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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운곡 최공 묘지명(雲谷崔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27
운곡 최공 묘지명
내가 일찍이 민치환(閔致煥) 어른과 교유한 적이 있어 운곡(雲谷) 최공(崔公)의 어짊에 대해서 들은 지 오래되었다. 그 말 가운데 "공은 한천(寒泉) 산중에 은거하여 발걸음은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학에 뛰어나고 의를 행하는 데 돈독하였다. 규문을 정돈함에 화평하면서도 예가 있었으며, 생도를 가르침에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은 바로 민씨(閔氏) 어른과 혼인한 집안의 벗이고, 민씨 어른은 바로 나의 장인이니, 그 말은 실로 믿을 만하여 낱낱이 마음에 잊히지 않았다. 5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증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삼가 그 가장을 살펴보고 과연 민씨 어른의 말이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가장에서 말한 것이 또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공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맑고 고아하여 신선과 도인의 풍모(風貌)처럼 속기(俗氣)가 한 점도 없었다. 그래서 그와 교제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루함이 사라질 정도였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고금의 일에 해박하여, 마음에 온축하여 외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치 근원이 있는 물과 같이 깊고 깊어서 다함이 없었다. 《소학(小學)》으로 바탕을 삼고, 《대학(大學)》으로 규모를 세우고, 《논어(論)》와 《맹자(孟子)》로 맥락을 바로잡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으로 진취하였으니, 과정과 절도에 정연하게 법도가 있었다. 자기에게 행하고서 남에게 미쳤기에 애초에 다른 것이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살아 계시는 부모님을 섬기고, 몸이 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하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선조를 추모하였다. 평소 거처할 적에 의관은 반드시 단정하게 하고, 얼굴빛은 반드시 위엄 있게 하였다. 집안사람을 다스릴 적에는 히히거리며 가볍게 웃는 실수가 없게 하였고,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이리저리 휩쓸리는 습속이 없게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청렴하고 검소함은 자신을 단속하는 부절(符節)이고,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평하고 온순함은 남을 대하는 요체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이를 자리 곁에 써서 놓아두고 늘 귀감으로 삼았다. 분수를 지키고 만나는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겼으며 광채를 마음속에 온축하고 있어 편안하고 여유롭게 지냈다. 애오라지 생을 마칠 때 일찍이 시를 지어 "봄 새싹 돋자 남쪽 이랑에 김을 매고, 가을 국화 피자 동쪽 울타리에서 따네. 세상을 경영하는 것 나의 일이 아니니, 은거하는 것 평소 기약한 것이라네.[春苗鋤南畝, 秋菊採東籬. 經濟非吾事, 隱淪是素期.]"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볼 수 있다.
경술년(1910, 순종4) 11월 7일에 졸하였고, 기유년(1849, 헌종15)에 태어났으니, 향년 62세이다. 산음(山陰) 뒤쪽 산기슭 부간(負艮)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휘는 진후(鎭厚), 자는 윤옥(允沃), 낭주(朗州) 사람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輔相) 휘 흔(昕)이 시조이다. 아들 지몽(知夢)은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고,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는 호가 죽계(竹溪)이고,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의 아들 휘 자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고, 현감을 지냈다.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지냈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는 호가 상덕재(尙德齋)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선(銑)은 호가 매곡(梅谷)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찰방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동로(東老)이고, 증조는 휘 태항(泰恒)이다. 조부는 휘가 인수(仁受)이고, 호가 송암(松庵)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첨추(僉樞)에 올랐다. 부친은 휘 성각(聖覺)이고, 호가 눌암(訥庵)이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고명복(高命復)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조하량(曺夏良)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의한(義漢), 차자는 의택(義澤)이다. 딸은 각각 공주(公州) 이일무(李日茂)와 여흥(驪興) 민장호(閔章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내가 태어나 아무것도 모를 때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삼성(參星)과 진성(軫星)은 서로 마주 보지 못하고, 제비와 기러기는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공의 풍모와 기품을 추념하여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한스러움만 간절할 따름이다. 이에 오늘 묘지명을 써달라는 간청에 대해서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천명과 시운이 어긋나 命與時違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았네. 世莫我知
산림에 은거하여 枕山樓谷
광채를 숨겼네. 潛光蘊輝
성동엔 수죽이 푸르고 城東水竹
산음엔 눈과 달빛 비치네.山陰雪月
먼 후대에 남은 자취를 百歲遺躅
뒤미쳐 상상할 수 있네. 追想髣髴
雲谷崔公墓誌銘
余嘗從閔丈致煥。得聞雲谷崔公之賢久矣。其言。曰公隱於寒泉山中。足不出門。名不出世。而優於文學。篤於行義。修整閨門。和而有禮。敎授生徒。嚴而有法。盖公卽閔丈之婚友。而閔丈卽余之婦翁也。其言固爲可信。而歷歷不忘於心。後五十餘年。公曾孫昌柱南杓以家狀。來謁誌行之文。謹按其狀。果知閔丈之言爲有據。而家狀之云又非誣也。公容儀端潔。襟懷淸高。如仙風道骨。無一點塵氛。人爲其容接者。不覺鄙吝自消。博涉經史。該貫古今。有以蘊畜於中而施應於外者。如有源之水。深深而不渴也。以小學爲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正路脈。以詩書展步趨。課程節度。秩然有章。由己及人。未始有異。怡愉洞屬以事其生。擗踊毁瘠以送其終。悽愴怵愓以追其遠。平居冠服必整。容色必莊。御家衆無嘻嘻之失。敎子弟去靡靡之習。常曰。勤謹淸儉。持身之符。溫恭和順。接人之要因。書之座右以常鏡考焉。守分安遇。潛光蘊輝。優哉游哉。聊以卒歲嘗有詩曰。春苗鋤南畝。秋菊採東籬。經濟非吾事。隱淪是素期。此可以見其志也。庚戌十一月七日卒。距寅降已酉得年爲六十二。葬山陰後麓負艮原。公諱鎭厚。字允沃。朗州人。以新羅元輔諱昕爲始祖。子知夢。事麗祖封東萊侯。諡敏休諱安雨號竹溪。軍器寺小監。子雲號德庵縣監。五傳諱湫號蘭溪。文科參判。再傳諱致湖。號尙德齋。文科承旨。四傳諱銑號梅谷。文科察訪。皆其顯祖也。高祖諱東老。曾祖諱泰恒。祖諱仁受號松庵。壽陞僉樞。考諱聖覺號訥庵。妣長澤高氏命復女。公娶昌寧曺氏夏良女。生二男二女。男義漢次義澤。女適公州李曰茂驪興閔章鎬。孫以下不錄。嗚呼。余生未省事。而公已謝世矣。參軫不相對。燕鴻不相値。追惟風韻。只切靡逮之恨。玆於今日之請不敢牢辭云。銘曰。命與時違。世莫我知。枕山樓谷。潛光蘊輝。城東水竹。山陰雪月。百歲遺躅。追想髣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