曹參判。妣光山金氏利孝女。公娶全州崔氏允喆女。無育。繼娶金海金氏宗鉉女。生四男一女。曰灝寅武科五衛將。曰泰寅。曰珪寅武科監察。曰禹寅武科宣傳。女曰金益天淸風人。孫以下不錄。灝寅白首衰境。百里重硏。托以識墓之文。余以殘劣。固知不敢承膺。而難孤勤意。謹据狀而略加增裁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