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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제용감 첨정 약포 조공 묘지명(濟用監僉正樂圃曺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28
제용감 첨정 약포 조공 묘지명
우리 고을의 선덕(先德)으로서 치사(致仕)하고 물러나 절개를 지켜 우러러 볼 만한 분이 십 수인데, 낙포(樂圃) 조공(曺公)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국병(國柄), 자는 신경(愼卿)이다. 명종(明宗) 때 벼슬하여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지냈다. 이윽고 물러나 능성(綾城)의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은거할 곳을 마련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시가 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남쪽으로 와서 밭을 개간하고, 북쪽으로 바라봄에 은하수 높네. 비봉산 아래 맑은 바람 부니, 밤에 《이소경》을 읽네.[南來田疇闢, 北望河漢高. 淸風鳳岡下, 夜讀楚離騷.]"라고 하였다. 세대가 멀어 문고(文稿)가 전해지지 않고, 전하는 것이라고는 단지 초라하게 이 절구 한 수뿐이다. 그러나 상상하고 시를 음미해보면 그 충후하고 측달한 뜻과 울분에 차고 감개한 뜻은 먼 후대에서 마음이 통하고, 시대가 한참 지났어도 생각을 함께할 수 있다고 할 만하다. 그 저 바람과 구름, 달과 이슬만을 읊어 시문이 쌓여 있은들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다면 세상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이를 살펴보면 충분할 것이다.
대대로 서울에 살아 선조의 무덤이 인천(仁川)에 많았다. 임시로 살고 있는 곳에서 외롭고 쓸쓸하면 매양 뿌리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집 뒷동산에다 작은 누대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올라서 고향을 바라보았으니, 세상에서는 망향대(望鄕臺)라고 전해진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명리(名利)를 멀리하며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경전을 연구하고 이치를 찾으며 생도를 가르치는 것을 노년의 계책으로 삼았으니, 향인(鄕人)의 자제 가운데 성취한 자가 많았다.
조씨(曺氏)의 관향은 창녕(昌寧)이니, 신라(新羅) 태사(太師)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휘 계룡(繼龍)이 을 시조이다. 휘 서(庶)에 이르렀는데, 호가 청윤(淸潤)으로,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낸 이 분이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증조는 휘 홍단(弘袒)인데, 오위장(五衛將)이고, 조부는 휘 숙문(淑文)이니, 계공랑(啓功郎)이다. 부친은 휘 정윤(貞允)인데, 지사(知事)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구원성(具遠成)의 따님이다. 공의 생몰 연대는 잃어버려 전하지 않는다. 배위(配位) 숙인(淑人)은 진양 신씨(晉陽辛氏)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묘소는 고을 서쪽 내동(內洞) 왼쪽 산기슭 유좌(酉坐) 언덕에 있으니, 쌍분이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진사 대수(大秀), 진사 대현(大玄), 그리고 대서(大緖)이다. 장방(長房)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정희(廷禧)를 낳고, 봉사는 중일(仲逸)을 낳고, 중일은 부호군(副護軍) 순효(舜孝)를 낳고, 부호군은 한징(漢徵)을 낳고, 한징은 통정대부 봉의(鳳儀)와 진사 봉인(鳳人)을 낳았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12세손 병홍(秉泓)이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돌과 같이 不日介石
홀연히 잘못을 뉘우쳤네.주 49) 幡然回轍
고반이 언덕에 있고주 50) 考槃在阿
도서가 집에 가득하였네. 圖書滿室
편안고 여유롭게 노니니 優哉遊哉
풍모와 운치 더욱 영원하리. 風韻彌長
우뚝한 넉 자의 봉분 有崇四尺
비봉산 남쪽에 있네. 飛鳳之陽
주석 49)하루가……뉘우쳤네
《주역》 〈예괘(豫卦) 육이효(六二爻)〉에 "견고함이 돌과 같아서, 과거의 잘못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제거해 버리나니, 정하고 길하니라.[介于石, 不終日, 貞吉.]" 하였다.
주석 50)고반(考槃)이 언덕에 있고
고반은 원래 《시경》〈위풍(衛風)〉의 편명으로, 은거하여 유유자적하게 도를 즐기고 덕을 이룸을 뜻하는데, 은자의 거처를 두루 이르는 말로도 쓴다.
濟用監僉正樂圃曺公墓誌銘
吾鄕先德。有致仕退休風節可仰者。爲十數人。樂圃曺公亦其人也。公諱國柄。字愼卿。仕明宗朝。濟用監僉正。旣而退營菟裘於綾城之飛鳳山下。因有詩曰。南來田疇闢。北望河漢高。淸風鳳岡下。夜讀楚離騷世代曠遠。文稿不傳。而所傳只此寂廖一絶詩而已。然而想象諷詠。其忠厚惻怛之意。憂憤感慨之志。可謂千載合席。曠世同轍彼風雲月露連編累牘果何用哉。然則世之欲知公者。觀於此足矣。世居京洛。墳墓多在仁川地。僑寓踽凉。每不勝懷本戀舊之意。就家後山頂。築小臺。朝夕登臨以瞻望焉。世傳爲望鄕臺。杜門屛跡。恬澹無爲。而以劬經硏理。訓迪生徒。爲從老計。鄕人子弟。多有成就者。曺氏貫昌寧。以新羅太師昌城府院君諱繼龍爲始祖。至諱庶號淸澗。入我朝。寶文閣直提學。卽公之六世祖也。曾祖諱弘袒。五衛將。祖諱淑文。啟功郎。考諱貞允。知事。妣淑人綾城具氏遠成女。公生卒年紀。逸而無傳。配淑人晉陽辛氏有婦德。墓州西內洞左麓酉坐雙兆。三男大秀進士。大玄進士。大緖長房生諱廷禧。訓鍊院奉事。奉事生諱仲逸。仲逸生諱舜孝。副護軍。護軍生諱漢徵。漢徵生諱鳳儀。通政。鳳人進士。以下不盡錄。十二代孫秉泓。奉其家狀。以徵幽竁之誌。不敢以非其人辭。銘曰。不日介石。幡然回撤。考槪在阿。圖書滿室。優哉遊哉。風韻彌長。有崇四尺。飛鳳之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