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금방 안공 묘지명(錦舫安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07
금방 안공 묘지명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선조의 업적을 지킴)의 어렵고 쉬움에 대해서는 고인의 설에 자세하다. 어떤 가문의 선조가 바야흐로 창업할 적에는 모두 노심초사하며 온갖 고초를 겪고, 가시덤불 헤치며 비바람을 무릅쓰고 거의 망하려는 지경에서 보존하고 거의 죽으려는 지경에서 살아나 겨우 가문을 세워 자손을 공고하게 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자손이 된 자는 일찍이 조금의 공로나 수고로움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평안과 부귀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먹는 것을 계산하고 일에 걸맞게 하는 것은 또한 하는 일 없이 얻어먹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편안하고 부유함에 익숙하면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고, 풀어지고 방탕함을 좋아하면 게으른 마음이 싹트기 마련이니, 게으르고 교만하고 사치하면 패가망신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즐거움을 누리겠는가.
이로써 말한다면 어떤 가문의 자제로서 끝까지 수성하는 자는 겉으로는 마치 도모하는 것이 없는 듯하지만 필시 그 마음 씀이 조심성 있고 치밀하여 남들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위태로울 적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망할 적에 망함을 잊지 않는 것은 실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보존될 때 망함을 잊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는 기미를 봄이 심오한 자가 아니면 능하지 못하니,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말에 대해서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금방(錦舫) 안공(安公)의 어짊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 공의 대인(大人) 덕림공(德林公)이 창업하고 공이 이어서 수성하였으며, 또 자신이 수성한 것을 가지고 그 자식을 가르쳐 수성이 무궁함에 이르게 하였으니, 대대로 계승하는 가풍과 가법의 아름다움은 사림(士林) 집안의 모범이 되었다.
공의 휘는 영(潁), 자는 도형(道亨), 금방(錦舫)은 그의 호이다. 안씨(安氏)는 계보가 순흥(順興)에서 나왔으니, 문성공(文成公)의 휘는 유후(裕后)이다. 3대를 내려와 휘 원형(元衡), 시호 문혜(文惠)에 이르렀으니, 공로로 죽성(竹城)에 봉해졌기에 자손이 이 때문에 관향으로 삼았다. 2대를 전해 내려와 직제학 휘 정생(挺生)에 이르러 조선에서 벼슬하였다. 그분의 아들 을겸(乙謙)이 영암 군수(靈巖郡守)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 고을에 거주하였다. 그분의 아들 여주(汝舟)는 직장(直長)을 지내고 장흥(長興)에 우거하였는데, 자손이 이 때문에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9대를 내려와 휘 한징(漢徵)에 이르렀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택인(宅仁), 호 해옹(海翁)인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조부는 휘 몽원(夢元)이고, 부친은 휘 수책(壽策), 호가 덕림(德林)이다. 모친은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진방(李震芳)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지녔다. 순묘(純廟) 신사년(1821, 순조21) 10월 1일에 강진(康津) 용정리(龍亭里)에서 공을 낳았다. 무신년(1848, 헌종14)에 능주(綾州)에 우거하다가 병인년(1866, 고종3) 7월 6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46세이다. 고을의 서쪽 작약산(芍藥山) 아래 창포등(菖蒲嶝)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최수완(崔粹玩)의 따님인데, 온순하고 행실이 얌전하였으며 예법을 어김이 없었다. 