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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통훈대부 한성부 판관 김공 묘지명(通訓大夫漢城府判官金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20
통훈대부 한성부 판관 김공 묘지명
공의 휘는 성준(成俊), 자는 시응(時應), 호는 금계(錦溪)이다. 김씨(金氏)의 본관은 광산(光山)인데, 신라(新羅) 왕자 휘 흥광(興光)이 지파(支派)의 시조가 된다. 이로부터 12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에서 모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휘 류(流)에 이르러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지냈고, 덕룡(德龍)은 대사헌을 지냈으며 휘 신좌(信佐)는 공조 판서를 지냈고, 효충(孝忠)은 관직이 홍문관 응교를 지냈는데, 모두 본조에 들어온 이후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치섬(致銛)인데, 진사이고, 증조는 휘 철(轍)인데, 생원이다. 조부는 휘 정언(廷彦)인데, 생원이고, 부친은 휘 홍(洪)인데, 첨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생원 이학(李鶴)의 따님이다. 명종 임자년(1552, 명종7)에 나주(羅州) 장원도(壯元洞) 옛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격이 조용하고 풍도가 고결하여 많은 사람 속에서 운학(雲鶴)처럼 무리와 견주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어려서 아이들과 물건 파는 놀이를 하였는데, 어른이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 맹자(孟子)가 이 놀이를 할 적에 학궁(學宮)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아마 장돌뱅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어찌 맹자가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듣고 개연히 물리치고 더이상 장난하지 않고 마침내 책을 가지고 서당에 나아가 날마다 수업을 받았다. 영특한 자질로 더욱 독실하게 노력하고 계속하여 매진하니 문장이 넉넉하고 시원하여 훌륭하다는 명망이 당대에 자자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9)에 문과에 급제하고 갑술년(1574, 선조7)에 주서(主書)에 제수되었다.주 32) 정축년(1577, 선조10)에 외직으로 나가 강화부 경력(江華府經歷)이 되었고, 임오년(1582, 선조15)에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청렴하고 신중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공의 중씨(仲氏) 좌랑공(佐郞公)이 일찍이 연이어 당화(黨禍)를 입어 제명에 죽지 못하였기에 공이 늘 통한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당론이 성행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않으니, 공이 스스로 과거의 일을 깊이 교훈으로 삼고는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날마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으로 삼았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등나무 덩굴 비추던 달빛 사랑스러우니 愛藤蘿月
아름다운 자태 옛 모습 드러내네. 娟舊面開
남은 생 얼마나 될까 生能幾許
시절의 경물 재촉하지 말라.時物莫相崔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의 뜻을 알 수 있다.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에 있어서는 간병(看病)할 적에 지극히 근심 하여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슬픔이 절도를 넘었으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출사하여 군주를 섬길 적에는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여 주저하거나 구차한 마음이 있지 않았다. 기미를 보고 용기있게 결단하여 바닷가 산골 마을 고요한 곳으로 멀리 떠나 성내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그럭저럭 지내면서 한평생을 마쳤다. 일관된 의리와 출처의 절도는 먼 후대에서도 늠름하게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갖게 할 것이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10월 13일에 졸하였다. 나주의 세동(細洞) 왼쪽 산기슭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수(鄭琇)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극윤(克潤)으로 훈련원 주부이고, 차남은 방윤(邦潤)으로 통정대부이다. 딸은 원윤(裵元胤)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위(煒), 차자의 아들은 오규(五圭), 중규(重圭),신규(信圭), 환규(桓圭), 참의(參議)에 추증된 만규(萬圭)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10세손 영하(永夏)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같이 명을 짓는다.

은미함도 알고 드러남도 아는 것 知微知彰
고인도 어렵게 여겼네. 古人所難
벼슬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投緩還山
가난한 생활을 즐거워하였네. 樂我瓢簞
등나무 덩굴 비추던 달빛 藤蘿之月
호해의 기개가 있는 벗일세. 湖海之友
시와 술로 날을 보냈으니 文酒日夕
그 풍류와 운치 상상할 수 있네. 風韻可想
주석 32)병자년에……제수되었다
원문에는 '丙子擢文科甲戌除主書'로 되어 있다. 문맥에 근거할 때 병자와 갑술의 간지가 바뀐 듯하다. 갑술년에 급제하고, 병자년에 주서가 된 듯하나, 일단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通訓大夫漢城府判官金公墓誌銘
公諱成俊。字時應。號錦溪。金氏本光山人。新羅王子諱興光爲分系之祖。自此至十二世。在麗朝。皆官平章事。至諱流。官監察御史。諱德龍。官大司憲。諱信佐。官工曹判書。諱孝忠。官弘文應敎。皆入我朝以後顯祖也。高祖諱致銛進士。曾祖諱轍生員。祖諱廷彦生員。考諱洪僉中樞。妣完山李氏生員鶴女。明宗任子生公于羅州之壯元洞舊第。性氣恬靜。風儀高潔在稠人中。如雲鶴之在難群。幼而與群兒戱爲沽衒。長老責之曰。昔孟子作此戱。若非學宮之敎。幾不免爲市賈之人。何以爲孟子乎。公聞之慨然。絶不復戱。遂挾冊就塾。日受其業。以穎悟之資。加篤實之力。接續征邁。贍富宏暢。令聞令望。藉藉一時。丙子擢文科。甲戌除注書。丁丑出爲江華府經歷。壬午入爲漢城府判官。所至皆以淸謹見稱。公仲氏佐郞公。嘗連累於黨禍。未得考終。公常痛恨之。至是黨論盛行。朝家不靖。公深自懲毖。遂棄官歸鄕。杜門斂迹。日以文酒自娛。嘗有詩曰。可愛薦蘿月。娟娟舊面開。餘生能幾許。時物莫相催。此可以見其志矣。事親至孝。侍疾致憂。夜不解帶。執喪哀戚過節。見者釀涕。出身事君。一於誠信。未嘗有依違苟且之意。及其見幾勇決。而遐擧遠引於海山閒寂之濱。不慍不悶。聊以卒歲。其終始之義。出處之節。百世之下。凜凜然令人起敬。庚申十月十三日卒。葬羅之細洞左麓子坐原。配河東鄭氏琇女。生二男一女。男長克潤。訓鍊主簿。次邦潤。連政。女適裵元胤。長房孫煒。二房孫五圭重圭信圭桓圭萬圭。贈參議。曾玄以下不錄。十世孫永夏抱家狀來。謁誌墓之文。銘曰。知微知彰。古人所難。投緩還山。樂我瓢簞。藤蘿之月。湖海之友。文酒日夕。風韻可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