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겸와 민공 묘지명(謙窩閔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09
겸와 민공 묘지명
호남은 문헌(文獻)이 있는 곳으로 시례(詩禮)와 행의(行義)로 저명한 가문이 많은데 겸와(謙窩) 민공(閔公)의 가문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공의 휘는 삼현(三顯), 자는 중덕(仲德)이니, 의암(義庵) 휘 회삼(懷參)의 후손으로, 사월헌(沙月軒) 휘 상동(相東)의 손자이며, 교채와(咬菜窩) 선생 휘 백우(百)의 둘째 아들이다. 선생은 송 문간공(宋文簡公)을 스승으로 섬겼고, 문장과 경술(經術)이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받았으며, 저술로 《심경집해(心經集解)》, 《홍범수해(洪範數解)》, 《주서보주(朱書補註)》가 세상에 전한다. 모친은 나주 임씨(羅州林氏)로, 임세진(林世鎭)의 따님으로, 승지 임붕(林鵬)의 후손이다. 법도 있는 가문의 후손으로 타고난 성품이 곧고 얌전하여 여자로서의 덕성을 매우 잘 갖추어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따라 뜻을 세워 학문하여 백씨(伯氏) 학생공(學生公), 종형(從兄) 진사공(進士公)·참판공(參判公)과 함께 나란히 수업을 받아 명성이 자자하였으니, 사람들이 삼봉팔용(三鳳八龍)주 13)에 견주었다. 장성하여서는 홍매산(洪梅山 홍직필(洪直弼)), 기노사(奇蘆沙 기정진(奇正鎭)) 두 선생의 문하에서 노닐면서 강론하고 논변하여 더욱 스스로 확충하였다. 오서오경(五書五經)으로부터 염락(濂洛)주 14)의 여러 서적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두루 폭넓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의리의 귀착점을 넓혀 마음을 보존하고 자신을 단속하며 세상일에 응수하고 외물에 응함에 확고하게 이루어진 규범이 있어 평탄히 행하여 발과 눈이 모두 이르고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여 덕기(德器)가 이루어졌으니, 뭇사람들과 아주 달랐다.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는 군주를 섬기는 계제(階除)이니 선비 된 자는 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매양 한가한 날이면 공령(功令)과 근체(近體)의 문장에 힘을 기울이니, 문사가 뛰어나 당시에 칭송을 받았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였지만 예부시(禮部試 대과)에서 낙방하였는데 언제나 당락(當落)에 개의치 않았다. 어떤 사람이 뇌물을 주어서 유사(有司)에게 청탁하기를 권유하니, 공이 말하기를 "당락은 하늘에 달렸으니, 내가 어찌 위험한 짓을 하여 요행을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춘첩시(春帖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운명에 달린 빈천은 버릴 수 없고, 분수가 아닌 부귀는 구할 수 없다.[有命貧賤不可去, 非分富貴不可求.]"라고 하였다. 매양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단정히 앉아 칠서(七書) 가운데 한 책 및 정자와 주자의 책, 〈이소경(離騷經)〉,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의 글을 돌아가며 암송하였다. 물러나서는 여러 종형제와 책상을 마주하여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종일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겸손으로 자기를 단속하였다. 친족에게는 은애로 대우하고 벗에게는 신의로 대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사람이 되는 도리가 어떠한지, 사람이 독서하는 의미가 어떠한지를 알려 주었는데 곡진하고 간절하여 듣는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이에 경전을 가지고 찾아오는 등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일찍이 말하기를 "근세 시속의 풍조가 크게 무너졌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주역》〈규괘(睽卦)〉 상(象)에 '군자가 보고서 같으면서 다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남이 야박하게 하면 나는 후하게 하고, 남이 탐욕을 부리면 나는 청렴하게 하고, 남이 속이면 나는 정도(正道)로 하고, 남이 사사롭게 하면 나는 공적으로 하고, 남이 사치하면 나는 검소함으로 하고, 남이 게으르면 나는 부지런함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를 일일이 자신에게 돌이켜 적용한다면 아마 이욕만 넘실대는 세태에서 저절로 벗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세의 주기설(主氣說)에는 조금의 의혹도 없다. 가령 중화(中和)에 대해 말해보자면 중(中)은 미발(未發)의 이(理)인데 이의 체(體)이고, 화(和)는 이발(已發)의 이(理)인데 이의 용(用)이다. 만일 화(和)를 기(氣)로 여기는 것이 근일의 의론과 같다면 이(理)와 사(事)가 각각 양절(兩截)이 되고 분수가 구분되어 기(氣)보다도 중하게 되어 버리니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자년(1888, 고종25) 10월 6일에 별세하였으니, 태어난 을해년(1815, 순조15)으로부터 74년이 된다. 현(縣)의 원동(院洞) 괘등등(掛燈嶝)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충주 박씨(忠州朴氏)로, 박효조(朴孝祖)의 따님인데, 눌재(訥齋) 선생 박상(朴祥)의 후손이다. 