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죽정 문공 묘지명(竹汀文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05
죽정 문공 묘지명
관산부(冠山府) 유치방(有治坊) 작소동(雀巢洞)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간방(艮方 동북방)을 등지고 곤방(坤方 서남방)을 향한 것이 바로 고(故) 효자 죽정(竹汀) 문공(文公)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세월이 오래 되었지만 묘지명이 없었다. 어느 날 후손 진호(振浩)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가천(佳川)에 있는 나의 집으로 찾아와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대저 훌륭한 글이 널리 알려져 백세토록 잊히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도리어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러한 사람에게 부탁한단 말인가. 다만 쇳조각과 흩어진 구슬이 유실될까 염려하여 제때에 수습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갈고 다듬어 빛나게 하는 것은 조만간에 저절로 합당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성은 문씨(文氏), 휘는 종현(宗鉉), 자는 국현(國賢)이니, 순묘(純廟) 정축년(1817, 순조17) 1월 29일에 대리(大里)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집안이 대대로 너무나 가난하여 재물이 될 만한 것이 없어 농사짓고 고기 잡고 나무하며 힘든 일도 부지런히 하여 부모님을 봉양하되 몸에 맞거나 입에 맞는 것이면 전부 바치지 않음이 없었다. 한가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방에 가서 먹을 갈고, 글을 읽고 외우며 연구하여 지식을 쌓아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다. 부모님을 간병할 적에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끊어지려는 목숨을 살렸으며, 거상(居喪)할 적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고, 벗들은 그 행실에 탄복하여 여러 번 추천하려는 의론이 있었다. 공이 듣고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설령 탁월한 행실이 있더라도 본래 자식의 본분이니, 실로 구구하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내가 한 바는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없는데 도리어 이렇게 추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하늘과 사람을 속이는 것이니 너무나 큰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힘껏 거절하였다.
금상(今上) 을유년(1885, 고종22) 9월 27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였으니, 태어난 정축년으로부터 69년 후이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 행장을 지어서 관아에 보고하고, 이어서 암행 어사에게 보고하고 또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문씨(文氏)는 세계가 남평(南平)에서 나왔다. 신라(新羅) 무성공(武成公) 휘 다성(多省)이 시조가 된다. 고려 때 이르러 휘 익점(益漸)이 있으니,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다. 본조에 들어와 도승지를 지낸 휘 화(和)가 있고, 호가 풍암(楓庵)인 휘 위세(緯世)가 있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성광(聖光), 영복(永福), 사길(思吉), 기보(基普)는 고조와 증조 이하 4대의 휘이다. 배위는 장흥 위씨(長興魏氏)로, 위익조(魏益祚)의 따님이다. 묘소는 중군봉(中軍峯) 해좌(亥坐)의 언덕에 있다. 모두 5남 2녀이니, 아들은 진호(振浩), 욱호(郁浩), 면호(勉浩), 병호(丙浩), 관호(寬浩)이고, 딸은 김지현(金之鉉), 윤제신(尹濟臣)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조용히 수양하여 홀로 행하였으니 潛修獨行
겸손함이 더욱 드러나네. 撝謙彌彰
내 명문을 지어 我作銘詩
무덤에 새기네. 用誌斧堂
竹汀文公墓誌銘
冠山府有治坊雀巢洞。有崇四尺。背艮而向坤者。卽故孝子竹汀文公衣履之藏也。歲久無誌。一日遺胤振浩。持家狀。過佳川敝廬。屬余文之。夫立言揄揚。百世不朽。顧何等重事。而乃於淺淺膚末如此生者見託耶。但零金散璧。慮有遺落。其收拾之不可不以時。而若其琢磨淬礪。出治光彩。則早晩自有其人焉。謹按。公姓文。諱宗鉉。字國賢。以純廟丁丑正月二十九日。生於大里第。天姿淳實。幼有至行。家世貧甚。無以爲資。耕稼漁樵。服勤就養。便身適口。無不畢給。暇日餘力。入塾行墨。諷誦硏究。蘊蓄該洽。侍疾血指。以甦旣絶。居喪過毁。幾於傷生。隣里感其孝。朋友服其行。累有剡薦之議。公聞之歎曰。設有卓絶之行。自是人子常分。固不爲區區干聞。況我之所爲。無一毫近似。而乃有此擧耶。此欺天誣人。罪有甚焉。遂力拒之。今上乙酉九月二十七日。卒于正寢。距丁丑懸弧爲六十九歲矣。於是鄕人狀其行。聞於官。繼而聞於繡衣。又聞於道伯。文氏系出南平。新羅武成公諱多省爲始祖。至麗朝有諱益漸封江城君。入我朝。有諱和都承旨。有諱緯世號楓庵。皆其顯祖也。聖光。永福。思吉。基普。高曾以下四世諱也。配長興魏氏益祚女。墓在中軍峯亥坐原。擧五男二女。曰振浩郁浩勉浩丙浩寬浩。金之鉉尹濟臣。孫以下不盡錄。銘曰。潛修獨行。撝謙彌彰。我作銘詩。用誌斧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