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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퇴정 처사 문공 묘지명(退亭處士文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33
퇴정 처사 문공 묘지명
선비가 삼대(三代)에 태어나지 않아 이미 고요(皐陶)와 기(夔), 원개(元凱)주 54)의 부류와 더불어 태평성대에 제제(濟濟)하게 서로 사양하는 지경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면, 아래 시대로 내려와 말세에 태어나 당대의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과 함께 교유하더라도, 이 또한 괜찮을 것이다. 고(故) 처사 퇴정(退亭) 문공(文公)은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을 스승으로 섬기고, 선원(仙源) 김 문충공(金文忠公),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노봉(老峯) 민 문충공(閔文忠公), 월사(月沙) 이 문충공(李文忠公), 오리(梧里) 이 문충공(李文忠公)을 벗하여 우리나라의 태평 시절에 교제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서로 연마하였으니, 그 성대한 만남과 고고한 기상은 먼 후대에 사람들에게 공경심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아, 공의 현명함이여!
공의 휘는 존도(存道), 자는 성기(聖器)로, 남평(南平) 사람이다. 고려 말기 삼우당(三憂堂) 휘 익점(益漸)이 그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고조 우창(佑昌)은 통정대부이고, 증조 민(敏)은 생원이며, 조부 언관(彦寬)은 선전관(宣傳官)이고, 선고 운룡(雲龍)은 부호군인데, 대대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배위(配位)는 익산 소씨(益山蘇氏)로, 아무개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를 순전히 갖추었다. 만력(萬曆) 임인년(1606, 손조35) 9월 19일에 보성(寶城) 도개리(道開里)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빼어났으니 동배(同輩)에서 특출하였다. 8세에 호군공(護軍公)이 운자(韻字)를 부르니, 공이 부르는 즉시 대답하기를 "창밖에 눈과 달빛 희니, 깨끗함에서 인심을 보겠네. 눈과 달빛 나의 곡조를 일으키니, 오늘 밤 누가 나를 알아주랴.[窓外雪月白, 潔潔見人心. 二白唱我曲, 今宵誰知音?]"라고 하였으니, 그 기상이 어릴 적부터 이미 이와 같았다. 모부인(母夫人)이 병환이 나자 정성을 다하고 매우 근심하며 방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고 북두성에 빌고 하늘에 빌었는데 한 달여 만에 병이 나았다. 그날 저녁 호군공의 꿈에 어떤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처가 나은 것은 그대 아들의 효성 때문이다. 내 그 효성에 감동하여 그 수명을 90세까지 연장하였다."라고 하였다. 독서에 매우 힘써서 문사(文詞)가 날로 성취되니, 과거 시험의 각 문체에 영민하고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마침내 은봉(隱峯) 안 선생(安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선생이 그 영특함을 아껴 매우 기대하였다. 이로부터 사장(詞章)의 기습을 떨쳐 버리고 요체를 파악하고 근원을 찾는 곳에서 힘쓰고 착실하게 연마하기를 비로소 그만두지 않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이 강도(江都)에 행행(幸行)하니 조정과 민간(재야(在野)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당시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완산(完山)에서 군사를 독려하였는데, 공은 평소 그와 서로 잘 알고 지냈기에 즉시 달려가서 난을 평정할 계책을 아뢰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임신년(1632, 인조10)에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상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머물고 세자는 강도(江都)로 들어갔는데, 안팎으로 연락이 끊겨 군신 상하가 매우 놀랐다. 공이 의병 30여 명을 규합하여 은봉(隱峯)의 막하에 나아갔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에 완산(完山)에 도착하였는데, 지나는 곳의 여러 고을에서 즉각 호응하였다. 한밤중에 군사를 점검하면서 지은 시에 "당대의 남아 칼을 차고 노래 부르니, 사방 적의 형세 어떠한가? 군사 점검하는 이 밤 영웅호걸들 승전고 울릴 내일 아침 의기가 충만하리라.[一代男兒杖釰歌, 四邊賊勢問如何? 點軍此夕英豪士, 乘勝明朝意氣多.]"라고 하였다. 각 도에 격문을 띄워 함께 군사를 일으키는 의리를 깨우치고, 또 순찰(巡察) 이시방(李時昉)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 전쟁에서의 기무(機務)를 진달하였다. 