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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 가선대부 행 전라도좌우후 조공 묘갈명(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墓碣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3.TXT.0011
가선대부 행 전라도좌우후 조공 묘갈명
아, 이곳은 고(故) 가선대부 행 전라도 좌우후 조공 휘 종성(鍾成), 자 문익(文益), 호 해은(海隱)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공은 태어나서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양친을 효성으로 섬겨 구체(口體)의 봉양과 심지(心志)의 봉양을 위해서는 힘을 다해 주선해서 다 갖추어 드렸다. 병을 간호할 적에는 지극히 근심하여 팔을 휘저으며 걷지 않고, 웃을 때 잇몸을 드러내지 않았으며,주 211)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병세에 대한 차도를 알아보았다. 이에 효성이 하늘에 감응하여 산 꿩이 뜰에 떨어지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거의 목숨을 해칠 정도였고, 부친과 모친상에 모두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향리에서 안타까워하여 지속적으로 천거하였다.
집안이 본래 너무나 가난하였는데, 공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재물을 모아 집안 살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친족과 이웃의 가난하고 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끼는 바가 없어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
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11월 8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이다. 정해년(1887, 고종24)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경인년(1890)에 6품으로 올랐으며, 계사년(1893)에 전라도 좌우후(全羅道左虞侯)에 제수되고, 이해 가을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임인년(1902)에 가선대부에 올랐다. 관직에 있을 적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며, 힘써 폐단을 제거하였으니, 집집마다 칭송하여 갈수록 더욱 자자해졌다. 병오년(1906) 12월 28일에 집에서 별세하였으며, 현(縣)의 입암리(笠巖里)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조씨(趙氏)의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고려(高麗)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휘 지수(之壽)가 시조이다.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휘 온(溫)이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참봉에 추증된 휘 사보(士普)이고, 조부는 휘 참봉에 추증된 휘 제채(濟采)이며, 부친은 공조 참판에 추증된 휘 인경(仁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선산(善山) 임씨(林氏)로, 임상원(林相原)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원도(李源道)의 따님이다. 공은 연안 차씨(延安車氏) 윤백(允伯)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 3녀를 두었으니, 기원(基元)은 전서(典書), 용원(龍元)은 주사(主事)이다. 사과(司果)인 경주(慶州) 김원영(金元永), 사과인 경주 김기활(金琪活), 임천(利川) 서선재(徐善才)가 사위이다. 장자의 아들은 병연(炳燕), 차자의 아들은 병선(炳善)이다.
기원이 족인(族人) 병두(炳斗)를 보내 묘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되지 않아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술하여 명을 짓는다.

입암의 기슭에 笠巖之麓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네. 有崇四尺
효자가 묻혔으니 孝子之藏
현인의 유택일세. 賢人攸宅
지나는 사람 가리키고 行路指點
초동이 공경할 줄 아네. 樵牧知敬
봄가을로 제수 올리니 春秋苾芬
자손들이 한없이 번성하네. 子孫繩繩
주석 211)팔을……않았으며
《소학》 〈명륜(明倫)〉에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장성한 아들은 머리를 빗지 않으며, 다닐 때 팔을 벌리고 흔들어 대면서 활기차게 걷지 않으며,……웃되 잇몸이 보이도록 크게 웃지 않는다.[父母有疾, 冠者不櫛, 行不翔,……笑不至矧.]"라는 내용이 보인다. 본래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글이다.
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墓碣銘
嗚呼。此故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諱鍾成。字文益。號海隱衣履攸藏也。公生有至性。孝事兩親。凡口體之奉。心志之養。周旋竭蹶。無不畢給。侍疾致憂。不翔不矧。嘗糞甛苦。以試差劇。孝感攸至。至有山雉下庭。執喪過毁。幾於傷生。居盧墓側。前後六年。鄕里感傷。剡薦相續。家素貧甚。公勤儉積累。以起産業。然於族戚隣里周窮恤匱之節。無所係吝。各得其心。純廟庚寅十一月初八日。卽其寅降也。丁亥除禁府都事。庚寅陞六品。癸已拜全羅道左虞侯。秋陞通政。壬寅陞嘉善。其在官。愛民施惠。務祛敝瘼。家稱戶頌。久愈藉藉。丙午十二月二十八日考終于居第。葬縣之笠巖里亥坐原。趙氏本漢陽人。麗朝僉議中書事諱之壽爲始祖。漢川府院君良節公諱溫。其中系顯祖也。曾祖贈參奉諱士普。祖贈參奉諱濟采。考贈工曹參判諱仁敬。妣貞夫人善山林氏相原女。系妣貞夫人全州李氏源道女。公娶延安車氏允伯女。擧二男三女。曰基元典書。曰龍元主事。曰慶州金元永司果。曰慶州金琪浩司果。曰利川徐善才。長房男炳燕。次房男炳善也。基元伻其族人炳斗。來謁隧道之文。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狀而纂次之如右云爾。銘曰。笠巖之麓。有崇四尺。孝子之藏。賢人攸宅。行路指點。樵牧知敬。春秋芯芬。子孫繩繩。