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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유헌 처사 김공 묘지명(榴軒處士金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11
유헌 처사 김공 묘지명
공의 성은 김씨(金氏), 휘는 세익(世翼), 자는 원보(元甫)이며, 유헌(榴軒)은 그의 호이다. 관향은 경주(慶州)이니, 신라(新羅) 때 예원(璿源)이 바로 그 선계(先系)이다.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고 이로부터 고려에 이르렀으니, 이름난 공경(公卿)과 훌륭한 훈신(勳臣),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줄지어 배출되었다. 휘 광우(光宇)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진사(進士)로서 참봉을 지냈으며, 남쪽 지방에 우거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그곳에 살게 되었다. 이분의 아들 세좌(世佐)는 호가 청강(淸江)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應敎)를 지냈다. 이분의 아들 진(璡)은 참봉이다. 이분의 아들 익환(益煥)은 직장(直長)이다. 이분의 아들 희련(希練)은 교리(校理)이니, 문예와 행실로 세상에 이름났다. 이분의 아들 응규(應虯)는 판관(判官)을 지냈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아우 응원(應遠)과 함께 도모하여 왜적을 토벌하였으니, 왜적을 물리친 비석이 있다. 이분의 아들 정길(貞吉)은 부장(部將)이다. 이분의 아들은 담(潭)이다. 이분의 아들 화윤(和允)에게는 남몰래 베푼 은덕(恩德)이 있었다. 이분의 아들 경후(慶厚)는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홍려(弘礪)이다. 조부는 택계(宅繼)로, 호는 수산(睡山)인데, 의(義)를 행한 것으로 칭찬 받았다. 부친은 연흠(廷欽)이다. 모친은 장흥 마씨(長興馬氏)로, 마인학(馬仁㶅)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규중의 법도를 넉넉히 갖추고 있었다. 순묘(純廟) 계유년(1813, 순조13) 3월 27일에 부(府)의 덕제리(德堤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기개가 우뚝하고 재능과 기량이 뛰어났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잠자리를 살피고 문안 인사를 드리며, 집안일을 하느라 분주히 왕래하였으니, 어머니의 뜻을 받들고 몸을 봉양하는 데 에 모든 것을 이바지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안에는 어진 부형이 없고 밖에는 엄한 사우(師友)가 없는 것은 고인이 탄식한 바이다.주 19) 더구나 못나고 보잘것없는 나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으니 누구를 우러러 의지하고 성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같은 고을의 이남파(李南坡), 위호산(魏壺山), 백물암(白勿庵) 같은 이름난 석학들과 교유하여 오고가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너무나도 한스러워하여 매양 아버지란 말이 나오면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하였다. 풍수지리상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이장함에 곡을 하고 발을 구르는 예절과 슬퍼하는 모습을 한결같이 초상을 치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졌지만 3년을 하루같이 질대(絰帶)를 풀지 않고 궤연을 떠나지 않았다. 기일이 되면 지극한 정성으로 치재(致齋)하여 직접 제수를 장만하여 아련하고 엄숙하게 마치 다시 뵙듯이 듯하였다.
몸가짐은 삼갔고 말을 할 적에는 신중히 하였다. 남의 잘못을 들으면 자신의 잘못인 양 여겼고, 남의 선한 행실을 보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친척과 벗들에게는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였다. 은의(恩誼)를 두루 넉넉하게 펼쳐 의탁할 곳이 없는 고아와 과부, 혹 혼기를 놓친 자가 있으면 더욱더 가련하게 여기고 구휼하였다.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고 은혜와 의리가 지극하였다. 친족을 회합하여 고 친목을 다져 계속 끊이지 않게 하였다. 집안에 빚은 술이 있으면 번번이 친구들을 불러 시문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하였다. 봄가을로 마을의 생도(生徒)들을 거느리고 예의를 익히고 경서의 뜻을 강론하여 정성스럽게 이끌어 주니 듣는 자들이 감복하고 기뻐하였다. 일찍이 〈계자부(戒子賦)〉를 짓고, 또 경계하여 말하기를 "척박한 땅뙈기와 초라한 집이라도 분수에 따라 경영하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다. 