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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호조 참판 난계 최공 묘지명(戶曹參判蘭溪崔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21
호조 참판 난계 최공 묘지명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추(湫), 자는 양호(養浩), 호는 난계(蘭溪),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휘 지몽(知夢)이 있는데,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1천(千) 호의 식읍(食邑)을 받았다. 이분이 족보에 기록된 선조가 된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으니,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고,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으로,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는데, 두 이름난 선조이다. 고조는 휘 사경(思敬)인데, 지용주사(知龍州事)를 지냈다. 증조는 휘 홍의(弘毅)인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조부는 휘 득초(得超)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부친은 휘가 자혁(自赫)인데,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이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현감 김시(金時)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18) 12월 3일에 공이 서울 남부(南部)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민하고 비범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적에 번거롭게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에 따랐으며, 별도로 풀이하지 않아도 글 뜻을 알았다. 장성하여서는 제자백가를 널리 섭렵하여 암송함에 빠뜨림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적에는 물이 솟아나는 듯이 산이 우뚝 솟은 듯이 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전의 성현이 저술하고 이론을 내세운 것은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후인이 독서하고 학문하는 것은 또한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과문(科文)이나 문장을 꾸미는 습속을 버리고 경서를 배우고 여러 책을 읽어 깊이 연구하고 몸으로 익혀 실천함과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음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격언(格言)과 중요한 가르침이 있으면 반드시 자리 곁에 기록해 두었다.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에는 명(銘)이나 잠(箴)을 새겨 놓고 늘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성종(成宗) 임진년(1472, 성종3)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신년(1476)에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부임하였다. 기해년(1479)에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 좌랑이 되었고, 경자년(1480)에 외직으로 나가 고창 군수(高敞郡守)가 되었다.
다스릴 적에는 한결같이 윤리를 밝히고 풍교를 순후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규약을 엄히 하고 권선징악의 뜻을 보이며 상벌을 미덥게 하니, 시행한 지 몇 년 안 되어 간사하고 교활함이 자취를 감추고 폐단의 근원이 사라졌으며, 관리들은 그 위엄에 복종하고 백성들은 그 덕을 그리워하였다. 경내에 학문하고 효제(孝悌)에 힘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물어보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어느 날 백성 중에 자기 자식이 불효하다고 말하며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공이 마침내 불효하는 사람을 잡아다 효자의 집안에 잡아 보낸 뒤 한 달 남짓 만에 풀어주니,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한결같이 그 효자처럼 부모를 섬겼다. 갑진년(1484, 성종15)에 능성(綾城縣監)으로 관직을 옮겨 다스렸고, 무신년(1488)에 장성(長城)으로 관직을 옮겼으며, 기유년(1489)에 광양(光陽)에 부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으니, 공의 공적을 찬양해 기록한 풍비(豐碑)는 만인이 칭송하였다. 임자년(1492)에 군을 잘 다스린 치적을 높이 평가받아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3)에 효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기미년(1499)에 치사(致仕)하고 낙향하였다.
정묘년(1507, 중종2) 7월 26일에 사제에서 졸하였다. 와리(瓦里) 뒤쪽 산기슭 부갑(負甲)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기계 유씨(杞溪俞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근지(近池)는 사성(司成)이다. 딸은 황보손(皇甫孫), 김석중(金碩中), 조승안(曺承安), 설등산(薜登山), 고상겸(高尙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셋이니, 치함(致涵)은 참봉이고, 치담(致淡)은 부위(副尉)이고, 치호(致湖)는 승지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후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대구(對句) 맞추어서 문장 아름답게 꾸며 抽黃對白
성취하는 바가 무슨 일이랴. 所就何事
돌이켜 요약하고 근원을 궁구하며 反約窮源
착실하고 자신에 절실하게 공부해야 하네. 近裏著己
두텁게 쌓되 조금만 드러내니 厚積薄發
하늘에서 떨어짐이 있네. 有隕自天
출사하여 조정에 나아가 釋褐登廷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자임하였네. 致澤經綸
무성에서 소 잡는 칼을 어디에 쓰리오 武城牛刀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 들리네.주 33) 絃誦有聲
진원은 처벌하지 않았으니 陳元不罪
난봉이 상서로움을 드러내네.주 34) 鸞鳳著祥
고을을 두루 다스려 공적 드러났으니 歷典著績
포상이 융숭하였네. 褒賞隆重
나이 많아 치사하고 산중으로 돌아갔으니 引年歸山
그 풍모와 운치 숭상할 만하네. 風韻可仰
주석 33)무성(武城)에서……들리네
지방을 다스릴 때 예악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선정을 베푼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는 무성(武城) 고을에 갔는데,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 하였다. 《논어 양화(陽貨)》
주석 34)진원(陳元)은……드러내네
후한(後漢)의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주부(主簿) 구람(仇覽)에게 "주부가 진원(陳元)의 과실을 듣고서도 처벌하는 대신에 교화하였는데, 새매의 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힐책하자, 구람이 "나는 새매가 난새나 봉황만은 못하다고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循吏列傳 仇覽》 여기서는 최추가 덕으로 교화한 것을 말한다.
戶曹參判蘭溪崔公墓誌銘
公姓崔。諱湫。字養浩。號蘭溪。貫朗州。有諱知夢。仕麗朝。封東萊侯。食邑千戶。是爲登譜之祖。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皆其名祖也。高祖諱思敬。知龍州事。曾祖諱弘毅。司憲府監察。祖諱得超。掌樂院正。考諱自赫。司醞寺直長。妣靈光金氏縣監時女。正統丙辰十二月三日。公生于京之南部。幼有異質。英邁過人。就傳上學。不煩提督而遵循課程。不常訓釋而曉解文義。及長博涉諸家。成誦無遺。綴文點句。水湧山出。旣而自語曰。前聖所以著書立言者。其意欲何爲。後人所以讀書學問者。亦其意欲何爲。遂廢功令組繪之習。將經學念書。沈潛硏究。體察涵養。夜以繼日。造次不懈。有格言要誨。必書之座側。至於盤孟几杖。有銘有箴。常常寓目以自警焉。成宗壬辰擢文科。授奉常寺直長。尋遷司僕寺正。丙申赴江原都事。己亥入爲吏曹佐郎。庚子出宰高敞。爲政一以明倫理厚風敎爲主。嚴規約示勸懲信賞罰。行之有年。奸猾斂迹。弊瘼滌源。吏服其威。民懷其德。境內有學問孝悌者。必訪問之。厚加賞賜。一日民有來言其子不孝。請爲之懲治。公乃押送不孝之人於一孝子之家。月餘放之。其人歸家。事父母一如孝子人。甲辰移宰綾城。戊申遷長城。己酉赴光陽。所至皆有治績。豐碑萬口。壬子以治郡高第。入爲禮曹參議。丁巳陞戶曹參判。已未告老還鄕。丁卯七月二十六日卒于居第。葬瓦里後麓負甲原。贈戶曹判書。配杞溪俞氏贈貞敬夫人。生一男五女。男近池司成。女適皇甫孫金碩中曺承安薜登山高尙謙。孫三男致涵參奉。致淡副尉。致湖承旨。曾孫以下不錄。後孫昌柱南杓抱家狀。奉謁誌銘。銘曰。抽黃對白。所就何事。反約窮源。近裏著已。厚積薄發。有隕自天。釋褐登廷。致澤經綸。武城牛刀。絃誦有聲。陳元不罪。臠鳳著祥。歷典著積。褒賞隆中。引年歸山。風韻可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