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찰방 매곡 최공 묘지명(察訪梅谷崔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25
찰방 매곡 최공 묘지명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광(銧), 자는 중백(重伯), 호는 매곡(梅谷),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甫相) 흔(昕)이 그 시조이다. 휘 지몽(知夢)에 이르러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는데,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난계(蘭溪)이고, 관직은 참판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상덕재(尙德齋)로, 교리를 지냈다.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결(潔)인데,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다. 조부는 휘 경남(慶男)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부친은 휘 정민(廷敏)인데,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이다. 모친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경우(閔敬雨)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 1월 13일에 장흥(長興) 와리(瓦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기개가 빼어나고 성정과 도량이 온화하고 순량하였다. 집안에서는 부모를 섬기고 나가서는 어른을 섬겼다. 말은 마치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고 몸가짐은 옷을 가누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독서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봉양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여 마침내 명경(明經)으로 과거 공부하여 기쁘게 해 드리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 낙방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시상(時象)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마침내 은거하여 응시하지 않았다. 이어서 연달아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으니 나이가 이미 너무 많아서 이 때문에 과거 공부를 접고자 하니, 친척이 권유하여 말하기를 "비록 기쁘게 해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다만 문호(門戶)를 일으킬 계책에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례에 따라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계사년(1653, 효종4)에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업무를 본 지 한 해 남짓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흥에서 능주(綾州)의 가옥치(佳玉峙)로 이사하였다. 이는 고요한 곳에서 한가롭게 지낼 계책이었으니, 옛 벗들과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서로 교유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 6월 10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능주의 서쪽 오리동(五利洞) 앞 산기슭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김후장(金厚璋)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순하였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동망(東望), 차자는 동로(東老), 삼남은 동효(東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문룡(鄭門龍)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온갖 고생을 하였지만 아름다운 광채를 간직하였고, 70세에 이르러 비로소 찰방 한 직임을 받고 그쳤으니,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은 것이 어찌 공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잘되는 보응(報應)은 마땅히 누리는 때가 있을 것이니, 최씨 후손은 힘쓸지어다.
8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하늘에 달렸고 遇不遇天
얻고 얻지 못함은 명에 달렸네. 得不得命
이 때문에 군자는 是以君子
천명을 즐거워하고 명을 편안하게 여기네. 樂天而安命
察訪梅谷崔公墓誌銘
公姓崔。諱銧。字重伯。號梅谷。貫朗州。新羅元輔昕。其始祖也。至諱知夢。事麗太祖。封東萊侯。諡敏休。至諱安雨。入我朝。軍器寺小監。六傳而諱湫號蘭溪。官參判。再傳而諱致湖號尙德齋。校理。於公爲高祖。曾祖諱潔。典牲署參奉。祖諱慶男。禦侮將軍。考諱廷敏。訓鍊奉事。妣驪興閔氏敬雨女。以萬曆己丑正月十三日。生公于長興之瓦里。氣宇秀爽。性度溫良。入事父母。出事長上。言若不出口。身若不勝衣。性勤讀書。手不釋卷。嘗念家貧親老無以爲養。遂業明經爲供歡計。累擧鄕解。輒屈禮部。當光海時。見時象不佳。遂隱不赴試。繼而連遭內外艱。服闋。年己耆艾。因欲廢擧。親戚强之曰。雖無獻悅之地。獨不爲門戶計耶。己丑擢第。例授奉常寺直長。癸巳除栗峯道察訪。視職歲餘。以老謝歸。自長興移寓于綾州之住玉峙。盖爲就靜養閒計也。與知舊士友。文酒相從。己酉六月十日卒。得年八十一。葬于綾之西五利洞前麓酉坐原。配金海金氏厚璋女。婦德純至。擧三男一女。長東望次東老次東曉。女適河東鄭文龍。孫以下不錄。嗚呼。公積若累艱。蓄章儲輝。至於行年七十。而始得攻駒一職而止。位不稱德。豈有如公者乎。然不食之報。當有享受之日。崔氏其勉乎哉。八世孫昌柱南杓奉家狀。來謁誌銘之文。銘曰。遇不遇天。得不得命。是以君子。樂天而安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