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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농헌 권공 묘지명(聾軒權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10
농헌 권공 묘지명
권씨(權氏)는 본래 김씨(金氏)이니 바로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이다. 휘 행(幸)이 있었으니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운 공으로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대대로 문벌 좋은 가문으로 이름나 우리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휘 단(漙)이 있으니, 호는 국헌(菊軒),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기를 건의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성리학은 그가 창도하여 밝힌 것에 힘입었다. 고조는 통덕랑(通德郞) 진성(震成)이고, 증조는 덕의(德義)이고, 조부 동의(東誼)는 호가 양졸당(養拙堂)인데, 한평생 남몰래 베푼 은덕(恩德)이 있었다. 부친은 종수(宗燧)이다. 처음에 청주 한씨(淸州韓氏) 한택기(韓宅基)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후취(後娶)는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유한정(柳漢鼎)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갑자년(1804, 순조4) 12월 16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품이 빼어났고, 성격과 도량은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8세에 부친상을 당해 사모하는 마음이 망극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고기 잡고 땔나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어느 날 마을의 글방을 지나다가 아이들이 독서하는 것을 보고 모친에게 고하여 나아가 배우고자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네가 가서 배우면 집안일은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낮에 일하고 저녁에 독서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부인이 허락하였다. 이날 밤에 즉시 글방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니, 글방의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소학(小學)》을 주었다. 이로부터 엄격하게 학습 과정(課程)을 세워 밤마다 빠뜨림이 없었고, 해가 뜨면 일어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고 땔나무를 등에 진 채로 암송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그 학업에 진전이 있어 공부만 하는 동학보다 나았다. 《소학》을 다 읽었지만 오히려 반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혹 다른 책을 배우기를 권유하자, 공이 말하기를 "많은 책을 보아 정밀하게 익히지 못하느니 적은 책을 보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 낫다. 또 이는 사람 노릇을 하게 하는 책이니 평생 읽더라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할까 근심스러운데, 어찌 구두(句讀)를 대략 이해하고 갑자기 다 읽었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20세가 넘어도 혼인을 서두를 생각을 하지 않자, 혹자가 너무 늦은 것을 염려하니, 공이 말하기를 "고인(古人)이 30세에 가정을 이룬 것과 비교하면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24세에 비로소 하동 정씨(河東鄭氏) 집안과 혼인하였으니, 바로 정효렬(鄭孝烈)의 따님이다. 어느 날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옛날에 가난한 자 중에는 점을 쳐 주고 돈을 받거나 약을 팔아서 생계를 꾸린 자가 있었다.주 15) 이는 비록 선비의 평소 일이 아니지만 역시 가만히 앉아서 독서하는 것이니, 땔나무를 하고 품팔이를 하는 것보다 매우 편할 것이다."주 16)라고 하고, 마침내 간간이 의학(醫學)을 섭렵하였다. 한편으로는 자급하려는 계책이고 한편으로는 널리 구제하려는 계책이었으므로 다 죽어가는 목숨을 살리고 음덕을 쌓아 전후로 대비가 많았다. 일찍 부친을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어머니를 섬길 적에 정성과 힘을 다하였으니, 몸을 편안케 해 주는 물건을 두루 제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모친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을 적에는 거의 노쇠한 나이였는데도 예법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훼손하는 데 이르렀다. 