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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고 학생 청계 최군 묘지명(故學生淸溪崔君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31
고 학생 청계 최군 묘지명
군의 성은 최씨(崔氏), 이름은 창렬(昶烈), 자는 성규(性圭), 본관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초에 휘 지몽(知夢)이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고, 식읍(食邑) 1천 호(戶)를 받았으니,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선조이다. 중대에 이르러 휘 안우(安雨)는 조선에서 벼슬하여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고,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다.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장성(長城), 능성(綾城), 고창(高敞), 광양(光陽)의 수령을 지냈다. 휘 치호(致湖)는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휘 광(銧)은 호가 매곡(梅谷)인데, 찰방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가 인수(仁受), 호가 송암(松庵)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첨중추(僉中樞)에 올랐다. 증조는 휘가 성각(聖覺)이고, 조부는 휘가 진후(鎭厚), 호가 운곡(雲谷)으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부친은 휘 의한(義漢)이다. 모친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로, 양시중(梁時仲)의 따님이다. 을묘년(1855, 철종6) 6월 23일 산음리(山陰里)에서 군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특하였으니, 어려서 독서하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그 소리를 듣고 외워서 전할 수 있었다. 스승에 나아가게 되어서는 문리(文理)가 날로 성취하였다. 성동(成童)에 이르러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여러 번 송독하여 매우 익숙하였기에 글을 지음에 문채(文彩)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나의 이전 공부는 다만 쓸데없이 마음과 힘을 허비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였다. 선철(先哲)이 말하기를 〈만약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하지 않으면 말로 지껄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장구(章句)나 찾고 대구(對句)나 맞추면서 글을 지어 겉만 꾸미는 것이 어찌 학문이겠는가. 이는 다만 사람의 허황되고 부화한 습속을 자라게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지엽적인 것을 제거하고 근본을 배양하였으니, 〈사물잠(四勿箴)〉, 삼성(三省),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써서 자리 곁에 붙여 놓고 늘 보면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또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 정이(程頤)) 같은 여러 현인(賢人)의 격언과 요결(要訣) 수십 조(條)를 써서 아침저녁으로 읊조렸다. 일찍이 말하기를 "강절(康節 소옹(邵雍)) 선생이 수년 동안 백원산(百源山)에서 독서하며 밤에 침상에서 자지 않았는데 학문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오(吳), 초(楚), 제(齊), 노(魯), 양(梁), 진(晉)나라 사이에서 유람하면서 천하의 선비와 두루 교유하고 천하의 풍속을 두루 관찰하였으니, 이 일이 매우 좋다. 늘 마음에서 잊지 않고 배운 것이 진보하기를 기다려 또한 장차 이 노인처럼 사방을 유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자년(1888, 공종25) 6월 11일에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였다. 죽기 전에 말하기를 "나는 죄와 한(恨)이 한가지씩 있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죄이고, 강절 선생처럼 유람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외신산(外薪山) 중턱 아래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치장(閔致章)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창주(昌柱)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순학(鄭淳鶴)에게 출가하였다.
아, 군은 영특한 자질로 일찍 스스로 깨달았으니, 근본을 두터이 하고 실질에 나아가 향상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천명을 누리지도 못하고 품은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이처럼 급하게 중도에서 요절할 줄 누가 알았으랴. 창주는 철들기 전에 부친을 여의어 그 모습과 음성, 치적과 행적을 아득히 기억하지 못하였기에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그 선인(先人)의 벗 난계옹(蘭溪翁)을 모시고 그 유사(遺事)를 기록한 다음 그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비록 선인의 음성과 용모를 대하지 못했지만 직접 본 것 같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입니다. 원하건대 한마디 은혜로운 말을 보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묘령(妙齡)의 나이에 이미 세상을 떠난 어버이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와 같으니, 이는 한 집안에 자손이 끊어지지 않을 소식이다. 그 당시 펴지 못한 뜻이 이로 인하여 펴지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라고 하고, 그 뜻을 가련하게 여겨 차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꽃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秀而不實
일은 실로 편안하기 어렵네. 不食有報
뜰의 난초는 날마다 자라네. 庭蘭向榮
故學生淸溪崔君墓誌銘
君姓崔。諱昶烈。字性圭。系出朗州。麗初有諱知夢。事麗祖封東萊侯。食邑千戶。其登譜之祖也。至中系有諱安雨。仕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諱湫。號蘭溪。文科。歷宰長城綾城高敞光陽。諱致湖。文科承旨。諱銧。號梅谷。察訪。皆其顯祖也。高祖諱仁受。號松庵。壽陞僉中樞。曾祖諱聖覺。祖諱鎭厚。號雲谷。有文行。考諱義漢。妣濟州梁氏時仲女。以乙卯六月二十三日。生君于山陰里。姿稟穎悟。幼而在讀書。側聞其聲而能誦傳之。及就傳。文理日就。至成童。小大學論孟詩書。誦數甚熟。綴文緝句。詞義斐然。一日忽語于心曰。我前日之功。只是枉費心力。枉費光陰。先哲有言曰。若不存養。只是說話。今尋章摘句。抽黃對白。以爲粧撰皮毛者。此何學也。適足以長人虛夸浮靡之習而已。自此刊落枝葉。培養本源。書四勿三省九容九思及夙興夜寐箴。貼之座側。以爲常目警省之地。又書濂洛群賢格言要誨數十條。晨夕諷誦。嘗曰。康節先生。讀書百源山中。夜不就枕。數年。學旣有成。乃出遊於吳楚齊魯梁晉之間。遍交天下之士。遍觀天下之俗。此事甚好。尋常不忘於心。俟所學有進。亦將出遊四方如此老也。戊子六月十一日。以疾終于家。臨歿言曰。吾有一罪一恨。先父母而歸。一罪也。未遂康節之志。一恨也。葬外薪山中山下酉坐原。配驪興閔氏致章女。擧一男一女。男昌柱。女適河東鄭淳鶴。嗚呼。君以穎悟之姿。早自覺悟。敦本就實。方進不已。誰知命道不媚。齎志未伸。而中途夭折。若是遽遞耶。昌柱未及省事而失所怙。儀容聲音。行治事爲。漠然不記。以是爲平生恨。從其先友蘭溪翁。得記其遺事。以其狀過余而言曰。雖未及見先人之音容。而可以寓如見之情者。惟在於此。願爲之加惠一言也。余曰。賢以妙齡。思欲不忘其己沒之親。至於如此。此是人家子孫碩果消息。當日未伸之志。安知不因此而有伸也。哀其意而不忍辭。銘曰。秀而不實。事固難平。不食有報。庭蘭向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