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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약포 이공 묘지명(藥圃李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15
약포 이공 묘지명
공의 휘는 영복(永複), 자는 계실(季實), 호는 약포(藥圃)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다.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가 된다. 휘 선제(先齊) 호 필문(篳門)에 이르러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조원(調元)을 낳았는데,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다. 은일(隱逸)로 여러 번 천거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종덕(種德)인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경(㯳)인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 조부는 휘 필광(必光)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언구(彦矩)이니,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전성중(全聖中)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신미년(1751, 영조27) 5월 22일에 공을 화산리(華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품이 온후하고 굳세고 방정하였다. 집안에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와서는 어른을 섬겨 아우와 자식 된 직분에 매우 충실하였다. 여력이 있고 한가한 날이면 등불을 밝히고 상투를 천장에 매단 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하여 성동(成童)의 나이에 이르러 문사(文詞)가 넉넉하여 시원스레 통하였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끝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과거 공부는 접고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여 애오라지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렸으니,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 성실한 뜻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는 늙은이와 젊은이, 윗사람과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믿고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흉년을 당했을 적에 수확한 벼가 논에 남아 있었는데, 밤에 가서 보니 어떤 사람이 벼를 훔쳐서 가다가 공을 보고 이랑 사이에 숨겼다. 공이 그에게 의리에 대해 말하면서 정성스럽게 깨우쳐 주니 그 사람이 사죄하고 돌아가서는 결국 착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 양상 군자(梁上君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묘간 군자(畝間君子)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웃 마을에 살인자가 있어 장차 관아에 고하려고 하였는데, 마을 사람이 모두 달아나고자 하니, 공이 엄히 금하여 농사 짓는 사람은 농사짓게 하고 독서하는 자는 독서하게 한 다음 공은 뜰을 쓸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서 관원을 맞이하자, 관원이 마음대로 침탈하는 바가 없어 마을이 마침내 편해졌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 슬퍼하기를 예법에 정한 것보다 더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니, 향리에서 감동하여 마침내 상위 관아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무자년(1768, 영조44) 1월 21일에 졸하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론(公論)이 위에서 행해지지 않아 인재가 아래에서 흩어져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이와 같이 의(義)를 행하고 이와 같이 원대한 뜻을 품고 외진 곳에 서 은거하여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공의 입장에서는 실로 보탬이 되거나 손해되거나 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으로 보아서는 어떻다고 하겠는가. 바다에 빠뜨린 진주주 25)는 비록 열 겹으로 감싸서 광채를 숨기더라도 백세의 뒤에까지 절로 가리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배위(配位)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박성곤(朴聖坤)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광국(光國), 광렬(光烈), 광인(光寅), 광진(光震)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사욱(文思郁), 흥덕(興德) 장계인(張啓仁)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한휘(漢徽), 덕휘(德徽)이고, 딸은 강욱(姜旭)에게 출가하였다. 차자의 아들은 만휘(萬徽), 주국(周國), 주장(周璋), 주진(周鎭)이고, 딸은 문영기(文永璣)에게 출가하였다. 셋째는 주국(周國)을 양자로 삼았다. 넷째의 아들은 숙휘(淑徽)이고, 장녀는 경주(慶州) 김일기(金馹基)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밀양(密陽) 박영호(朴英浩)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현손 태휴(泰休)가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시례의 가문에 詩禮門庭
효도와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네. 孝友式穀
광채를 감추었으니 潛光含章
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사람 없었네. 世莫我識
선조가 공덕을 쌓고 누리지 않아 積累不食
후손들이 복 받았네. 雲仍蒙福
지동의 무덤에 池洞斧堂
억만년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億
주석 25)바다에 빠뜨린 진주
보배를 모으는 사람이 바닷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여 빠뜨렸다는 말로,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여 등용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藥圃李公墓誌銘
公諱永複。字季實。號藥圃。李氏系出光山。勝朝左僕射諱珣白爲鼻祖。至諱先齊。號篳門。官大提學。封慶昌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薦至吏曹參議。皆其顯祖也。高祖諱種德。丙亂擧義。贈吏曹參議。曾祖諱㯳。贈僉中樞。祖諱必光。贈掌樂院正。考諱彦矩。同中樞。妣天安全氏聖中女。以英宗辛未五月二十二日生。公于華山里。公天稟溫厚剛方。八事父兄。出事長上。甚得弟子之職。餘力暇日。焚膏懸䯻。刻苦下功。年至成童。文詞贍暢。累捷鄕解。竟屈禮部。於是謝絶擧業。隱居求志。聊以自娛。平心率物。推己恕人。惻怛之情。孚實之意。交濟竝行。是以鄕里之間。老少上下。無不信服。嘗遇飢歲。稷禾棲畝。乘夜行視。有人竊禾以去。見公。匿於畝間。公爲陳義理。曉喩諄諄。其人服罪而去。卒爲善人。人曰。古有梁上君子。今爲畝間君子。村隣有殺人者。將告官。村人皆欲逃避。公嚴禁之。使耕者耕。讀者讀。公掃庭除。具衣冠。出迎官。官人無所肆其侵掠。村中遂晏如也。遭艱。哀毁踰節。廬墓三年。鄕里感賞。遂剡薦于上司。除童蒙敎官。戊子正月二十一日卒。葬池洞前麓午坐原。嗚呼。公論不行於上。而人才散逸於下久矣。以若行義。以若抱負。隱淪遐荒。世無知者。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謂何如耶。滄海遺珠。雖十襲鞱輝。而百世之下。自有不可得而掩者矣。配順天朴氏聖坤女。有四男二女。光國光烈光寅光震。女適南平文思郁。興德張啓仁。長房男漢徽德徽。女適姜旭。二房男萬徽周國周璋周鎭。女適文永璣。三房周國爲後。四房男淑徽。女長適慶州金馹基。次適密陽朴英浩。會孫以下不盡錄。玄孫泰休徵玄石之銘。不敢辭。銘曰。詩禮門庭。孝友式穀。潛光含章。世莫我識。積累不食。雲仍蒙福。池洞斧。堂芬苾千。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