다음 날 여산(礪山)에 이르러 강도(江都)는 지키지 못하고 남한산성은 포위가 풀렸다는 보고를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의병을 파하였다. 공이 그 삼종형(三從兄) 재도(載道)가 남한산성에서 호종하며 여러 날 추위에 떨며 분을 참지 못하여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달려가서 만나 보았다. 이어서 난리 끝에 서울이 피폐하고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을 보고 비분강개함을 견디지 못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고관대작의 저택 도리(桃李)는 절로 열매 맺었지만, 강도엔 다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네.[朱門桃李自成實, 盡落江都渺渺流.]" 하였다. 2월에 집으로 돌아오자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가 이처럼 치욕을 당했으니, 이 어찌 신하가 차마 말할 바이겠는가. 다만 내 일찍 죽지 못하여 이러한 상황을 만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개리(道開里)에서 원봉리(元峯里)로 이사하였다. 산을 등지고 물을 굽어보는 형세라 경치가 감상할 만하였다. 인지당(仁智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이에 이르러 퇴정(退亭)이라고 편액을 고쳐 그 뜻을 붙였다. 날마다 편복(便服) 차림으로 그 사이에서 부앙하며 풍월을 읊조리고 책 속에 파묻혀 지내 득실과 부침에 대해서 담담하였다. 서울 친구 가운데 공을 추천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굳게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다만 나의 선친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하나의 명성도 없는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청음(淸陰) 선생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왔다주 55)는 말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문산(文文山)주 56)은 수감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이 노인은 수감되었다가 살아 돌아왔지만 그 큰 기상과 큰 절개는 생사를 가지고 다르게 보아선 안 된다. 아, 이 노인은 바로 오늘날의 문산이거니와, 나는 그의 벗으로 당일(당시) 강직한 신하가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노봉(老峯) 민공(閔公)이 일찍이 본성(本省)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은거하는 곳의 단장이 소산하고 담박한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남주(南州)의 고상한 선비이다."라고 하고, 그 집의 편액을 원봉(元峯)이라고 하였다. 또 시를 남겼는데, 그 시에 "바쁘게 행장을 꾸려 저물녘에 찾으니 청산의 구름 걸린 높은 나무 고인의 마음이로다.……[草草行裝簿暮尋, 靑山雲樹故人心. 云云.]" 하였다. 여러 책과 경전을 돌아가며 익숙히 반복하여 읽어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환하게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논어(論語)》 한 책에 대해서는 더욱 많이 공부하여 일상 생활하면서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기유년(1669, 현종10)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락동(加樂洞) 가정(柯亭)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안진(安震)의 따님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시진(時振)이다. 손자는 일화(日華)이고, 증손은 홍덕(弘德), 취덕(就德), 명덕(命德), 윤덕(潤德), 응덕(應德)이다.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외진 고을의 일개 선비로 이름은 사적(仕籍)에 있지 않고, 몸은 조정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매양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나아감에 한결같아 그칠 줄 몰랐다.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당겨도 일어나지 않고 불러도 응하지 않았으며, 교유를 끊고 한가롭고 한적하게 지냈으니, 처하는 데 한결같아 나아감을 알지 못하였다. 어찌 전후의 출처가 이처럼 훌륭한 것인가. 대개 그가 주장한 바는 의리에 한결같은 것일 따름이다. 일개 부인이지만 칠실(漆室)의 근심이 있었고 일개 동자이지만 왕기(汪錡)에게는 상(殤)의 예를 적용하지 않았는데,주 57) 더구나 공은 홍유(鴻儒) 숙덕(宿德)으로 한 지방의 기대를 받는 자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담암(澹庵)이 소조정(小朝廷)의 수치가 된다는 것주 58)을 생각하고 첩산(疊山)이 한가로운 백성이 된 것주 59)을 생각하였으니, 이는 공이 만년의 절조를 가다듬은 바로서, 한겨울의 송백(松柏)과 같은 것이다. 아, 공경할 만하다.
