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사헌부 감찰 강공 묘지명(司憲府監察姜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08
사헌부 감찰 강공 묘지명
공의 성은 강씨(姜氏), 휘는 필영(弼永), 자는 찬서(贊瑞)이다. 세계(世系)는 진주(晉州)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 국자 박사(國子博士) 계용(啓庸)의 후손이다.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을 전해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중엽에 이르러 봉람(鳳覽)이 있으니, 호는 석포(石浦)로, 도승지(都承旨)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고조 택보(澤輔)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증조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태형(泰衡)으로, 호는 도능암(道能庵)이다. 조부는 좌승지에 추증된 휘복(彙稪)이다. 부친은 호조 참판에 추증된 학조(鶴照)이다. 모친은 해남 윤씨(海南尹氏)로, 윤규하(尹奎夏)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3월 30일에 부(府)의 유치리(有治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유복자로, 차츰 자라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기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길러 주신 것을 생각하여 어렵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심력(心力)을 다 기울였다. 8세때 땔나무를 팔아 등에 쌀을 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만일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가 있으면 시냇가의 나물을 캐고 쌀뜨물을 구걸하여 국을 끓여 올렸다. 이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 슬프게 소리내어 우니 이웃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겨 매양 쌀독이 비면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가 명하면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순종하였고, 어머니에게 병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 지극히 성실하고 측달한 마음은 천성(天性)에 근본하여 행위에 드러났다. 남들보다 뛰어난 행실이 많았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혀를 차며 찬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훗날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밀양 박씨(密陽朴氏) 홍준(弘俊)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박씨는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년에 이르러 집안 살림이 조금 넉넉해졌다. 모친상을 당해 온갖 의례와 절차는 예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하나하나 의례와 절차에 따라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한번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통한으로 여겨 태복(稅服)주 11)을 입고자 하다가 선유(先儒)의 설을 보고 마침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래도 기일이 되면 지성으로 애통해하여 소복(素服)을 입고 소식(素食)을 함으로써 종신토록 상을 치른다는 뜻을 부쳤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 매우 독실하여 글방을 짓고 서책을 소장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휴식하는 곳으로 삼고, 스승을 엄선하고 벗을 가려 사귀게 하여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아주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무도한 무리 들이 난을 일으키자주 12) 자손을 경계하여 신신당부하고 엄히 신칙하여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소모사(召募使)가 듣고서 가상하게 여겨 정문(旌門)을 세워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서 문에 '의문(義門)'이라고 썼다.
공은 기개가 높고 타고난 성품은 낙천적이었다. 내외 친족으로부터 원근의 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겁게 은덕을 베풀었으니, 차마 실정이 아닌 것으로 속이지 않았고 감히 의롭지 못한 짓을 하지 않았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고, 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아들은 인형(仁馨), 예형(禮馨), 의형(義馨), 지형(智馨)이고, 손자는 진섭(晉燮), 병섭(井燮), 봉섭(鳳燮)이다. 이외의 손자들은 어리다. 병신년(1896, 고종33) 2월 26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67세이다. 유치리(有治里) 예상등(禮尙嶝) 오좌(午坐)에 장사 지냈다.
아, 진섭은 나와 교유한 지 몇 년 되었다. 그는 영특하며 삼가고 조심하여 공이 살아 계실 때 큰 사랑을 받았는데, 공이 별세하고 상례를 마치기 전에 또 이렇게 요절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의형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니,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기쁜 마음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니 怡愉洞屬
효성스러운 사람이라네. 孝子之人
질박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니 質實勤儉
선배의 자격을 갖춘 부류일세. 先進之倫
가르침에는 오로지 경전을 중시하였으니 敎重一經
훌륭한 자제들 참신하도다. 蘭玉鮮新
예상의 산기슭에 禮尙之麓
천추에 향기로운 제물을 올리네. 芬苾千春
주석 11)태복(稅服)
세월이 이미 지난 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추후에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대공(大功) 이상의 복은 태복을 하고 소공(小功)은 가벼운 복이라 하여 태복을 하지 않았다. 《禮記 檀弓上》
주석 12)갑오년……일으키자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가리킨다.
司憲府監察姜公墓誌銘
公姓姜。諱弼永。字贊瑞。系出晉州。高麗博士啓庸后。文學仕宦。世傳煒燁。爲東方巨族。至中葉。有鳳覽。號石浦。都承旨弘文提學。丙子亂。倡義旅。高祖澤輔。文章名世。曾祖贈司僕寺正。泰衡。號道能庵。祖贈左承旨彙稪。考贈戶曹參判鶴熙。妣海南尹氏奎夏女。以純廟庚寅三月三十日。生公于府之有治里。公以遺腹孤孩。稍長而痛嚴顔之未逮。念慈育之劬勞。艱難拮据。備極心力。八歲賣薪負米。以供親旨。如有未繼。則采溪澗之毛。乞浙米之汁。作羹以進。因不勝悲泣成聲。隣理憐之。每邁空匱。多有助之者。親有命。如恐不及。親有疾。涕泣不離。側其至誠惻怛。根於天性而著於施爲。多有出人之行。聞者無不嘖嘖歎賞曰。此兒其必有後。委禽密陽朴氏弘俊女。朴氏孝養厥姑。夙夜靡懈。至中身。家力稍饒。遭內艱。凡百儀節。問于識禮處。一一遵循。俾無遺憾。嘗以早違嚴庭爲至恨。欲稅其服。見先儒說。而遂不果行。遇忌辰。至誠哀痛。素服素食。以寓終身之喪。敎子孫甚篤。結塾儲書以資其修息。擇師取友以正其趨向。甲午匪類之亂。戒子孫。申申嚴勅。俾不染跡。召募使聞而嘉之。旌門稱賞。因書門扉曰義門。公氣宇軒昂。天性樂易。自內外族戚至遠近朋知。皆歡然有恩。不忍以非情欺之。不敢以非義加之。戊子除司憲府監察。又陞嘉善。男仁馨禮馨義馨智馨。孫晉燮井燮鳳燮。餘幼。丙申二月二十六日終。享年六十七。葬有治禮尙嶝午坐。嗚呼。晉燮從余遊有年矣。其穎悟謹勅甚爲公當日之鍾愛。誰知公歿未終喪。而又此夭逝耶。義馨持家狀。屬余以誌諸幽道者。嗚呼。豈忍辭。銘曰。怡愉洞屬。孝子之人。質寶勤儉。先進之倫。敎重一經。蘭玉鮮新。禮尙之麓。芬苾千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