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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통정대부 성재 고공 묘지명(通政大夫惺齋高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26
통정대부 성재 고공 묘지명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진오(鎭俉), 자는 성순(聖巡), 호는 성재(惺齋)이니,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계보는 장흥(長興)에서 나왔는데, 신라와 고려 사이에 대대로 작위와 공훈으로 이름이 났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호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열(悅)을 낳았는데,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덕(尙德)을 낳았는데,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휘 가한(可漢)에 이르렀는데, 호가 봉강(鳳岡)으로,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명림(命霖), 호는 경재(敬齋)인데, 문학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의 휘는 산택(山宅)이니,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은 휘 세은(世殷), 호가 담암(澹庵)인데, 효우로 칭송을 받았다. 모친은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이영(李榮)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무오년(1798, 정조22) 2월 5일에 공이 이지촌(鯉池村)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김에 부지런히 일하고 봉양하여 몸에 편안 것은 다 바쳤고, 평소 모친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숙사(塾舍)에 있을 때면 날마다 반드시 세 번 문안을 드렸다. 모친에게 병환이 있으면 몹시 근심하여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다른 일은 제쳐 두고 모친의 뜻에 맞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장례의 모든 절차를 갖추어 반드시 성실하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졌다. 중년에 개연히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논어》, 《맹자》,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의 책들을 가지고 주야(晝夜)로 연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보이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들리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주 48)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제일의 방법이니, 잠시라도 소홀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라고 하고 자리 곁에 써 붙여 놓고서 늘 보았다. 규문을 정돈하고 자손을 가르침에 화평하면서도 은혜로웠으며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친척과 친구의 자손 가운데 고아가 되어 혼인하지 못하고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주어 혼인할 시기를 놓치거나 배우는 때를 놓치는 탄식이 없게 하였다. 흉년에는 그의 도움으로 밥을 지어 먹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무진년(1868, 고종5) 1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지(鯉池) 왼쪽 산기슭 원봉(圓峯)의 아래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동일(李東一)의 따님이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제문(濟文), 제옥(濟玉), 제식(濟植)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남호(李南鎬), 광산(光山) 이치호(李致鎬), 이천(利川) 서학규(徐學奎), 남평(南平) 문영욱(文永郁)에게 출가하였다. 장방(長房)은 2남이니, 황(榥)과 모(模)이다. 이방(二房)은 3남이니, 용주(容柱), 헌주(憲柱), 만주(萬柱)이다. 삼방(三房)은 1남이니 기주(麒柱)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광무(光茂)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늘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惺惺維何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한 것일세. 戒愼恐懼
큰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大本旣立
온갖 선이 갖추어지네. 萬善斯具
멀고 외진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며 婆娑遐隅
세상과 서로 잊었네. 與世相忘
넉 자의 무덤이 있으니 圓峯四尺
군자가 묻힌 곳일세. 君子維藏
주석 48)보이지……것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에서 나왔다.
通政大夫惺齋高公墓誌銘
公姓高。諱鎭俉。字聖巡。號惺齋。壽階通政。系出長興。羅麗間。世著爵勳。至諱臣傳。官戶曹參議。生諱悅。戶曹參判。生諱尙德。司憲府持平。至諱可漢號鳳岡。卽公之高祖也。曾祖諱命霖號敬齋。文行著世。祖諱山宅。有隱德。考諱世殷號澹庵。孝友見稱。妣光山李氏榮女。正宗戊午二月五日。公生于鯉池村。早失所怙。以未得逮養爲終身恨。事母夫人。服勤就養。便身畢給。平居未嘗離側。若在塾舍。則日必三省。有疾極其憂。不就寢席。不御酒肉。舍置餘事。惟以迎合爲急。遭故。哀毁罔極。絶而復蘇。送終凡具。必誠無憾。早業功令。文詞夙就。中年慨然有志乎爲已之學。將論孟心經近思錄及性理諸書。晝夜硏究。嘗曰。恐懼不睹。戒愼不聞。此是端本第一法。不可斯須而忽忘。書諸座側以常目焉。修整閨門。敎誨子孫。和而有恩。嚴而有法。親戚知舊。有孤而未婚貧而未學者。爲之助力。俾無失時失業之歎。遇饑歲。待以擧火者爲不少。戊辰正月十一日卒于正寢。葬鯉池左麓圓峯下子坐原。配全州李氏東一女。有三男四女。濟文濟玉濟植。女適光山李南鎬光山李致鎬利川徐學奎南平文永郁。長房二男榥模。二房三男容柱憲柱萬柱。三房一男麒柱。以下不錄。曾孫光茂以家狀。謁誌銘之文。銘曰。惺惺維何。戒愼恐懼。大本旣立。萬善斯具。婆娑遐隅。與世相忘。圓峯四尺。君子維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