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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문산재 박군 묘지명(通訓大夫司憲府監察文山齋朴君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34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문산재 박군 묘지명
군의 성은 박씨(朴氏), 휘는 세진(世鎭), 자는 달지(達之), 호는 문산재(文山齋)이다. 밀양(密陽) 사람인데, 신라왕(新羅王) 혁거세(赫居世)가 그 시조이다. 중대에 이르러 휘 울(蔚)이 있는데, 찰방(察訪)을 지냈다. 이분이 맹성(孟誠)을 낳았는데, 첨정(僉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영걸(永傑)을 낳았는데, 부호군(副護軍)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억서(億瑞)를 낳았는데,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지수(枝樹)를 낳았는데, 호가 모봉(茅峰)이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사직(社稷)을 위해 순절(殉節)한 공훈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천주(天柱)를 낳았는데, 호는 회재(悔齋)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행이 있었다. 모친은 노씨(魯氏)인데, 열부(烈婦)의 행실이 있었서 정려(旌閭)를 받았다. 이분이 휘 이소(以素)를 낳았는데, 호가 태암(台庵)이고,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태형(泰馨)을 낳았는데, 호가 월산(月山)이다. 이분이 휘 상욱(尙郁)을 낳았는데, 호가 송계(松溪)이고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필사(必思)를 낳았는데, 호가 도은(道隱)이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군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경표(慶杓)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풍환(豊煥)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재원(在源)인데, 호가 쌍순재(雙筍齋)이고,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진주 형씨(晉州邢氏)인데, 형석찬(邢錫贊)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에 추증된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이찬영(李贊英)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11월 19일에 주(州)의 정천리(淨泉里)에서 군을 낳았다.
군은 천성이 온후하고 자상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집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군이 곁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출입하면서 온 힘을 기울여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해 드리고, 구체(口體)의 봉양을 알맞게 하여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가 병환이 나자 근심스러운 마음과 염려하는 기색으로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으로 흘려 넣었으며,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평상시 자신이 사적으로 소유한 것이 없었고, 재물도 사적으로 축적하지 않았다. 평소 출입할 때에는 오직 어버이가 명하신 대로 따랐으며, 크고 작은 일을 경영할 때는 반드시 여쭈어본 뒤에 행하였다. 자신의 직분을 행하고 나서 여력이 있으면, 글방에 가서 독서하여 과정에 따라 차근차근 해 나갔고, 이를 폐하거나 빠뜨리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을 친족과 향당에까지 확대시켜서 절기마다 안부를 묻고 경조사를 챙기고 위급할 때 도와주는 것은 각각 그 실정에 알맞게 하고 각각 그 마음에 흡족하게 하였다. 비루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화나는 기색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경박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은거하면서 부모를 봉양하며 언행을 삼가고 경계하기를 50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향리에서 그 효성을 칭찬하여 장차 관아에 아뢰고자 하였는데, 군이 듣고서 즉시 그 문서를 빼앗아 불 속에 던지고 말하기를 "나에게 불효를 거듭 짓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숙병(宿病)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어느 날 그 아들 문채(文采)를 불러 말하기를 "나는 필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늙은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누가 대신 봉양하겠는가. 너는 마땅히 힘써 구천에 있는 네 아비의 무한한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임종하였으니, 바로 무신년(1908, 순종2) 6월 20일이다. 동방(同坊) 작약산(芍藥山) 아래 반기동(半圻洞)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재헌(鄭在憲)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를 지극히 갖추었다. 부군보다 18년 먼저 졸하였다. 살던 마을 뒤쪽 소강산(小康山) 아래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준룡(準龍)으로 일찍 죽었고, 차자는 문채(文采)이다. 손자 이하는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아, 옛날에도 오히려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지금과 같은 말세에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한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충신한 자'주 60)와 맹자(孟子)가 말한 '한 고을의 선한 선비'주 61)는 또한 만나 보기 어려울 것이다. 군은 순후한 자질을 타고났고 효도하고 삼가는 행실이 있었으니, 마땅히 공덕을 쌓은 응보가 있어야 하지만 침체되어 드날리지 못하고 수명도 누리지 못하였으니, 친구의 애석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문채(文采)가 상복을 입고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길 부탁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작약산에 새로 묘도를 내어 芍藥新阡
봉긋하게 봉분 만들었네. 若斧若堂
을좌(乙坐) 신향(辛向)의 언덕 坐乙向辛
효자가 묻힌 곳일세.孝子攸藏
하늘이 돕고 신이 돕는 것 天佑神勞
효자라야 그러하네.惟孝爲然
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으니 孝子不匱
천년토록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年
주석 60)공자(孔子)가……자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자는 있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라고 하였다.
주석 61)맹자(孟子)가……선비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라야 한 고을의 선사를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라고 하였다.
通訓大夫司憲府監察文山齋朴君墓誌銘
君姓朴氏諱世鎭。字達之。號文山齋。密陽人。新羅王赫居世是其始祖也。至中系。有諱蔚察訪。是生諱孟誠僉正。是生諱永傑副護軍。贈吏參。是生諱億瑞通政。是生諱枝樹號茅峰監察。壬辰之亂。殉社著勳。贈左承旨。又贈戶曹參判。是生諱天柱號悔齋主簿。有孝行。妣盧氏有烈行。俱蒙褒旌。是生諱以素號台庵通政。是生諱泰馨號月山。是生諱尙郁號松溪通政。是生諱必思號道隱。贈司僕寺正。於君爲高祖也。贈祖諱慶杓。贈左承旨。祖諱豊煥。贈戶曹參判。父在源號雙筍齋。壽同中樞。妣贈貞夫人。晉州邢氏錫贊女。系妣贈貞夫人。完山李氏贊英女。有婦德。哲宗己未十一月十九日。生君于州之淨泉里。君天稟溫厚慈詳。自幼以至行聞於人。家素貧甚。君左右拮据出入竭蹶。有以樂其心志適其口體者。無不備至。親有疾。心憂色沮。夜不解帶。斫指汪血。祝天冀代。平居身不私有。財不私蓄。尋常出入。惟命是聽。巨細營爲。必稟而行。行有餘力。入塾看書。循循課程。未嘗廢闕。推而至於宗族鄕黨時節寒暄之問。吉凶慶弔之禮。急難周恤之風。各稱其情。各得其心。俚雜之言。不出於口。忿戾之氣。不形於色。足不到奔競之地。身不接浮浪之人。隱居養親。勤身勅行。五十年如一日。鄕里擧其孝。將聞于官司。君聞之。卽奪其狀投之于火曰。母重吾不孝爲也。有宿疾。久而不瘳。一日招其子文采曰。余必不起矣。老親在堂。誰其替養。汝宜勉力。以慰乃父九泉無窮之恨也。言訖而終。卽戊申六月二十日也。葬同坊芍藥山下半圻洞乙坐原。齊淑人河東鄭氏在憲女。閨範備至。先君子十八年卒。葬所居村後小康山下庚坐原。有二男。長準龍早逝。次文采。孫以下幼不錄。嗚呼。才難之歎。在古猶然。況今衰叔之世乎。孔子所謂十室之忠。孟子所謂一鄕之善。亦難得以見之矣。君稟醇厚之質。服孝謹之行。宜其有積累之應。而沈淹不揚。壽又不遐。知舊慨惜之心爲何如耶。文辨采曳衰抱狀。託以誌銘之文。嗚呼。豈忍辭諸。銘曰。芍藥新阡。若斧若堂。坐乙向辛。孝子攸藏。天佑神勞。惟孝爲然。孝子不匱。芬苾千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