만약 다시 더 불리고 늘린다면 부지런하고 검소한 마음이 점점 사라져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점점 자라게 되니, 어찌 굳이 지엽적인 의식(衣食)에 구차하게 얽매이겠는가. 고인이 이른바 '뜻을 둔 곳이 있어서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할 겨를이 없다.'주 20)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계미년(1883, 고종20) 11월 14일에 졸하였다. 부(府)의 서쪽 무수봉(舞袖峰) 부병(負丙)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조남수(曺南壽)의 따님이다. 묘소는 합장하였다. 아들은 재호(在浩)이고, 사위는 영광(靈光) 김사현(金泗鉉)이다. 손자는 영국(榮國), 영선(榮善), 영철(榮哲)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젊은 시절에는 효도하고 우애가 있었으며, 늙어서는 예를 좋아하였으니, 내 그 말을 전해 들었고, 내 그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동시대에 이웃 고을에 살면서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하였는데, 도리어 그 유장(遺狀)을 돌아가신 지 20년 뒤에 읽으니, 뒤늦게 추모하는 감회에 예를 다 펴지 못한 마음만 간절하였다. 영국(榮國)이 그 대인의 편지를 전해주고 가장(家狀)을 보여주며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용렬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받들어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정중하게 부탁하니 어찌 차마 끝까지 사양하겠는가. 삼가 가장의 글을 살펴서 차례대로 대략 서술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천도는 겸허하면 더해 주고 天道益謙
인정은 덕을 좋아하네. 人情好德
진실로 군자다웠으니 允矣君子
겸손하고 공경하며 덕이 있네. 謙謙有德
번성한 자손들은 螽斯椒聊
대대로 그 덕을 이루었네. 世濟其德
주석 19)안에는……바이다
송나라 학자 여희철(呂希哲)이 "안으로 어진 부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사우가 없으면서 성공하는 자는 드물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小學 善行》
주석 20)뜻을……없다
《논어》 〈학이(學而)〉편의 주석(註釋)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는 먹을 때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할 때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을 민첩히 하고 말을 삼가며, 도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질정(質正)한다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서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 것은 뜻을 둔 곳이 있어서 여기에 마음이 미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不求安飽者, 志有在而不暇及也.]"라고 하였다.
榴軒處士金公墓誌銘
公姓金。諱世翼。字元甫。榴軒其號也。以慶州爲貫。新羅璿源。卽其先系也。至敬順王而國絶。自是而至麗朝。名卿嵬勳。鴻儒碩德。磊落相望。至諱光宇。入我朝。進士官參奉。僑寓南土。子孫仍居焉。子世佐號淸江。文科應敎。子璡參奉。子益煥直長。子希練校理。文行著世。子應虯判官。丁酉亂。與弟應遠協謀討倭。有却倭碑。子貞吉部將。子潭子和。允有隱德。子慶垕。於公爲高祖也。曾祖弘礪。祖宅繼號睡山。行義見稱。考廷欽。妣長興馬氏仁㶅女。貞靜柔嘉。閫儀贍備。純廟癸酉三月二十七日。生公于府之德堤里。氣宇軒昂。才器穎悟。三歲失怙。奉慈幃。極其孝順。晨昏定省。出入服勞。養志養體。無不畢給。嘗曰。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此是古人所歎。況不肖無狀。早違庭訓者。何所依仰而能有成乎。遂從同郡名碩如李南坡魏壺山白勿庵諸公。往復講磨。未及省顔爲至恨。每語及。泫然流涕。以風水不利。改葬他所。哀戚哭踊。一如祖括。遭內艱。毁瘠過禮。不脫絰帶。不離几筵。三年如一日。遐忌諱之辰。致誠致齊。躬執濯漑。僾然肅然。如復見焉。持身謹勅。出語愼重。聞人之過。若己病焉。見人之善。若己喜焉。族戚知舊。問訊周恤。恩誼遍洽。有孤寡無託。或婚嫁過時者。尤加矜恤。內外斬斬。恩義兩至。會族親修惇睦。源源不替。家有釀。輒邀朋舊。酬唱歡洽。春秋率坊裏生徒。習禮數講經旨。諄諄誘引。聽者感悅。嘗著戒子賦。且戒之曰。薄田敝廬。隨分料理。足以自遺。若復增益之。是勤儉之意浸銷。驕逸之心漸滋。何必營營於衣食之末乎。古人所謂志有在而不暇及者。此也。癸未十一月十四日卒。葬于府西舞袖峰負丙之原。配昌寧曺氏南壽女。墓合祔。男在浩。女靈光金泗鉉。孫榮國榮善榮哲。曾孫以下不錄。嗚呼。幼壯孝弟。老而好禮。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然倂世隣壤。未及拜床。而乃讀其遺狀於觀化二十年之後。追想曠感。徒切靡逮之懷。榮國奉其大人書。以家狀謁文於余。顧陋劣無狀。有難承當。而見屬鄭重。豈忍牢讓。謹按狀辭。序次梗槪。銘曰。天道益謙。人情好德。允矣君子。謙謙有德。螽斯椒聊。世濟其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