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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 모정 형공 묘지명(茅汀邢公墓誌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7 / 묘지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7.0001.TXT.0002
모정 형공 묘지명
옥새 찍힌 교서(敎書)를 내려 격려하고 금을 하사하거나 품계를 더하였으니, 한(漢)나라 때 양리(良吏)가 여기에서 성대해졌다.주 5) 이는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이고 태평의 상징이니, 삼대(三代) 이하의 시대에서는 견줄 만한 왕조가 드물었는데, 오직 우리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즈음이 또한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권유하고 포상하는 전지(傳旨)가 날로 주군(州郡)에 내려지고 직분을 나누어 맡은 지방 관원이 날로 선(善)을 장려하자 어진 관리가 성대히 출현하고 칭송하는 소리 또한 자자하여 무궁한 아름다움에 이르렀다.
모정(茅汀) 형공(邢公)은 또한 당시의 어진 관리였다.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호) 경인년(1530, 중종25)에 외직으로 나가 남평(南平)을 다스렸고, 계사년(1533, 중종28)에 하양(河陽)으로 옮겼는데, 치적이 으뜸이어서 특별히 은혜로운 유서(諭書)를 내렸다. 그 유서에 이르기를 "지금 관찰사 송흠(宋欽)주 6)이 아뢴 말에 따르면, 그대가 남평을 다스릴 때부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청렴하고 부지런함이 이미 드러나 그대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유서를 받았는데, 하교하기를 "그대의 청렴하고 탁월한 재주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표리 1습을 하사하니, 그대는 받들라."라고 하였다. 위로는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충성을 바치는 신하가 있어 구름이 용을 좇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이 의기와 기질이 맞는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났으니,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선비가 삼대(三代) 때 태어나지 못해 이미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이 태평성대에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우리 동방이 흥성한 시대에 태어나 위로 성스럽고 명철한 군주가 있고 아래로 온화하고 고상한 신하가 있었으니, 송흠(宋欽) 선생 같은 분이 추천하고 칭송하기를 이와 같이 정중하게 한 것은 옳다. 그 나머지 작위를 받지 못하고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 것이 어찌 공에서 보탬이 되거나 손해나는 일이겠는가.
공의 휘는 자관(自寬), 자는 장백(長伯), 모정(茅汀)은 그의 호이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방(昉)이 그 중시조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정벌한 공로로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진양군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와 군철(君哲)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지냈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 경승(慶承)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은 용인(用仁)은 진사(進士)이다. 모친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11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고아한 지조가 있으며 청렴하였다.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대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정축년(1517, 중종1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기묘년(1519)에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다. 남평(南平)과 하양(河陽)의 고을 원을 역임하였는데, 남평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향사(享祀)를 지냈다. 병오년(1546, 명종1) 3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남평 저포면(猪浦面) 하류촌(下流村) 안산(案山) 병좌(丙坐)에 장사 지냈다.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주부(主薄) 김숭령(金崇齡)의 따님이다. 신해년(1491, 성종22) 9월 2일에 태어났고, 무신년(1548, 명종3) 1월 18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현(世賢)이고, 딸은 각각 양응기(梁應箕), 조국성(曺國聖)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현은 자식이 없어 양씨(梁氏)가 외손으로서 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공의 문적(文蹟)은 병화에 유실되었는데, 만년의 것은 양씨의 집안에서 약간의 유고(遺稿)를 얻었다. 종(從) 9세손 도열(道烈)이 눈물을 닦으며 붓을 들어 그 일을 서술하고 이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호남의 군현을 다스렸고 分憂湖郡
영남 고을을 맡아 다스렸네. 歷典嶺邑
봄볕이 빛을 발하였으니 陽春動輝
성상의 표창이 융성하였네. 天褒隆洽
어진 관리 계속 전해짐에 良吏續傳
누가 감히 공을 빠뜨리랴. 誰敢遺公
훌륭한 풍도와 위대한 공적 英韻偉蹟
무궁한 후대에 밝게 드리우리라 昭垂無窮
주석 5)조서를……성대해졌다
선제(宣帝)는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방관의 역할을 특별히 중시하여, 치적이 있는 지방관은 새서(璽書)로 권면하여 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은 품계를 높여 주고 관내후(關內侯)나 공경 대신(公卿大臣)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漢書 循吏傳》
주석 6)송흠(宋欽)
1459~1547.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담양(潭陽)ㆍ장흥(長興)의 부사(府使),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茅汀邢公墓誌銘
璽書勉勵。增秩賜金。而漢世良吏。於斯爲盛。此其明良之會。昇平之象。三代以下。鮮見其比。而惟我成宗中宗之際。亦庶幾焉。獎諭褒旨。日下州郡。而字牧分職。日勤於善。所以良吏蔚興。頌聲倂作。而用底于無疆之休也。茅汀邢公。亦當時之良吏也。靖陵庚寅。出莅南平。癸巳移河陽。以治平第一。特蒙恩諭。有曰。今仍觀察使宋欽所啓。知爾自爲南平時。薄賦愼刑。廉勤己著。民有去後之思。予甚嘉之。賜表裏一襲。以示褒獎之意。爾其體予至懷。終始不渝。明年春。又蒙諭。有曰。嘉爾淸白卓異。特賜表裏一襲。爾其頌受。嗚呼。上有願治之主。下有效忠之臣。雲龍風虎。何等盛儀也。士不生三代之上。旣不得與臯夔稷契都兪吁咈於太和照皞之中。則生於大東日中之世。上有聖明之君。下有儒雅之臣。如宋欽先生。而推引賞識。若是鄭重則可矣。其餘爵位之不揚。祚胤之不昌。曷足以加損於公也耶。公諱自寬。字長伯。茅汀其號也。麗朝平章事昉。其中祖也。再傳至公美。征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自晉陽君三傳至君哲。入我朝。官忠淸兵使。卽公之曾祖也。祖慶承。仕郞贈戶曹參判。考用仁進士。妣淸州韓氏。以弘治戊申十月三日生。公天資端詳。雅操廉潔。孝友文學。見重一時。丁丑中生員。己卯除中部參奉。歷宰南平河陽。南平民建祠。春秋享祀。丙午三月十九日卒。享年五十九。葬南平之猪浦面下流村案山丙坐。淑夫人光山金氏主薄崇齡女。辛亥九月二日生。戊申正月十八日卒。墓合祔。有一男二女。曰世賢。曰梁應箕。曺國聖。世賢無育。梁氏以外裔奉公祀。文蹟失於兵燹。晩於梁氏家得若干遺實。從九世孫道烈。抆淚沘筆以序其事。仍請余以誌墓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分憂湖郡。歷典嶺邑。陽春動輝。天寢隆洽。良吏續傳。誰敢遺公。英韻偉蹟。昭垂無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