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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경암 정공 묘지명(敬庵鄭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35
경암 정공 묘지명
이릉(爾陵)은 옛날에 문명이 있는 고을이라고 불렀는데, 근고(近古)에 이르러 학문을 탐구하고 도의를 행하는 선비가 여전히 훌륭하게 있었으니 경암(敬庵) 정공(鄭公)과 같은 분이 또한 그런 사람이다. 그 유풍과 남긴 자취는 백여 년이 지났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자못 기억하는 자가 있다. 다만 그 유고(遺稿)는 제 때에 수습하지 못하여 모두 잃어버리고 전하는 것이라곤 남 상사(南上舍)가 지은 추천장 한 통뿐이었다. 그 추천장을 살펴보니 "세대가 내려오면서 풍속이 야박해져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입에 넣는 것을 효라고 하고, 병든 어버이를 위해 다릿살을 베어 먹이는 것을 효라고 하며, 물고기 한 마리를 얻으면 왕상(王祥)의 잉어주 62)라고 하고, 죽순 하나를 얻으면 맹종(孟宗)의 죽순주 63)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의 행실과 하나의 일에 나타난 것을 뽑아내고, 창졸간의 다급한 상황에서 분별해낸 것을 성대하게 효라고 하는 자는 평소 어버이를 봉양한 것을 돌아보면 과연 유감이 없겠는가. 오직 정흠(鄭欽)이 어버이를 섬긴 것이야말로 실로 이른바 평소에 유감이 없다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 부모의 나이가 93세이고, 정흠의 나이도 60세에 이르렀다. 어버이를 섬긴 이후로 다른 곳에서 유숙한 적이 없고,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적에는 한 발짝도 부모 곁을 감히 떠나지 않았다. 무릇 어버이를 모시는 정성과 봉양하는 일에 있어 즐거워하는 표정과 온순한 모습으로 마음과 힘을 다해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하루같이 하였다."라고 하였다.
아, 남공(南公)은 우리 고을의 이름난 진사(進士)이니, 그 말은 믿을 수 있어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큰 솥에 끓인 국은 고기 한 점만 맛보아도 그 전체의 맛을 다 알 수 있으니, 유고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또한 어찌 한스럽겠는가.
또 그 현손 재우(在禹)가 지은 가장(家狀)을 살펴보니, 거기에 "공이 항상 말하기를 '공경하면 온갖 선이 확립되고, 게으르면 온갖 선이 폐해진다. 옛 성인이 사람에게 보인 요체는 '경(敬)'만 한 것이 없고, 후학이 덕(德)에 들어가는 문호 또한 '경'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경암(敬庵)'이란 글자를 써서 재실의 편액으로 걸고 늘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한 조목은 비록 당시 추천장에 실린 내용이 아니지만, 그 지극한 행실과 훌륭한 절조는 '경(敬)'이 아니면 어찌 행할 수 있으랴. 이름을 흠(欽)이라고 하고 자를 경심(敬心)이라 하고 호를 경암(敬庵)이라고 한 것에서 더욱 이 '경(敬)'을 항상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학문은 '경'을 위주로 하고 다스림은 '효'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공이 어떤 사람인지는 여기에서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씨(鄭氏)는 계보가 하동(河東)에서 나왔다.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인 휘 국룡(國龍)이 중시조이다. 7세대 뒤 휘 여해(汝諧)는 호가 둔재(遯齋)이고, 지평(持平)을 지냈으니, 공에게는 7대조가 된다. 고조는 참의에 추증된 휘 천경(天經)이고, 증조는 참의에 추증된 휘 침(忱)이고, 조부는 참판에 추증된 휘 문원(文黿)이다. 부친은 판서를 지낸 휘 인채(仁采)이다. 모친은 칠원 윤씨(漆原尹氏)로, 윤임(尹任)의 따님이다.
공은 경종(景宗) 신축년(1721, 경종1)에 태어나 정종(正宗) 병오년(1786, 정조10) 7월 28일에 졸하였다. 화산(華山) 대방동(大榜洞) 술좌(戌坐)에 장사 지냈으며, 배위(配位)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합장하였다. 김씨는 김명구(金命九)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이 없어 동생 석(錫)의 아들 양문(陽文)을 양자로 삼았다. 두 딸은 각각 문혁룡(文赫龍), 김중신(金重臣)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효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고 孝爲仁本
공경은 몸의 기틀일세. 敬者身基
효도와 공경 曰孝曰敬
간직하니 서로 바탕이 되네. 夾持交資
두봉에서 노닐었고 頭峰杖屢
대방동에 무덤 있네. 榜洞斧堂
뒤미쳐 여운을 생각하매 追想餘韻
지나는 사람 배회하네. 過者彷徨
주석 62)왕상(王祥)의 잉어
왕상이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한다. 《晉書 王祥列傳》
주석 63)맹종(孟宗)의 죽순
맹종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한다.《三國志 吳書 三嗣主傳》
敬庵鄭公墓誌銘
爾陵古稱文明之鄕。至近古。而問學行誼之士。尙彬彬焉。若敬庵鄭公亦其人也。其遺韻餘躅。至百餘年之久。而頗有能記之者。但其遺稿。收不以時。歸於烏有。而所傳只是南上舍所撰剡薦狀一通而已。按狀有曰。世降俗渝。以一指之斷爲孝。以一股之割爲孝。得一魚則謂之王祥之鯉。得一菜則謂之孟宗之筍。摘其一行一事之立辨於倉卒急遽之間而藉藉爲孝者。顧其平日之養親。果無所憾者乎。惟鄭欽之事親。眞所謂無憾於平日者也。其親年九十有三。欽年又至六十矣。親老之後。未嘗經宿於他所。親病之日。不敢離側於跬步。凡諸扶奉之誠。供養之勤。愉色婉容。殫心竭力。自始至終。恒若一日云。嗚呼。南公是吾鄕名進士也。其言足可徵信。而爲不朽於來世矣。全鼎一臠。未爲不知其味。則遺稿散逸。亦何恨焉。又按其玄孫在禹所撰家狀。有曰。公常言敬則萬善立。怠則萬善廢。前聖示人旨訣。莫如敬。後學入德門庭。亦莫如敬。乃書敬庵字。揭于齋顔以常目焉。此一條。雖非當日薦狀中所載者。然其至行偉節。非敬安能做得來耶。名之以欽。字之以敬心。號之以敬庵。尤可見其眷眷於此而不忘也。學問則敬以爲主。行治則孝以爲本。公之爲公。於斯可槪矣。鄭氏系出河東。高麗密直諱國龍。其中祖也。七傳諱汝詣號遯齋官持平。於公爲七世。高祖贈參議諱天經。曾祖贈參議諱忱。祖贈參判諱文黿。考判書諱仁采。妣漆原尹氏任之女。公以景宗辛丑生。正宗丙午七月二十八日卒。葬華山大傍洞戌坐。齊光山金氏祔焉。金氏諱命九女。有婦德。無男。取次弟錫子陽文爲嗣。二女文赫龍金重臣。銘曰。孝爲仁本。敬者身墓。曰孝曰敬。夾持交資。頭峰杖屢。榜洞斧堂。追想餘韻。過者彷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