후사가 없어서 차자의 소생인 국정(國禎)을 양자로 들였다. 3녀가 있으니, 문방호(文邦浩), 민정호(閔禎鎬), 이교일(李敎馹)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훌륭하였다. 어려서 숙사(塾師)에 나아갔는데, 걸음걸이가 이미 단정하였다. 날마다 학습의 과정(課程)을 세웠는데 한결같이 《소학(小學)》에 근거하여 진행하였다. 자라서는 근체시(近體詩)와 당시 유행하는 문체를 함께 익혀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니, 이는 부모의 기대와 가문을 위한 계책으로 어쩔 수 없이 과거 공부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청탁하거나 요행을 바라지 않았으니, 득실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해드리고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 사계절의 향사(享祀)에는 돌아가신 선조를 서글피 사모하는 마음을 지극히 하였으며, 원근에 있는 묘소에는 성묘하는 절차를 신중히 행하였다. 내외 친족에게는 은혜와 의리를 두루 베풀었으며, 향당의 붕우에게는 빠짐없이 안부를 물었다. 매양 명절이나 좋은 계절을 만나면 번번이 동지들과 술을 가지고 명산의 경치 좋은 곳에서 시를 읊조리다가 날이 저물면 돌아오곤 하였으니, 담박한 마음과 뛰어난 흥취는 세속의 번잡함을 시원스럽게 벗어난 의표가 있었다. 아, 이는 공이 자신을 수양하고 의리를 행하여 대대로 수성하는 효가 될 것이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나는 공에 대해서 집안 간의 교분이 있었지만 한스럽게도 한번 찾아뵙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었다. 백발 노년에 이르러 공의 아들 국정(國禎)과 더불어 막역한 교분을 맺어 뒤미처 공의 맑은 행실과 아름다운 법도를 더욱 자세하게 들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옛날을 회상하고 오늘날의 세태를 살펴보니 서글픈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이에 묘소의 지문(誌文)을 지을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아버지가 시작하고 자식이 계승하는 것 父作子述
천지간의 당연한 이치일세. 天經地義
왕왕 실패하는 것 往往覆墜
터럭을 태우는 것처럼 쉽네. 燎毛之易
탁월한 금방 공은 有卓錦舫
온후하고도 공손하였네. 溫溫其恭
시례로 자신을 단속하였고 詩禮律已
화락함으로 풍도를 이루었네. 愷弟成風
위로는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았고 上無所忝
아래로는 후손에게 전해 주었네. 下爲可繼
남은 경사 이어져 餘慶綿綿
천년만년 누리리라. 於千萬世
錦舫安公墓誌銘
創業守成之難易。古人之說詳矣。夫人家祖先。方其創業也。莫不困心衡慮。勞筋苦骨。披荊棘櫛風雨。存於幾亡之中。生於幾死之餘。僅能樹立家戶。以爲輩固子孫之計。爲子孫者。曾無錙銖之功。涓滴之勞。而坐享平康富貴之樂。其計食稱事。亦可爲不素餐者歟。然人情狃安富則驕侈生。樂舒肆則怠惰萌。怠惰驕侈。敗於不暇何以享其樂乎。以此言之。人家子弟終始守成者。外若無所猷爲。而必其用心謹密。行人所不能行者多矣。危不忘危。亡不忘亡。固人之所可能。而至於安不忘危。存不忘亡。則非見幾之深不能也。守成之難於創業。孰云不可。吾於是乎知錦舫安公之賢。爲不偶爾也。公大人德林公。旣創業之。公繼而守成之。又以守成於已者。敎誨其子。使之守成於無窮。而世述之風。家法之美。爲士林家楷範。公諱潁。字道亨。錦舫其號也。安氏系出順興。文成公諱裕后也。三傳至諱元衡謚文惠。以功封竹城。子孫因貫焉。二傳至直提學諱挺生。仕本朝。子乙謙。宰靈巖。因居是郡。子汝舟直長。寓居長興。子孫因居焉。九傳至諱漢徵。卽公之高祖也。曾祖諱宅仁號海翁。文學名世。祖諱夢元。考諱壽策號德林。妣全州李氏震芳女。婦德甚備。以純廟辛巳十月一日生公于康津龍亭里。戊申寓綾州。丙寅七月六日卒。享年四十六。葬于州西芍藥山下菖蒲嶝酉坐原。配海州崔氏粹玩女。婉順貞靜。閫範無違。無嗣。國禎以次房出。入爲後。有三女。適文邦浩閔禎鎬李敎馹。公天稟甚美。幼就塾師。步趨已正。日用課程。一依小學書。及長。兼習近體時文。葩藻贍麗。盖以父母之望。門戶之計。而不得不屈首場屋。然亦不爲干託僥倖之計。於得失泊如也。事親盡歡。執喪盡哀。四時享祀。極其霜露之感。遠近墳墓。愼其省掃之節。內外族戚。恩義周洽。鄕黨朋友。存訊無闕。每値良辰嘉節。輒與同志携酒。暢詠於名山水石之間。竟日而還。其沖矜逸趣。灑然有出塵之標。嗚呼。此公所以修身行義而爲世世守成之孝者也。曷不偉哉。余於公。有通家之誼。恨未得一拜。而公已千古矣。豈知至於老白首。而得與公之子國禎爲莫逆之交。追聞其行範爲加詳哉。緬古觀今。不勝悲悵之感。玆於幽堂之誌。不敢以非其人辭。銘曰。父作子述。天經地義。往往覆墜。燎毛之易。有卓錦舫。溫溫其恭。詩禮律已。愷弟成風。上無所忝。下爲可繼。餘慶綿綿。於千萬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