어느 날, 허약해져서 병들었는데, 아들들이 고기를 올려 먹기를 권유하니, 공이 말하기를 "목숨을 상하게 하는 것이 실로 불효이다. 그러나 나의 병은 목숨을 상하게 할 염려가 있지 않으니, 어찌하여 좋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어 예법을 무너뜨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곳은 관로(官路) 근처이고 점사(店肆)와 가까웠다. 마침내 천운산(天雲山)에다가 집을 지어 만년에 한가롭게 지낼 계획을 세웠다. 이윽고 조공 병만(曺公秉萬)도 와서 이웃이 되어 밤낮으로 교유하며 서로 매우 즐겁게 지냈다. 뜰에는 다른 물건이 없고 오직 떨기로 자라는 국화 몇 이랑만 있었다. 매양 날씨가 추워지는 늦가을에 꽃이 만발하면 문득 배회하며 시를 읊조리며 그지없이 사랑스러워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도정절(陶靖節 도잠(陶潛))이 국화를 몹시 사랑한 뜻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곳 가까이에는 운림(雲林)과 천석(泉石)의 승경지가 많아서 매양 나막신 신고 지팡이 짚고서 종일 오르내리며 아득히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몸가짐이 매우 엄격하여 거만한 적이 없었고, 사람을 대할 적에는 매우 공경하여 농담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는 아무리 한량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도 공을 보면 반드시 자신을 단속하였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우선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사기(史記)》를 우선하여 문장을 짓는 계책을 본받지 않았다. 이어서 경계하여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며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고 실제 일이니,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문장을 짓고 부귀해지기를 구하는 것은 그다지 돌아볼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음식은 배고픔을 면할 만큼만 먹고, 의복은 추위를 가릴 만큼만 입으면 된다. 화려하고 진귀한 물건은 다만 덕을 잃고 화를 초래할 뿐이다. 더구나 입는 것은 법복(法服)이 아니고 사용하는 것은 토산품이 아닌 경우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성격은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혹 저술한 것이 있으면 번번이 자질구레한 시문은 던져 버리고 이르기를 "고인의 저술에 갖추어져 있다. 많으면 남고 되풀이하면 어지럽다. 몸소 실행하여 실제에 힘쓰라."라고 하였다. 겉을 보기 좋게 꾸미거나 화려한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갑술년(1874, 고종11)에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을해년(1875) 9월 24일에 별세하였다. 현(縣)의 남쪽 호동(壺洞) 앞 산기슭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6인이니 종익(鍾翼), 종우(鍾禹), 종모(鍾謨), 종길(鍾吉), 종열(鍾悅), 종규(鍾規)이고, 손자는 7인이니 홍수(弘洙), 인수(寅洙), 학수(學洙), 갑수(甲洙), 용수(龍洙), 만수(萬洙), 익수(益洙)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춘식(春植)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아, 춘식은 나와 교유한 지 몇 해 되었는데, 빼어나고 삼가함을 보니 참으로 법도 있는 가문의 유풍이 있었다. 이는 그 신령한 지초(芝草)와 단맛의 샘물은 실로 응당 원인이 있고,주 17) 석과(碩果)의 종자(種子)주 18)가 되는 까닭이 또 처음부터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선과 인을 쌓았지만 積善累仁
보답을 받지 못했네. 不食其報
후손에게 남겨주었으니 以遺後昆
남은 경사 널리 미치리라. 餘慶斯普
주석 15)점을……받으며
군평(君平)이라는 자(字)로 더 잘 알려진 전한(前漢)의 술사(術士) 엄준(嚴遵)은 촉 땅 성도(成都) 시내에서 점복(占卜)으로 생활하면서 하루에 100전(錢)만 벌면 문을 닫고 방 안에 들어앉아 《노자(老子)》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고 한다.《漢書 王貢兩龔鮑傳》후한(後漢)의 한강(韓康)은 산에서 약초를 캐 장안(長安)에서 팔다가, 약을 사러 온 여인이 자기 이름을 거론하자, 숨어 살려는 본의가 어긋났다며 패릉산(霸陵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고 한다.《後漢書 逸民列傳 韓康》
주석 16)이는……것이다
《擊蒙要訣》 〈處世章〉에 "과거 공부가 비록 이학(理學)과는 다르나 역시 앉아서 글 읽고 글 짓는 것이다. 농사짓고 품팔이하고 쌀을 등에 지는 것보다는 백 배 이상 편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17)신령한……있고
좋은 조상이 있어야 좋은 자손이 있다는 뜻이다. 옛말에 "신령한 지초(芝草)와 단맛의 샘물은 반드시 뿌리와 근원이 있다."라고 하였다.