7세손 형(炯)이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길 청하였다. 유장을 살피니 바로 우리 무사재(無邪齋) 박 선생(朴先生)이 지은 것이었다. 어루만지며 훑어보니 더 한층 감격스러웠다. 그 말에 "비록 처한 상황이 다르고 수립한 바가 각각 다르더라도 그 뜻은 선원(仙源), 청음(淸陰)과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행적에 걸맞고 합당하여 먼 후대에도 바뀌지 않을 의론이니, 소자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다른 말을 첨언하겠는가. 삼가 유장의 말에 근거하여 그 청에 부응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孝親忠君
현명한 이를 섬기고 어진 이 벗하네. 事賢友仁
사문의 훌륭한 선비요 斯文偉儒
밝은 시대의 은일자로다. 昭代逸民
시사가 크게 변하자 時事一變
돌아와 동강에 은거하였네. 歸臥東岡
고상한 풍모와 정취, 큰 절개 高韻大節
백세 뒤에 더욱 빛나리라. 百世彌彰
주석 54)원개(元凱)
팔원(八元)과 팔개(八凱)를 합친 말로, '원(元)'은 선(善)을 '개(凱)'는 화(和)를 뜻한다.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인 여덟 명의 온화한 사람[八凱]과 고신씨(高辛氏)의 후손인 여덟 명의 선량한 사람[八元]을 가리킨다. 이들은 순(舜)이 요(堯) 임금의 신하가 된 뒤에 등용되어 백사를 주관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8年》
주석 55)청음……돌아왔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인조 18년(1640) 12월에 심양으로 압송되었는데,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6년이 지난 23년(1645) 2월에 본국으로 돌아왔다.《仁祖實錄 18年 12月 8日, 23年 2月 23日》
주석 56)문문산(文文山)
남송(南宋)의 정치가이자 시인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을 말한다. 자는 송서(宋瑞)ㆍ이선(履善), 호는 문산이다. 남송이 원(元)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저서로는 《문산전집(文山全集)》이 있다.
주석 57)왕기(汪錡)……않았는데
노 나라 동자 왕기가 전쟁에서 죽었는데, 어려서 죽은 사람에게는 상(殤)이라 하여 성인(成人)의 예로 장사 지내지 않는 예법이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왕기는 동자이지만 무기를 잡고 국가를 수호하였으니 성인의 예를 써도 된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11年》
주석 58)담암(澹庵)이……것
호전(胡銓)은 송나라 사람으로, 자가 방형(邦衡)이고 호가 담암(澹庵)이다. 금(金)나라가 쳐들어왔을 적에 "만약 화의(和議)를 하면 소 조정(小朝廷)이 될 것이니, 소 조정에서 구차히 살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화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宋史 胡銓列傳》
주석 59)첩산(疊山)이……것
