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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만희당 처사 홍공 묘지명(晩喜堂處士洪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03
만희당 처사 홍공 묘지명
아, 여기는 병좌병향(丙坐丙向)에 좌병향임(坐丙向壬)주 7)으로 혈(穴)과 봉분을 함께한 곳인데, 고(故) 만희당(晩喜堂) 홍공(洪公)과 그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의 무덤이다. 조금 내려와 정좌(丁坐) 언덕에 있는 것이 둘째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무덤이다. 공은 숙종(肅宗) 임진년(1712, 숙종38)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60세 되던 해에 졸하였다. 졸한 지 125년 뒤에 현손(玄孫) 형주(馨周), 기주(基周), 경주(慶周)가 무덤 앞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또 실제의 일을 기록하기를 도모하여 장차 무덤에 묘지명을 새기려고 행장(行狀)과 묘갈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금석문은 만년의 계책주 8)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소홀해질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선조를 향한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훌륭한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의 휘는 이발(履潑), 자는 자함(子涵)이니, 세계(世系)는 풍산(豊山)에서 나왔다. 직학사(直學士) 휘 지경(之慶)이 그 현조(玄祖 5대조)인데,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대대로 그 미덕을 더하였다. 고조는 휘 준(埈)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는 휘 덕우(德遇)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경고(景古)인데,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천규(天奎)이고 호가 오은(鰲隱)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이인량(李仁亮)의 따님이다.
공의 성품은 효성스러웠으니, 집이 가난하여 직접 집안 살림을 꾸렸고,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를 거행함에 지나치게 애통해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일찍 부친의 훈육을 받고 경전을 읽고 학업에 매진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면서도 막힘없이 시원스러웠으며, 의리를 행하여 환하게 빛났다. 오서육경(五書六經)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여러 설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회통(會通)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 역학(易學)에 심오하였으니, 순환하면서 복습하고 반복해서 깊이 연구하여 노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수(山水) 사이의 경치 좋은 곳에 초가집을 짓고 형제간에 다정하게 마주 보며 강론하고 토론하니, 원근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학당동(學堂洞)이라고 불렀다.
아들 영구(永九)는 나씨(羅氏)의 소생이다. 아들 영범(永範), 영조(永兆)와 김양려(金陽麗)에게 시집간 딸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홍씨(洪氏) 일문(一門)은 자손이 번성하고 훌륭한 가법(家法)이 향리에 소문이 나서 학문에 뜻을 둔 많은 선비가 바야흐로 성대하여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만희옹(晩喜翁)과 같은 여러 선배가 선도한 힘이 아니겠는가. 유풍과 여운이 더욱 백세토록 뻗어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지금 은택이 사라지지 않았고 친분이 다하지 않았으니 좋은 방향으로 계승한 민첩함이 마땅히 이러함에랴. 우러러보면서 감동하는데, 감히 그 부지런한 뜻에 일부나마 힘써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은둔하여 곤궁하면 형통하니 遯肥困亨
대대로 옛 음덕을 누렸네. 世食舊德
무덤에 글을 실으니 載辭幽堂
억만년 수를 누리리라. 用壽斯億
주석 7)좌병향임(坐丙向壬)
묘소의 방향을 말한 것으로, 병(丙 방위로는 남녘에 해당)을 등지고 임(壬 방위로는 북녘에 해당)을 향함을 의미한다.
주석 8)만년의 계책
〈능고대(凌敲臺)〉 시에 "백 년 인생에 지었을 만년의 계책이여, 바위 위 옛 비석엔 푸른 이끼만 남았네.[百年應作萬年計, 巖上古碑空綠苔.]"라는 시구가 있다. 《唐百家詩選 卷16》
晩喜堂處士洪公墓誌銘
嗚呼。此坐丙而向壬。竝穴而同墳者。故晩喜堂洪公及共夫人羅州羅氏之藏也。稍下而負丁者。系夫人河東鄭氏窆焉。公以肅宗壬辰生。生六十歲而卒。卒一百二十五年。而玄孫馨周。基周慶周竪墳前短碣。又謀記實。將以銘諸幽竁。持行狀及碣文來。命於義林。此是金石萬年計也。托非其人。恐涉疏歇。而其向先追遠之誠。誠可謂能子能孫矣。公諱履潑。字子涵。系出豊山。直學士諱之慶。其玄祖也。文學行誼。世濟其美。高祖諱埈。贈掌樂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議。祖諱景古。號枕漱亭。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有隱德。妣仁川李氏仁亮女。公性孝。家貧躬幹。忠養備至。執喪過毁。廬墓三年。早襲庭訓。劬經績學。文詞贍暢。行義煒燁。自五書六經至程朱諸說。無不淹貫會通。尤邃易學。循環紬繹。至老不倦。結茅山水間。兄弟對床講討。遠近士子。聞風空集。人號其地爲學堂洞。子永九羅氏出。永範永兆女金陽麗。鄭氏出也。洪氏一門。椒聊蕃衍。而家法之美。聞于鄕邦。濟濟志學之士。方蔚然而未艾。此非先輩諸公如晩喜翁垂創之力歟。流風餘韻。加以亘百世而不泯。況今澤未斬而親未竭。其式穀似述之敏。宜乎內爾也。瞻感攸至。敢不勉副勤意之一二也。銘曰。遯肥困亨。世食舊德。載辭幽堂。用壽斯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