주석 18)석과(碩果)의 종자(種子)
평생에 자신의 복을 다 누리지 않아 자손이 그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주역》〈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음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허물리라.[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라고 하였다.
聾軒權公墓誌銘
權本金氏。卽新羅宗姓也。有諱幸。佐麗太祖有功。賜姓權。世著勳閥。爲東方巨族。有諱漙。號菊軒。諡文正。嘗以朱子四書集註。建白刊行。東方性理之學。其倡明之力也。高祖震成通德郞。曾祖德義。祖東誼號養拙堂。世有隱德。考宗燧。初娶淸州韓氏宅基女。系娶高興柳氏漢鼎女。公以純祖甲子十二月十六日生。天姿挺異。性度寬仁。八歲遭外艱。孺慕罔極。家貧漁樵供母。事無鉅細。必稟而行。一日過村塾。見群兒讀書。告於母夫人。欲孰學。夫人曰。汝若就學。家務委誰。對曰。晝而幹務。夜而讀書何如。夫人許之。是夜卽就塾請敎。塾師奇之。授以小學書。自是嚴立課程。逐夜無闕。日出而作。帶經而鋤。負薪而吟。未幾何。其業之進。勝於同學之專業者。讀小學訖。猶循環不已。或勸授他書。公曰。多之而粗。不若寡之而精。且此書是做人樣子。平生讀之。猶患不給。豈可粗解句讀而遽云了業耶。年踰二十。未嘗有汲汲營娶之意。或慮其太晩。公曰視古人三十而有室。不其太早乎。二十四始委禽於河東鄭氏之門。卽孝烈之女也。一日喟然歎曰。古之貧者。有賣卜賣藥以資其生者。此雖非士者雅業。其爲坐而讀書。則便於負薪行傭遠矣。遂間涉醫學。一以爲自給之計。一以爲廣濟之策。其保活殘命。積累陰德。前後備多。嘗恨早孤。未得逮養。事慈幃。罄竭誠力。便身之物。無不周給。及其遭故。年幾衰艾。而致毁踰禮。一日羸疾作。諸子進肉物。勸之食。公曰。傷生固爲不孝。然我疾非有傷生之慮。則何爲而恣食珍羞以壞禮防乎。所居傍官路。近店肆。遂卜築於天雲山中。爲晩年養閒之計。己而曺公秉萬。亦來結隣。日夕遊從。相得甚歡。庭除之間無他物。惟有嚴菊數畦。每當寒天晩節。開花燭漫。輒徘徊吟哦。愛之無己。因曰。吾今而後。知陶靖節偏愛之意也。近居多雲林泉石之勝。每一笻一屐。竟日遊陟。悠然忘歸。持身甚嚴。未嘗箕踞。接人甚敬。未嘗戱謔。是以鄕里間。雖號慢浪之人。見公必加斂飭。敎子孫。必以小學爲先。不效時人先史記作文詞計。因戒之曰。事親敬長。修身謹行。此是人生本分實事。吾之所望於汝等者也。若其作文章求富貴。甚非所願也。又曰。食取克腹。衣取蔽寒。若華嚴珍。怪之物。適以喪德而速禍。況所着非法服所用非土物乎。汝等戒之。性不好著述。或有所述。輒投之散墨曰。古人之述備矣。多之則剩反之則亂。其躬行務實。不求外華。類如此。甲戌以壽陞通政。乙亥九月二十四日考終。葬于縣南壺洞前麓酉坐原。男六人。鍾翼鍾禹鍾謨鍾吉鍾悅鍾規。孫男七人。弘洙寅洙學洙甲洙龍洙萬洙益洙。曾玄以下不盡錄。曾孫春植奉家狀。託以幽道之銘。嗚呼。春植從余游有年。見其秀爽謹飭。儘有法家餘風。此其靈芝醴泉。固應有自。而所以爲碩果種子者。又未始不在於此也。銘曰。積善累仁。不食其報。以遺後昆。餘慶斯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