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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묵와 정공 묘지명(黙窩鄭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29
묵와 정공 묘지명
정군 재한(鄭君在翰)과 이군 승우(李君承愚)는 모두 우리 고을의 선사(善士)이다. 두 사람은 대대로 한마을에 살면서 노년까지 서로 지켜 주며 의연히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어느 날 정군이 그 선대인(先大人) 묵와공(黙窩公)의 유사(遺事)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가장은 바로 이군이 지은 것이다. 이군은 선대부터 교분이 있던 집안의 자제로 배종(陪從)하며 출입한 지 오래되었을 뿐만이 아니니, 묵와(黙窩)의 행적을 자세히 아는 것이 이군만 한 이가 없다. 게다가 이군은 현명하여 필시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지 않았을 것이니, 그 가장의 말은 실로 믿을 만할 텐데 어찌 나의 말이 필요 있겠는가. 그렇지만 교분으로 말하면 모두 벗이니, 이군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내가 어찌 유독 사양하겠는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백환(百煥), 자는 익서(益瑞), 호는 묵화(黙窩)이다.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신라 때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거족(鉅族)이었다. 조선에는 휘 여해(汝諧)가 있는데, 경학과 문장,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세상에서는 둔재(遯齋) 선생이라고 하였다. 고조는 휘가 인채(仁采), 호가 덕곡(德谷)인데,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증조는 휘가 석(錫), 호가 반산(盤山)이다. 조부는 휘가 양무(陽武)이고, 부친은 휘가 의상(義相)이다. 모친은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상준(金相俊)의 따님이다. 계비(繼妣)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기묘년(1819, 순조19) 7월 7일은 바로 공이 태어난 날이다.
공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계비는 성격이 까탈스러워 어울리기 어려웠지만 공은 정성을 다해 잘 받들었으니, 비록 소 밑을 청소하는 일주 51)과 회초리를 맞는 고통도 마음에 담지 않고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인(大人)이 매양 계비가 자애롭지 않은 것을 우려하였는데, 공이 울면서 간하기를 "자식이 만약 효도한다면 어머니가 어찌 자애롭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자애롭지 못한 것은 자식의 잘못입니다."라고 하니, 대인이 가련하게 여겨서 그만두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계비가 감동하여 마침 기뻐함에 이르자 친척과 이웃들이 모두 감탄하여 왕상(王祥)의 효성에 견주었다.
계비가 세상을 떠나자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졌다. 계비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주환(周煥)이다. 공이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는데, 함께 잠자며 한 이불을 덮을 정도였고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공의 외삼촌이 매우 가난하여 공에게 와서 의탁하였는데, 낳아 주신 부모처럼 섬겨 무엇이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만큼 갖가지로 도와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재산을 털어 장사 지내주고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형제라곤 오직 외삼촌만 계셨는데, 지금 모두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평상시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벗하지 않았다. 눈으로는 예가 아닌 색을 보지 않고, 귀로는 예가 아닌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을 단속하고 집안을 바르게 하였으며,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따랐고 향리에서는 그 의리에 탄복하였다.
기묘년(1879, 고종16) 1월 4일에 졸하였다. 광대동(光大洞)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보성 오씨(寶城吳氏) 오용상(吳龍祥)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은 재한(在翰)이고, 손자는 영현(榮鉉), 장현(章鉉)이고, 딸은 평택(平澤) 임노열(林路烈)에게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어머니는 매우 수고하셨으니 母氏劬勞
나를 낳고 길러 주셨네. 生我育我
어린 자식 두고 어머니 떠나셨으니 子幼母違
외로운 몸 누구를 의지할까. 煢煢何恃
민자건은 갈대꽃 넣은 옷 입었고주 52) 閔被蘆絮
왕상은 모진 고초 겪었네.주 53) 祥遭楚虐
곡진하게 받들어 따랐고 委曲承順
말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네. 不見辭色
끝내 기뻐함에 이르렀으니 終焉底豫
근심스럽게 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았네. 不戚不咨
큰 강령 이미 확립되니 大綱旣立
온갖 사람 미루어 확대할 수 있네. 萬目可推
주석 51)소 밑을 청소하는 일
진(晉)나라의 이름난 효자인 왕상(王祥)의 고사를 차용한 일화인 듯하다. 《진서(晉書)》〈왕상열전(王祥列傳)〉에, 왕상(王祥)의 계모 주씨(朱氏)가 아버지에게 왕상을 모함하였는데, 이 때문에 왕상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 매양 소 밑을 청소하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주석 52)민자건(閔子騫)은……입었고
《태평어람(太平御覽)》 권819 〈효자전(孝子傳)〉에, "민자건이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겨울에 솜을 넣은 옷 대신 갈대꽃을 넣은 옷을 입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뒤에 그 사실을 알고서 계모를 내보내려고 하자 민자건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한 아들만 얇은 겨울옷을 입지만, 어머니가 나가시면 세 아들이 추위에 떨게 됩니다."라고 한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는 말인 듯하다.
주석 53)왕상은……겪었네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한다.《五倫行實圖 孝子》여기서는 정백환(鄭百煥)이 계모에게 고생한 것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黙窩鄭公墓誌銘
鄭君在翰李君承愚。皆吾鄕善士。二人世居一巷。到老相守。毅然爲道義之交。一日鄭君以其先大人黙窩公遺事狀。來謁誌銘之文。狀卽李君所撰也。李君以世交子弟。陪從出入。不啻久矣。則詳黙窩之行宜。莫如李君。且以李君之賢。必不爲阿私。則其言固可證信。何待乎余言。以契分則均是友也。李君之所不辭。余豈獨辭之哉。按公諱百煥。字益瑞。號黙窩。河東之鄭。自羅至麗爲東方鉅族。我朝有諱汝諧。經學文行。著稱於世。世云遯齋先生。高祖諱仁采。號德谷。官知中樞。曾祖諱錫。號盤山。祖諱陽武。考諱義相。非淸道金氏相俊女。繼妣金海金氏某女。純廟己卯七月七日。卽公之寅降也。幼喪所恃。繼妣性峻難諧。公克意承順。雖牛下之役。夏楚之苦。不作於意。不見於色。其大人每恐其不慈。公泣而諫曰。子若孝焉。則母豈不慈。母之不慈。子之罪也。大人憐而止之。久之。繼妣感之而竟底豫焉。親戚鄰里。莫不嗟賞。以王祥之孝擬之。繼妣歿。哀毁過禮。繼妣有一男曰周煥。公撫愛甚篤。同寢同被。至老不替。公舅氏至貧。來依於公。事之如所生。凡百周恤。無所不至。其歿也。傾家財以營葬。因語人曰。吾早而失母。母之同氣。惟舅氏在。今皆失之。語了涕下沾衿。平居非其力不食。非其人不友。目不接非禮之色。耳不聽非禮之言。勅身正家。平心率物。子孫遵其敎。鄕里服其義。己卯正月四日卒。葬光大洞酉坐原。配寶城吳氏龍祥女。有婦德。男在翰。孫榮鉉章鉉。女適平澤林路烈。銘曰。母氏劬勞。生我育我。子幼母違。煢煢何恃。閔被蘆絮。祥遭楚虐。委曲承順。不見辭色終焉底豫。不戚不咨。大綱旣立。萬目可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