온순하고 자혜로워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학(), 전(塼)이고, 딸은 이기전(李基琠), 이용헌(李龍憲), 유영주(柳永主)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아, 여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이 말하기를 "안으로 어진 어버이와 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과 벗이 없으면서 성공하는 자가 드물다."라고 하였다. 지금 교채와(咬菜窩) 선생 같은 어진 아버지가 있고, 임 부인(林夫人) 같은 어진 어머니가 있고, 진사공(進士公)과 같은 어진 형제가 있고, 매산(梅山)과 노사(蘆沙) 같은 어진 스승과 벗이 있으니 비록 성공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갈고닦고 침잠하여 당대에 훌륭한 유자가 된 이유이다. 그런데 도(道)가 시대와 어긋나 시험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한스러워하였다. 그러나 유풍과 여운은 집안에서 계승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져 먼 후대에서도 징험되고 법식이 될 것이니, 어찌 당대의 실의(失意)와 득의(得意)를 가지고 실망하거나 의기양양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평리(坪里)에서 참판공에게 인사드리고 나아가 사촌(沙村)에서 공에게 인사드렸는데, 그 기상이 단정하고 엄정하며 행동거지가 온화하고 점잖은 것을 보았고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 옛날 현인의 법언(法言)와 격론(格論)이어서 완전히 심취하였다. 물러난 뒤에 다시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통한은 비록 간절하지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공의 장자 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순서를 잡아서 기록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복천의 남쪽 福川之南
산수가 훌륭하네. 山明水清
덕 있는 가문에 인재 모이고 德門聚星
온화한 기운 정기를 모으네. 和氣毓精
교채와(咬菜窩)는 후손이 있고 菜窩有胤
사애(沙厓)는 어진 형이었네. 沙厓難兄
선대의 훌륭함에 영향을 받았고 擩染箕裘
전범을 계승하였네. 似述典刑
초야에서 한가롭게 지냈으나 婆娑邱園
감추어진 문채 은연중에 드러났네. 絅錦闇章
훌륭한 운치 빼어난 자취를 偉韻逸躅
잊을 수 있겠는가. 俾也可忘
괘등등(掛燈嶝) 기슭에 掛燈之麓
의복을 갈무리하였네. 衣履是藏
봄가을로 향기로운 제수 올리니 春秋芬苾
자손들이 번성하네. 螽斯繩繩
주석 13)삼봉팔용(三鳳八龍)
당(唐)나라 설원경(薛元敬)이 젊어서 숙부 설수(薛收), 족형(族兄) 설덕음(薛德音)과 같이 문재(文才)로 이름이 났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하동(河東)의 삼봉(三鳳)이라고 하였다. 《舊唐書 薛收列傳》 동한(東漢) 때 순숙(荀淑)에게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왕(荀汪),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전(荀專) 등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나다고 이름이 나서 당시 사람들이 순씨팔룡(荀氏八龍)이라고 불렀다. 《後漢書 荀淑列傳》
주석 14)염락(濂洛)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 등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을 말한다.
謙窩閔公墓誌銘
湖南文獻之地。以詩禮行義。著爲名家者多矣。而謙窩閔公之家。其一也。公諱三顯。字仲德。義庵諱懷參后。沙月軒諱相東孫。咬菜窩先生諱百次子。先生師事宋文簡公。文章經術。望重一世。所著有心經集解。洪範數解。朱書補註。行于世。妣羅州林氏世鎭女。承旨鵬后。以法家遺裔。天資貞靜。壺儀閨範。有女士風。公自幼。遵循庭誨。立志爲學。與伯氏學生公。從兄進士公。參判公。共方連業。聲譽譪蔚。人以三鳳八龍擬之。及長。遊於洪梅山奇蘆沙兩先生之門。講討問辨。益自展拓。自五書五經至濂洛群書。無不淹貫該洽。以博其義理之歸。以之存心行已。以之酬世應物。的有成規。而坦然由之。足目俱到。心口相應。德器成就。大異衆人。嘗曰。料擧是事君階除。爲士者所不可廢。每以餘日。着力於功令近體之文。文詞斐然。見稱一時。屢魁鄕解。屈於禮部。未嘗以得失關心。或勸行關節以干有司。公曰。得失天也。吾豈行險而徼幸者耶。嘗題春帖詩曰。有命貧賤不可去。非分富貴不可求。每日夙興端坐。輪誦七書中一書及程朱書離騷經歸去來辭等書。退而與群從昆季。對床硏討。終日靡懈。以誠敬存心。以謙恭持已。遇族戚以恩愛。待朋友以信義。敎人必告所以爲人之道何如。人所以讀書之意何如。諄諄懇懇。聞者感服。執經踵門。信從日衆。嘗曰。近世俗尙大壞。誠可痛歎。易暌之象。君子以同而異。如人以薄我以厚。人以貧我以廉。人以譎我以正。人以私我以公。人以奢我以儉。人以惰我以勤。如此之類。一一反之。庶幾自援於滔滔矣。又曰。近世主氣之說。此非細誤。如言中和。則中是未發之理而理之體也。和是已發之理而理之用也。若以和爲氣。如近日之論。則理事各成兩截。而分數段落。歸重於氣。其可乎。戊子十月六日考終。距寅降乙亥爲七十四。葬縣之院洞掛燈嶝乾坐原。配忠州朴氏孝祖女。訥齋先生祥后。溫順慈惠。克有婦德。二男三女。嶨。塼。李基琠李龍憲柳永主。嗚呼。呂榮公曰。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而能有成者少矣。今有父之賢如咬菜窩先生。母之賢如林夫人。兄弟之賢如進士公。師友之賢如梅山蘆沙。則雖欲其無成得乎。此所以磨礱沈灌以成一世之偉儒也。道與時違。未有所試。識者茹恨。然遺風餘韻。述之在家。傳之在人。足可以徵式於百世。豈以一時之詘伸爲低仰耶。余嘗拜參判公於坪里。進而拜公於沙村。見其氣象端嚴。動止雍容。終日語皆。古賢哲法言格論。充然心醉。退未再造。而公已辭世矣。靡逮之恨。雖切何補。公長子嶨。奉家狀以請幽道之銘。謹据狀而爲之序次焉。銘曰。福川之南。山明水清。德門聚星。和氣毓精。菜窩有胤。沙厓難兄。擩染箕裘。似述典刑。婆娑邱園。絅錦闇章。偉韻逸躅。俾也可忘。掛燈之麓。衣履是藏。春秋芬苾。螽斯繩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