첩산은 남송(南宋)의 학자 사방득(謝枋得)의 호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당석산(唐石山)에 은둔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살았는데, 원(元)나라 사람이 강제로 북행(北行)하게 하자 곡기를 끊고 죽었다. 《宋史 謝枋得列傳》
退亭處士文公墓誌銘
士不生三代上。旣不得與皐夔元凱之類。濟濟相讓於亭午照皞之域。則降而生於叔季之世。得一時賢德與之遊從。斯亦可矣。故處士退亭文公。以隱峯安文康公爲師。以仙源金文忠公。淸陰金文正公。老峯閔文忠公。月沙李文忠公。梧里李文忠公爲友。往復切磋於大東昇平之日。其會遇之盛。氣象之高。百世之下。足令人起敬。嗚呼。公其賢乎哉。公諱存道。字聖器。南平人。麗季三憂堂諱益漸其中系顯祖也。高祖佑昌通政。曾祖敏生員。祖彦寬宣傳。考雲龍副護軍。世有文行。配益山蘇氏某女。閫範純備。萬曆任寅九月十九日。公生于寶城道開里。天資秀爽。出於等夷。八歲護軍公拈韻呼之。公應口而對曰。窓外雪月白。潔潔見人心。二白唱我曲。今宵誰知音。其氣趣自幼己如此。母夫人有疾。致誠致憂。不離房側。每夕齋沐。祈斗祝天。月餘病愈。其夕護軍公夢有一老人來言曰。君妻之愈。以其子之孝也。吾感其孝。延其壽九十云。讀書刻苦。文詞日就。功令各體。無不敏贍。弱冠遂就學于隱峯安先生之門。先生愛其開悟。深寄意焉。自是刊落詞章之習。而於反約窮源處。勉勉循循。未始有已。丁卯之亂。車駕幸江都。朝野洶洶。時李相國元翼。在完山視師。公素與相善。卽馳詣爲陳剿亂之策。未幾。見賊退而還。壬申遭外艱。居廬三年。哀毁過節。丙子之亂。車駕駐南漢。世子入江都。內外阻絶。上下震駭。公糾合議旅三年餘人。赴隱峯幕。丁丑正月行到完山。所過列邑。響應影從。中夜點軍有詩曰。一代男兒杖釰歌。四邊賊勢問如何。點軍此夕英豪士。乘勝明朝意氣多。傳檄各道。喩以同仇之義。又馳書於李巡察時昉。以陳機務。明日至礪山。聞江都失守南漢解圍之報。北向痛哭而罷。公聞其三從兄載道。扈從南漢。累日觸寒。因以忿憤成疾。卽馳往見之。因見亂離之餘。京都凋殘。舊知零散。不勝悲慨有詩曰。朱門桃李自成實。盡落江都渺渺流。二月還家。族戚皆會。公歎曰。國家羞辱如此。此豈臣子所忍言。只恨吾死不早。見此爻象耳。先是自道開移寓元峯里。負山臨水。景致可賞。題其顔曰仁智堂。至是改題以退亭。以寓其意。日以便服。偃仰其間嘯詠咏風月。沈潛書籍。於得失陞沈淡如也。洛中舊遊。有擬公剡薦者。公固拒之曰。吾志己定。決不可回。但吾先人。文學著世。而未有一名。是可恨也。一日聞淸陰先生自瀋陽還。歎曰。文文山被囚而殺死。此老被囚而還。其宏綱大節。不可以生死而差殊觀也。嗚呼。此老卽今日之文山。而余以一友生。未得爲當日之張一鶚。可恨。老峯閔公嘗按廉本省。因來訪之。見薖軸粧黙點。蕭散淡泊。歎曰。子眞南州高士。題其室曰元峯。且留詩曰。草草行裝簿暮尋。靑山雲樹故人心云云。群書群經。循環熟複。微辭奧義。無不昭晣。而於論語一書。尤加功焉出入起居。手不釋卷。己酉十月十七日考終。葬加樂洞柯亭坐壬之原。配竹山安氏震女。生一男曰時振。孫日華。曾孫弘德就德命德潤德應德。玄孫以下不錄。公以窮鄕一布衣。名不在仕籍。身不參朝班。而每有警急。忘身殉國。一於出而不知止。及其謝歸鄕里也。挽之而不起。呼之而不應。絶遊息交。投閒置散。一於處而不知進。何前後出處若是遼絶耶。盖其所主者。一於義而已。一婦人也而。漆室有憂。一童子也而汪齮勿殤。則況以公鴻儒宿德而負一方之望者乎。懷澹庵小朝之恥。慕疊山閒民之爲。此公之所以砥礪晩節。如大冬之松柏也。吁可敬也。七世孫炯奉遺狀。來謁誌銘之文。按狀卽我無邪齋朴先生所撰也。摩挲繙閱。尤增一層感慨也。其言曰。雖所遇不齊。樹立各異。而其意則仙源淸陰同一歸也。此可爲稱停的當。百世不易之論。小子後生。何敢復容他說哉謹據狀說以塞其請。銘曰。孝親忠君。事寶友仁。斯文偉儒。昭代逸民。時事一變。歸臥東岡。高韻大節。百世彌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